그리고 "김정은은 절대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야 전문가 취급을 받을 정도다. 하지만 물리학의 결정체인 핵과 변화무쌍한 인간 의식이 만나면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건 김정은도 예외일 수 없다. 그 '케미'를 찾는 여정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필자)
정책을 세울 때는 실효성이 중요하다. 실효성은 두 가지의 조합이다. 하나는 실현 가능성이고 또 하나는 효과성이다. 이 두 가지를 고루 갖출 때, 정책의 성공 가능성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최악의 정책은 두 가지 모두 결여될 때 나타난다.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밝힌 5자회담이 이에 해당된다. 그는 청와대에서 외교부, 통일부, 국방부 3개 부처로부터 합동 업무보고를 받고는 이렇게 말했다.
"6자회담을 열더라도 북한 비핵화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실효성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을 제외한 5자회담을 시도하는 등 다양하고 창의적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6자회담 무용론을 제기하면서 5자회담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다면 5자회담은 대통령 본인이 강조한 것처럼 "창의적인 방법"일까?
그렇지 않다. 6자회담 무용론과 5자회담 추진은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단골메뉴처럼 등장했었다. 애당초 부시 행정부가 북미 직접대화를 거부하고 다자회담을 고집한 데에는 '5대1', 혹은 '국제사회 대 북한'의 구도를 만들고자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5자회담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부시 행정부는 2007년부터 북미 직접대화와 6자회담 병행을 선택했다.
한동안 잊혀졌던 5자회담은 이명박 정부 때 다시 거론됐다. 이명박은 2009년 6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과거 방식대로 6자회담을 끌고 가는 것은 시행착오를 되풀이 해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미-일-중-러 5개국이 모여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조치를 협의하는 방안을 오는 6월 16일 한미 정상회담 때 오바마 대통령에게 요구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공염불로 끝났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박근혜 대통령이 제기한 5자회담은 새롭지도 창의적이지도 못한 것이다. 실패한 제안의 되풀이일 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제안이 실효성이 있으려면 실현 가능성과 적실성이 있어야 한다. 실현 가능성은 중국과 러시아의 동의 여부에 달려 있다. 박근혜 정부가 기대하는 적실성도 중국과 러시아가 강력하고도 포괄적인 대북 제재에 동참할 때 확보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두 나라는 북한을 제외한 5자회담도, 북한을 "뼈아프게 하는 제재"에도 부정적이다. 이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마찬가지며,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의 5자회담론이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부분은 또 있다. 그는 1월 13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어렵고 힘들 때 손을 잡아 주는 것이 최상의 파트너"라며 중국에게 강력한 대북 제재 동참을 호소했다. 하지만 정작 박근혜 정부는 중국의 처지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있다. 대북 확성기를 서둘러 틀어 "한반도의 안정과 긴장 완화가 필요하다"는 중국의 호소를 외면했다. 미국의 전략 폭격기 B-52 출동을 요구해 중국의 전략적 우려를 자극했다. 중국이 직간접적으로 '한중관계의 마지노선'이라고 경고했던 사드(THAAD) 배치도 "검토하겠다"고 했다.
6자회담 문제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북한의 핵실험이나 장거리 로켓 발사는 유엔 안보리를 통한 제재로, 대화는 6자회담 재개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북한과 미국을 설득해 '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도 줄곧 요구해왔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이 6자회담 무용론을 말하면서 5자회담을 제안하고 나섰다. 그것도 "북핵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결국 통일"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중국이 이런 한국을 "어렵고 힘들지"라고 여겨 손을 잡아줄 리는 만무하다.
기실 북핵 상황 악화로 어렵고 힘들어지기는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한미일에게는 '북한의 핵무장을 막는 데 한 일이 뭐가 있냐'며 타박받기 일쑤다. 북한으로부터는 '우리의 합리적인 안보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한 일이 뭐가 있느냐'는 핀잔도 듣는다. 그래도 노무현 정부 때까지 한중관계는 일종의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다. 미국의 대북강경책과 북한의 핵 개발 시도로 최대 피해를 보는 당사자는 한중 두 나라라는 인식을 함께 하면서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 맞잡았던 손을 놓고는 삿대질하는 사이로 바뀌었다.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박근혜 정부의 일방주의로 인해 "한중관계 역사상 최상"이라는 청와대의 자화자찬도 허무 개그로 입증될 날이 멀지 않은 느낌이다.
어쨌든 최고 지도자가 '5자회담론'을 들고나온 만큼, 외교안보 라인은 이를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대통령에게 잘못된 보고를 일삼고, 그래서 대통령의 잘못된 지시를 받아야 하며, 이에 따라 그걸 하는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 딱한 처지가 바로 현 정부의 민낯이다.
그런데 시늉조차 내기 힘들어졌다. 중국 외교부가 즉각 "6자회담을 조속히 재개해야 한다"며 박근혜의 '5자회담론'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또 하나의 외교 참사로 기록될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과 국내외 상당수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6자회담은 정말 쓸모없어진 것일까? 2008년 12월 이후 8년 가까이 열리지 않고 있고, 당사국들의 의지와 열망도 싸늘하게 식은 오늘날, 부질없는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6자회담이 쓸모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이 회담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는다. 더구나 성급하게 무용론을 내세우면서 산소마스크를 떼어버리면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6자회담의 역사를 복기해보면서 그 성과와 한계를 함께 들여다봐야 할 까닭이 아닐 수 없다.
6자회담을 생각하면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격'이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우선 그 탄생부터가 필연보다는 우연에 가깝다. 제네바 합의가 파기되고 2차 한반도 핵위기가 불거지자, 북한은 북미 양자회담을, 미국은 다자회담을 주장했다. 첫 만남부터 어색했다. 중국의 주선으로 북-미-중이 처음 만났다. 2003년 4월에 일이었다.
그런데 마치 소개팅하듯 주선자 중국은 '잘 얘기해보라'며 빠졌다. 이를 두고 북한은 양자회담이라고, 미국은 다자회담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부시 행정부는 양자회담 '불가', 다자회담 '가능' 입장을 견지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도 참여하는 5자회담이 거론되었고, 러시아가 우리도 참여하고 싶다고 요구해 6자회담이 된 것이다. 미중간의 논의 끝에 중국이 의장국이 되었고 첫 회담은 2003년 8월에 열렸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얼떨결에 시작된 6자회담이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적인 동북아 다자간 안보회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동북아에선 안보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공식적인 회담틀이 없었다는 지적이 많았었다. 그런데 북핵 및 관련된 문제를 풀기 위해 동북아 주요 6개국이 처음으로 모였다. 더구나 이 회담은 한반도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구축도 목표로 삼고 있다. 적어도 문서 상으로는 말이다. 일방주의의 화신이라는 부시 행정부 때 동북아 다자주의 틀이 만들어진 것은 지독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백미는 6자회담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평가이다. 부시 행정부는 퇴임 직전인 2009년 1월 3일 <미국인들이 모르는 부시 행정부의 100가지 기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외교정책의 최대 성과로 "6자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무기 및 핵 프로그램 폐기 약속을 받아낸 것"을 뽑았다. 임기 초에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지목하면서 '협상 불가'를 외쳤던 부시 행정부가 임기 말에 6자회담을 통한 북한과의 협상을 외교적 업적으로 내세운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6자회담은 크게 네 차례의 변화를 겪어왔다. 첫째는 2003년 8월 1차 회담부터 2004년 6월 3차 회담 때까지로 '북미 양자 대화 없는 6자회담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시기 6자회담을 바라보는 북미 간의 동상이몽이 컸다. 북한은 이를 북미대화의 틀로 간주한 반면에, 미국은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기피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실질적인 성과 없이 북미 간의 공방전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이때에도 6자회담 무용론이 나왔는데, 이는 주로 북미대화가 핵심이라는 논리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둘째는 2005년 8월 1단계 4차 회담부터 2006년 12월 2단계 5차 회담까지로 '6자회담 내에서 북미 양자 접촉이 병행된 시기'다.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한사코 거부했던 미국은 6자회담 내에서 북미대화를 병행할 수 있다며 다소 유연해진 입장을 보였고, 이를 미국의 적대시 정책의 변화로 간주한 북한도 협상에 적극적이었다. 한국은 중국과 함께 북미 간의 입장 차이를 조율하고 중재안을 내놓는데 외교력을 집중했다. 이에 힘입어 2005년 9월에는 포괄적인 문제 해결 원칙을 담은 9.19 공동성명이 나왔다.
그러나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가 불거지면서 9.19 공동성명 이행은 지체됐고, 결국 북한은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그러자 6자회담 무용론이 빗발쳤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본격적인 협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셋째는 2007~2008년으로, '북미회담에서의 타결과 6자회담에서의 추인 시기'이다.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북미대화가 6자회담과 별도로 진행되면서 주도적 위치를 점했다는 데에 있다. 2007년 1월에는 북미 대표가 독일 베를린에서 회담을 갖고 BDA 문제 해결 및 대북 중유 제공과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 합의가 이뤄졌고, 한 달 후에 열린 6자회담의 2.13 합의를 통해 이를 추인했다.
그 이후 북미간에는 여러 차례 직접 회담이 있었고 그 결과 6자회담에서는 북한의 핵신고서 제출 및 영변 핵시설 불능화와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 및 적성국 교역법 종료를 골자로 하는 10.3 합의를 내놓았다. 북한의 핵신고서 제출 문제로 난항을 겪던 2008년 4월에도 북미 대표는 싱가포르에서 만나 북한의 핵 신고서 제출과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의 조속한 이행을 골자로 하는 합의를 이뤘고, 7월 6자회담에서 이를 확인했다.
북핵 검증과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 지연으로 갈등이 고조되었던 2008년 10월에는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열린 6자회담에서 검증에 대한 최종 합의 도달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넷째는 2008년 12월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시기로 '6자회담 결렬의 장기화 국면'이다. 이 사이에 6자회담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북미 고위급 대화는 2009년 12월과 2012년 2월에 있었지만 둘 모두 단발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6자회담 개최에 대한 핵심 당사국들의 입장이 뒤바뀌었다는 점에 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과 미국은 북한에게 조건 없는 6자회담 복귀를 요구했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철회를 회담 재개의 조건으로 내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후에는 대체로 북한이 6자회담 재개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 반면에, 한국과 미국이 '비핵화 선행 조치' 등 전제조건을 내거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사이에 북핵 능력은 '눈덩이'처럼 커졌고 협상에 대한 기대는 '눈 녹듯' 사라졌다.
이러한 6자회담 약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선 각각 네 차례 있었던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는 6자회담이 결렬된 시기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6자회담이 북한이 핵무기를 더 고도화하는 데 시간만 벌어 줄 뿐"이라는 주류의 주장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오히려 6자회담이 최소한 북한의 핵과 로켓 능력 강화를 억제하는 데에는 유용했다는 평가가 진실에 가깝다.
둘째로 6자회담이 한미 양국의 '조건없는 6자회담 개최'에 대한 일관된 입장, 실질적인 북미대화, 남북관계의 개선, 한국과 중국의 중재자 역할 등이 맞물렸을 때 성과가 나왔다는 점이다.
끝으로 6자회담이 결렬된 배경에는 북한의 경직성과 핵에 대한 집착 못지않게 한미 양국의 의지 상실과 딴 마음을 품었던 것이 주효했다. 여기서 딴 마음이란 미국은 북핵을 이유로 미사일방어체제(MD)와 한미일 삼각동맹 등 군사패권주의를, 한국은 흡수통일론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5자회담에서 '더하기와 빼기 1'을 하면 된다. 6자회담 재개와 남-북-미-중 4자 회담의 병행 추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자는 한반도 비핵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후자는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하기 위한 것이다. 이 둘의 선순환적 융합이야말로 한국 국가전략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이 간단한 셈법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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