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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노동 개혁', 디플레 방아쇠 당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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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근혜 '노동 개혁', 디플레 방아쇠 당기나

[복지국가SOCIETY] 밥그릇 위협하는 기업 위주 '노동 개혁'

새누리당은 9.13 노사정 합의 이후 추석 전 "노동 개혁으로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를" 등 문구가 적힌 홍보 현수막을 걸었다. 한마디로 이번 노사정 합의에 따른 노동 시장 개혁이 청년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대국민 홍보전이다. 과연 이번 노사정 합의가 노동 시장 선진화를 통한 좋은 노동 개혁이고, 또한 청년 일자리 창출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그리고 현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시장 개혁의 결과가 거시 경제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실제 개인들의 삶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차례로 점검해보겠다.

'노동 시장'은 밥이다

<노동은 밥이다>(미래를소유한사람들 펴냄)는 한국노총 위원장을 역임했던 이용득 씨가 자신의 노동 운동 과정의 삶을 정리한 책 제목이다. 맞는 말이다. 노동 시장은 개별 노동자의 소득, 즉 밥그릇의 크기와 환경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장이다. 그래서 거시 경제적으로는 한 나라가 벌어들이는 소득을 1차적으로 노동자에게 분배하는 노동 시장을 1차 분배 시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개혁이든, 국회의 노동 관련 입법이든 모든 노동 관련 법안이나 행정규칙은 노동자의 삶과 직결된다.

하지만 노동 시장과 관련된 법규나 규칙 조항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련 법규가 너무 많고 용어들도 전문적이고 어렵다. 이번 노사정 합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동과 관련된 법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동 관련 법안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임금과 노동 시간을 규정하고 있는 근로기준법, 기간제 노동자인 비정규직과 관련된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 하청업체와 관련된 파견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 실업자를 위한 고용보험법, 마지막으로 노동 현장에서 사고를 당한 피해 노동자를 위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있다. 이번 9.13 노사정이 합의한 '노동 시장 구조 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의 내용들은 노동 관련 다섯 가지 법안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 9.13 노사정 합의문의 외형상 주요 내용(자료 : <한겨레> 2015년 9월 15일자 요약)

이번 합의안은 사용자 위주의 노동 시장 개혁안

위의 개략적인 노사정 합의안으로만 보면, 새누리당의 주장대로 노사정 합의에 따라 임금 피크제 도입과 정부의 기업에 대한 각종 지원책을 통해 청년 일자리가 크게 늘어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고 하지 않던가! 9.13 노사정 합의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

"근로 계약 체결 및 해지의 기준과 절차를 법과 판례에 따라 명확히 한다"와 "임금 피크제 도입을 비롯한 임금 체계 개편과 관련해 단체협약 및 취업 규칙 개정을 위한 요건과 절차를 명확히 하고 이를 준수한다"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이는 그동안 노동계가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일반 해고 요건과 취업 규칙 불이익 변경 완화'에 관련된 항목이다. 합의문에는 노동자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완화'라는 표현 대신 '명확히 한다'가 들어 있다.

이는 보수 정부 출범 이후 지난 8년간 사용자 측(재계)이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사용자 위주의 노동 시장 규제 철폐와 맥락을 같이한다. 우선 '저성과자'나 '업무 부진자'를 대상으로 쉬운 해고를 하는 것이 일반 해고 요건 완화이다. 다음으로 임금 피크제 도입이나 직무성과 중심의 임금 체계를 개편할 때, 노동자에게 불리한 취업 규칙을 손쉽게 변경하고 싶어 하는 사용자 측의 오랜 숙원을 박근혜 정부가 받아들였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지속적으로 친 재벌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고수해왔던 보수 정부의 경제 정책이 박근혜 정부라고 특별히 달라질 리가 만무하다.

▲ 새누리당이 걸었던 홍보 현수막. ⓒ새누리당

대표성 없는 불공정한 노사정 합의

기존의 노동 시장에서 노동자와 관련된 임금이나 해고, 근로시간 등의 중요 사안은 노동 관련 법률에 근거해야 하며, 노조나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 없이 노동자에게 불리한 노동 조건을 변경할 수 없다. 그러나 취업 규칙과 일반 해고 요건 완화가 실현될 경우, 사용자 마음대로 노동자에게 불리한 노동 환경을 추진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노동 파괴 현상은 불을 보듯 뻔하다. 특히 전체 노동자의 90%에 이르는 노동조합 울타리 밖에 방치된 1800만 명에 달하는 비노조 근로자의 고용 불안정성은 극에 달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노조가 있는 사업장은 대부분 취업 규칙보다 더 구속력이 강한 단체협약을 두고 있어 취업 규칙이 변경되더라도 단체협약은 보호받을 수 있다. (단, 이번 노동 시장 개편이 완성되면, 사측은 단체협약에 규정되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는 취업 규칙을 불리하게 변경할 수 있다. 편집자) 2014년 기준 정규직의 노조 가입 비율이 13.9%인 반면, 비정규직은 1.4%에 불과하다. 이번 노사정 합의는 대표성에 있어서도 말이 안 된다. 노사정위원회의 노동자 대표인 한국노총은 26개 산별노조로 구성되어 조합원 수가 전체 근로자의 4.5% 수준인 90만 명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 정규직 노조를 대변하고 있어 이번 합의에 따른 불이익이 자신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한국노총이 전체 노동자에게 극히 불리한 데도 불구하고 쉽게 합의해 준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다 정부의 노동 개혁 후속 작업으로 새누리당이 발의한 비정규직(기간제 및 파견 노동자) 기간 제한 연장(현재 2년에서 4년으로) 관련 기간제법과, 파견 업종 확대(55세 이상 노동자, 고소득 전문직 노동자, 농어업 업종 노동자의 파견 노동 규제 완화)를 위한 파견법 개정은 현재의 비정규직을 영원히 비정규직으로 고착화시키고, 일반 해고 완화로 줄어든 정규직 일자리를 기간제나 파견 근로자로 대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 있다. 결국, 정부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노동 개혁은 쉬운 해고를 통해 정규직 일자리를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리려는 의도와 임금 피크제 도입을 통해 기업의 임금 비용을 줄이려는 의도가 명백하다.

그렇다면, 정부가 의도한 대로 임금 피크제와 임금 상위 10% 이상의 임직원의 임금 인상 억제를 통해 청년 고용을 확대할 수 있을까? 청년 고용 확대나 비정규직 처우 개선 문제는 기업의 선의에 맡겨진 자율 권고 사안일 뿐이다. 이번 노사정 합의는 기업과 노동자 간의 의무 이행에 있어 비대칭성이 뚜렷한 불공정 합의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임금 피크제와 청년 고용 확대는 별개의 문제

사실 임금 피크제와 청년 고용 문제 간에는 별로 상관성이 없다는 것이 기존 업계의 사례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최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영환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2008-2014년 임금 피크제 시행 5개 은행 신규 채용 현황' 자료를 보면, 2000년대 중반부터 노사 합의로 임금 피크제를 도입한 우리(2005년), 하나(2006년), 국민(2008년) 등 5개 은행의 경우 2014년 임금 피크제 적용 대상 인원이 858명으로 2008년의 430명보다 두 배가 늘었지만, 오히려 정규직 신입 행원 수는 2008년 1887명에서 2014년 1401명으로 25%나 축소됐다.

임금 피크제가 정년 연장으로 늘어난 기업의 비용 부담을 줄여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정부의 임금 피크제 도입과 청년 일자리 창출의 연계 전략이 현재의 청년 실업 문제의 책임을 아버지 세대의 일자리 문제로 전가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

노동 시장의 환경 악화가 가계 소득 축소와 기업소득 확대로 나타나

정부의 주장과 달리 국제적으로 비교할 때, 우리 사회의 노동 시장 환경이 모든 면에서 노동자에게 불리한 최악의 조건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즉, 한국은 비정규직의 비중이 전체 근로자의 절반에 육박하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불평등도가 가장 심하다. 전체 근로자의 평균 근속 기간이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인 5~6년에 불과하지만, 연간 노동 시간은 2071시간(2013년 기준)으로 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긴 편이며, OECD 평균보다는 무려 400시간이나 많다.

국제노동기구(ILO)가 한국을 최악의 고용 불안 국가로 지칭하고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거시 경제 측면에서 기업 위주의 전 방위 노동 시장 착취 구조가 가져온 결과는 대부분 임금 근로를 통해 살아가야 하는 가계의 소득 분배 구조를 급속히 악화시켜 왔다. 이는 아래 그림을 통해 잘 드러난다. 국민총소득(GNI) 중에서 가계가 차지한 비중은 외환 위기 직전이었던 지난 1998년 72.8%로 가장 높은 비중을 기록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노동 시장에 비정규직의 비중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 국민총소득(GNI)의 가계 및 기업 비중 추이.

하지만 외환 위기를 맞아 노동법이 개악되어 기업들의 무분별한 정리 해고와 함께 새로운 일자리의 대부분을 비정규직이나 파견으로 채워지면서 가계 소득은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GNI에서 가계 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61.2%로 외환 위기 이후 지난 15년간 무려 11.6%포인트나 축소됐다. 금액으로 환산하면(2013년 GNI기준) 무려 167조 원이다. 2013년 GDP 가운데 민간 소비 규모 728조 원의 23%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가계 소득 비중이 축소되면서, 민간 소비가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내수 시장의 침체와 가계 부채의 확대 원인은 여기에 있다.

한편 GNI의 가계 소득 비중이 줄어든 만큼의 소득이 기업들의 곳간으로 이전되었다. 외환 위기 이후 GNI의 기업소득 비중은 같은 기간 13.9%에서 25.7%로 무려 11.8%포인트나 확대되어 GNI에서 가계 소득 축소분 만큼 기업 부문으로 고스란히 이전되었다. 최근 30대 재벌그룹의 사내 유보금이 700조 원을 넘는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이런 현상은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재벌 대기업 위주로 형성된 노동 시장의 착취 구조가 빚어낸 결과이다.

노동 시장 개선 없이 가계 소득 주도 성장은 불가능

우리나라의 사용자 위주의 노동 시장 환경 악화에 따른 가계 소득의 착취 정도를 국제적으로 비교해보자. 2012년 기준 GNI 대비 가계 소득 비중은 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낮은 60.8%로 OECD 평균 67.7%보다 무려 6.9%포인트나 낮았다. 반면, GNI 대비 기업 소득 비중은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25.8%로 OECD 평균인 18.2%보다 무려 7.6%포인트 높았다. 이는 우리 사회가 OECD 회원국 중 최악의 노동 시장 착취 구조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다. 최악의 노동 시장 착취 구조가 전체 임금 소득 축소로 이어져 가계 소득의 축소로 나타난 것이다.

지금처럼 비정규직 일자리를 과도하게 양산하는 열악한 노동 시장 환경을 개선하지 않고는, 가계 소득 증대를 통한 내수 회복 정책은 불가능하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시장 개혁'이 더 쉬운 해고를 유도하고, 비정규직 확대와 임금 피크제를 통해 전반적인 임금 소득을 줄이려는 의도임을 감안하면, 당초 최경환노믹스가 내세웠던 가계 소득 중심의 성장 정책이 허울뿐인 뻔뻔스런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새누리당이 9.13 노사정 합의 이후 내건 홍보 현수막의 구호가 사용자 입장에서는 노동 시장의 개혁이겠지만, 다수의 노동자와 가계에는 밥그릇을 위협하는 흉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승식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은 <성공한 국가 불행한 국민>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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