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다 내준 한국노총 지도부, 누구 편인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다 내준 한국노총 지도부, 누구 편인가?

[기자의 눈] 새누리당에 '대야' 설득 논리까지 만들어준 9.13 합의문

"중요한 국면마다 한국노총은 책임 있는 경제 주체로 그 역할을 다 해주었다."

새누리당 노동선진화특별위원회 이인제 위원장을 비롯해 여당 의원들이 한국노총과 관련해 최근 들어 자주 해온 말이다. 14일 한국노총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앞두고도 이 같은 '칭찬'은 또 나왔다. '오늘 중집에서 전날 노사정위 잠정 합의가 불발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취재진 질문에 20년가량 노동부에서 일했던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도 이렇게 말했다. "한국노총은 고비고비마다 역할을 다 해줬기 때문에 통과가 안 되리라고는 저는 상상을 못 하고 있다."

여당 의원들의 이런 칭찬 아닌 칭찬 만큼 한국노총의 흑역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없는 것 같다. 1946년 출범 이후 이승만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이 '노동조합 연맹'은, 이름을 대한노총에서 한국노총으로 바꾼 뒤에도 '대정부 지원' 성격의 합의를 반복해 왔다. 1995년 민주노총이 출범한 후에는 쫓기듯 '혁신' 보고서를 수차례 냈지만 말 잔치에 끝났을 뿐이다. 노사관계 로드맵, 기간제법, 복수노조 창구 단일화, 타임오프제 등 2000년대 이후만 해도 '야합'이란 오명을 얻은 합의가 벌써 여러 개다.

급기야는 '쉬운 해고'에 합의를 해줬다. 다른 조직도 아닌 노동조합을 상대로 '쉬운 해고' 제도를 함께 만들자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은 노사정위 안에도, 고용노동부 안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합법적 해고 방법인 징계 해고나 정리 해고의 조건을 바꾸는 것이 아닌, 새로운 종류의 해고 제도를 만들자는 압박이었다. 그것도 근로기준법을 개정하는 방식이 아닌, 정부의 '지침' 하달을 통한 방식으로 말이다.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은 합의문안에 적힌 "이 과정(지침 마련)에서 정부는 일방적으로 시행하지 않으며, 노사와 충분한 협의를 거친다"는 단서 조항을 안전장치라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임금피크제와 성과·직무 중심으로의 임금체계 개편 관련 합의 문안에서도 이 보기 좋은 단서 조항은 반복해서 등장한다. '합의'도 아닌 '협의'라는 구속력 없는 합의 결과로 박근혜 정부의 일방 통행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한국노총의 체력은 강했단 말인가.

당장 내부에서부터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노총 산하연맹인 공공연맹은 이날 지도부를 상대로 "노동자에게 불리하도록 길을 터줬다"며 지도부 사퇴를 요구했다. 금속노련·화학노련·고무산업노련은 민주노총 금속노조·화학섬유연맹과 함께 낸 성명에서 "한국노총은 스스로 중집 의결 사항을 위배했다"고 지적했다.

지침 협의에 합의해준 것도 모자라서 '법제화' 물꼬마저 제 손으로 터주었다. 일반해고 요건 완화와 취업규칙 관련 합의 부분에 각각 담긴 '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한다', '중장기적인 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한다'는 문안을, 아주 당연하게도 새누리당은 '법제화'로 곧장 해석하고 있다. 노동계 전체가, 적어도 한국노총 내부가 고개를 끄덕일 만큼의 지침 마련에 향후 실패한다면, 새누리당이 밀어붙일 법제화라도 방향을 달리 잡을 체력을 한국노총은 정말 가지고 있는 건가.

한때 정부조차 '추후 과제'로 미뤘던 기간제법·파견법 개정의 시한마저 '연말까지 해보자'며 승인해준 꼴이 된 점은 더 놀랍다. 기간제·파견 노동자 등 고용안정 및 규제 합리화 부분 합의문에는 "노사정은 실태조사 등을 집중 진행해 대안을 마련하고 합의 사항은 정기국회 법안 의결 시 반영토록 한다"고 적혀 있다. 교섭과 협상에 도가 텄을 한국노총 지도부가 이 같은 합의문이 '연내'라는 새 협상 시한을 스스로 안기는 결과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근로시간 단축 합의의 황당함도 만만치 않다. 전날 노사정위 합의문은 노사 합의에 따른 연장 노동 포함 최대 노동 시간을 주 52시간에서 주 60시간으로 사실상 늘려놓은 것과 같다. 연장근로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일방적인 정부 행정 해석으로 근로기준법에서 겉돌던 휴일근로 시간 16시간 중 절반의 존속을 덜컥 허락해준 합의다. 게다가 이는 근로기준법 개정이 필요한 일이다.

국회 내 협상 주체인 새정치민주연합은 '휴일근로의 연장근로 포함' 방향을 고수해 왔는데, 정작 한국노총이 나서 여당과 재계의 주장인 '8시간 특별근로 인정'을 합의해줬다. 당장 이완영 의원은 '야당이 +8시간에 반대하지 않겠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어제 노사정위에서 이미 합의가 됐다"고 했다. 한국노총이 직접 새누리당의 대야(野) 설득 근거를 제공해줄 만큼, 이미 조직 내부 정치 노선이 보수 정당 쪽으로 한참 기운 것인가.

파견법과 기간제법 개정은 '연말'을 시한으로 해놓고, '5인 미만 사업장·농업 등에 대한 근로시간 적용제외 제도 개선 방안은 2016년 5월 말까지 실태조사 및 노사정 논의를 거쳐 마련한다'고 합의한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2016년엔 총선이 있고 20대 국회가 새로 시작된다. 5인 미만 사업장의 근로시간 적용 제외 논의가 파견 확대보다, 기간제 사용기한 연장보다 덜 급하다고 결론 내릴 근거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렇게 내줄 대로 다 내준 합의 결과를 놓고 "노사정위 복귀부터 예견된 것이었다"는 뒷말이 많다. '대화를 거부하기보다 일단 협상 테이블에는 앉아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논리다. 단순 논리만 따져 어느 쪽이 맞건 틀리건, 협상이 일단 시작되면 시한이 생기고, 문안 조정에 기를 쓰게 된다는 것은 협상을 해본 이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다. 여기에 한국노총의 유려한 '협상'과 '타협'의 흑역사를 견주어 보니 '예견'이라는 한탄이 나왔을 테다.

김동만 위원장의 결정은, 그리고 한국노총 지도부의 결정은 자신들만의 것이 아님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중집 회의에서 산하 연맹(금속노련) 위원장이 분신을 시도했다. 복수의 산하 연맹에서 전날의 합의를 '야합'이라고 비판하는 강도 높은 성명을 냈다. 김동만 위원장 등 지도부는 이제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이 조합원들에게 할 말을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 내주고, 한국노총 지도부는 무엇을 얻었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도 함께 말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