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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보다 맥주를 사랑했던 셰익스피어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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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보다 맥주를 사랑했던 셰익스피어 부자

[삶과 문화가 있는 유럽 맥주 이야기 ①]

"책은 고통을 주지만 맥주는 우리를 즐겁게 한다. 영원한 것은 맥주뿐!"

괴테의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불후의 명작을 쓴 대문호도 독서보다 맥주 마시기를 즐겼습니다. 16세기 벨기에의 풍속화가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의 그림 속 농민들의 결혼식과 축제 장면에는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와인이 귀족과 부자들의 술이었다면, 맥주는 왕부터 농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은 '평등의 술'이었습니다.

맥주의 역사를 더듬으면 유럽 근·현대 민중의 삶을 이해하는 사회 경제사적인 의미가 보입니다. 이번 연재에서 왜 중세 수도원을 통해 맥주의 전통이 유지되었는지,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와 종교 개혁을 이끈 독일 성직자 마르틴 루터가 왜 그토록 맥주를 사랑했는지를 밝혀주는 실마리를 쫓으려고 합니다.

나치 독일을 이끈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우수성은 건강한 아이에 달려있다'며 갓난아기를 둔 엄마에게 맥주 마실 것을 권했습니다. 혁명과 독재뿐 아니라 사랑과 예술의 뒤편에는 어김없이 맥주가 있습니다. 맥주를 이해하는 것은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맥주를 사랑했던 역사적인 인물들과 유럽 역사에 녹아있는 서민들의 맥주 이야기를 찾아가다 보면 여러분도 '악마보다 검고 사랑보다 쓴' 맥주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연재 '삶과 문화가 있는 유럽 맥주 이야기'는 격주 목요일 발행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셰익스피어 부자의 대물림된 맥주 사랑

▲윌리엄 셰익스피어. ⓒ위키피디아
알렉산더 대왕은 죽었다. 죽어서 묻혔다. 먼지로 돌아갔다.
먼지는 흙이고, 흙으로 우린 반죽을 만든다.
그렇다면 그가 변해서 된 흙 반죽으로 마개를 빚어
맥주 통 주둥이를 막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시저 황제, 그도 죽어서 진흙으로 돌아갔으니
바람구멍을 막는 데 쓰였을지 모른다.
아, 세상을 떨게 하던 그가 흙덩이가 되어
겨울바람을 막으려 벽 구멍을 때우는 데 쓰이다니!

(<햄릿> 5막 1장)

"양조장 맥주 한 잔과 목숨의 보증서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명예 같은 건 버려도 괜찮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년)가 한 말입니다. 그는 진정 맥주를 사랑했나 봅니다.

셰익스피어는 런던의 가난한 극작가 시절 맥주를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런던 세인트폴 성당 맞은편에는 버로우 시장(Borough Market)이 있습니다. 근처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셰익스피어가 머물렀던 오래된 펍(Public House의 약자)이 있습니다. 바로 조지 인(George Inn)입니다. 우리말로 '조지 장기투숙호텔'이라고 할까요. 지금은 런던을 대표하는 오래된 펍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이 호텔 방에서 셰익스피어는 맥주잔을 앞에 놓고 대본 쓰는데 몰두했습니다. 마침내 습작이 완성되면 마당 가운데 간이 무대를 만들고 자신의 작품을 공연했습니다. 투숙객들은 마당과 발코니에 삼삼오오 앉아, 맥주를 마시며 자유롭게 연극을 구경했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 연극은 지문이 없는 대신, 짤막한 단어와 문장으로 서사가 이어집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배우들은 감탄사와 간결한 대사로 관객의 호응을 끌어 냈습니다. 관객은 배우와 한 덩어리가 돼서 울고 웃었습니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의 연극에 대한 청중의 반응을 살펴보는 셰익스피어의 모습이 상상 됩니다. 셰익스피어의 맥주 사랑을 기념해 미국에서는 '셰익스피어 오트밀 스타우트'라는 이름의 흑맥주가 출시돼, 맥주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맥주 사랑은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에게서 물려받았습니다. 존 셰익스피어는 이웃 도시에 살다가 청년 시절 스트랫퍼드 어펀 에이번(Stratford-Upon-Avon, 스트랫퍼드)에 정착했습니다. 스트랫퍼드는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1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에이번 강가를 따라 핀 수양버들과 드넓은 푸른 초원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살던 당시 이 도시의 인구는 2000명이었습니다. 1만 명이 넘는 도시가 영국에 단 3개였던 점을 고려하면 제법 큰 도시였지요. 스트랫퍼드에 남아있는 셰익스피어 생가에 당시 생활을 재현해 놓았는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아버지가 사용했던 진흙으로 빚은 투박한 도기 맥주잔들입니다.

▲ 스트랫퍼드 에이번 강의 전경. ⓒwikipedia.org

셰익스피어보다 250년 뒤 태어난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년)는 셰익스피어를 흠모해 조지 인을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디킨스는 셰익스피어 생가가 경매로 나오자, 모금 운동에 앞장서 3000파운드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역사 너머로 사라질 뻔했던 셰익스피어의 생가를 1847년 사들여 보존위원회가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이 집은 오늘날 대영박물관과 런던탑, 윈저 성, 윈스턴 처칠의 생가와 함께 영국 5대 관광지로 꼽힙니다. 연간 5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되었지요. 셰익스피어의 생가와 그가 즐겨 찾았던 펍은 훗날 영국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19세기의 셰익스피어'로 불리었던 찰스 디킨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활약한 16세기 당시 영국 상황을 살펴봅시다. 전국에 유행한 흑사병 때문에 런던에서만 인구의 25%가 사망했습니다. 그러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1564년을 기점으로 흑사병이 사라지면서 인구는 급속도로 늘기 시작합니다. 1500년 5만 명에 불과하던 런던 인구는 불과 백 년 만에 네 배로 늘어났습니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날 당시 영국 사회의 정점에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 귀족과 고위 성직자가 있었고, 귀족은 아니지만 가문의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신사 계급(Gentleman)과 시민 계급이 많이 늘어나 뒤를 이었습니다. 자작농과 장인, 소작농, 노동자, 농노, 빈민이 하층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시화로 상인과 장인이 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부르주아(bourgeois), 즉 교양과 경제력을 갖춘 시민계급으로 성장해 점차 힘을 갖게 됩니다.

▲ 셰익스피어를 기념한 '셰익스피어 오트밀 스타우트' 맥주. ⓒrogue.com
셰익스피어 아버지는 가죽 제품을 만드는 장인이었습니다. 장인들은 소와 말, 양, 염소 가죽으로 옷과 모자, 신발 등 다양한 물건을 만들었고, 양털을 깎아 장에 팔았습니다. 당시 장갑 제조업은 유망 직종이었습니다. 주로 귀족들이 비싼 값으로 주문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죽장인들이 소와 말 가죽으로 조끼와 신발, 모자를 만드는 데 주력했지만, 셰익스피어의 아버지는 부드러운 양가죽으로 장갑을 만드는 신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얇고 가벼운 양가죽 장갑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아버지는 갑자기 부자가 됩니다. 지금으로 보면 성공한 벤처 기업가지요.

예나 지금이나 (모두는 아니지만) 남자들이 큰돈을 벌거나 자기 분야에 성공하면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바로 정치입니다.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무원이 되어 자기가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싶어 합니다. 셰익스피어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큰 재산을 모으자 정치 일선에 나섭니다. 아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기 8년 전인 1556년, 그는 스트랫퍼드의 맥주 시음관으로 첫 공직에 나섰습니다. 지금의 감사원 감사관이나 국세청 조사관에 해당하겠지요.

그가 맥주 시음관으로 임명된 이유는 맥주를 잘 마셨기 때문입니다. 맥주 색깔만 봐도, 한 모금만 마셔도 맥주에 이물질이 섞였는지, 물 탄 맥주인지, 숙성은 제대로 됐는지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양조장과 여관, 술집을 돌며 하루 수 리터의 맥주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미각과 말술 주량은 아들 셰익스피어에게 이어졌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아버지는 빈틈없이 공직을 수행했습니다. 장갑 장인에서 시민계급으로 자수성가한 그는 사명감이 남달랐습니다. 수도원 내 양조장뿐 아니라 민간양조장인 '에일 하우스', 호텔, 대형 술집, 작은 음식점을 돌며 용량을 속였거나 물 탄 맥주를 발견하면 가차 없이 처벌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아버지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명성에 힘입어 2년 뒤 경찰서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시의원을 거쳐 셰익스피어가 네 살이 되던 해, 드디어 스트랫퍼드 시장에 해당하는 수석행정관에 오르게 됩니다.

시장으로서 셰익스피어 아버지의 역점 사업은 맥주 맛이 균일하게 유지되도록 잘 관리하는 것과 시민을 위안하고자 스트랫퍼드를 지나가는 유랑극단의 공연을 유치하는 일이었습니다. 스트랫퍼드는 런던과 양모 직물업이 발전했던 맨체스터, 철과 석탄의 중심지로 북잉글랜드 물품의 집산지인 버밍엄을 잇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길을 통해 수많은 극단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쪽에서 남쪽 지방으로 이동했습니다.

연극무대 앞 제일 좋은 자리엔 당연히 셰익스피어가 앉았을 것입니다. 감수성 예민한 꼬마 셰익스피어는 크게 감동했겠지요. 이런 환경이 그가 영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극작가로 성장하는 데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연극에 대한 아버지의 열정 덕분에 재능 있는 배우들의 연기를 코앞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셰익스피어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 셰익스피어의 생가. ⓒwikipedia.org

셰익스피어는 18살 되자 이웃에 살던 8살 연상 앤 해서웨이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묘비에는 1623년 예순일곱 살의 나이에 죽은 것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녀와 사이에 큰딸과 아들 쌍둥이를 두게 되는데, 결혼 3년 후 극작가로 성공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나게 됩니다.

셰익스피어는 생활비를 고향에 있는 부인에게 부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치 독일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20명이 넘는 자식을 낳고, 자식들을 그 당시 학비가 어마어마했던 대학에 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작곡했던 것 같이, 셰익스피어도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쉴 틈 없이 연극 대본을 썼습니다. 이 중 대부분이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습니다.

맥주는 객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매일 혹독하게 글을 쓸 때 예술적인 영감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를 키운 7할이 문학적 재능이었다면, 3할은 아버지를 통해 그에게 유전된 '악마보다 검고 사랑보다 쓴' 에일 맥주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요.

작가 소개

CBS, <한겨레>,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습니다. 평소 맥주를 사랑하다, 독일 통일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방문한 맥주의 본고장 독일 뮌헨에서 슈바빙(Schwabing) 거리의 흑맥주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중세 문화의 요람이었던 독일 안덱스(Andechs)와 스위스 장크트 갈렌(Sankt Gallen) 등 오래된 수도원을 방문해 마시는 연금술인 맥주 양조술과 맥주의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됐습니다.

귀국을 앞두고 영국으로 자동차 여행을 갔다, 부인의 교통사고를 계기로 재활 병원의 필요성을 절감해 국내 최초의 하우스 맥주 회사인 옥토버훼스트(oktoberfset.co.kr)를 창업했습니다. 현재는 푸르메재단(www.purme.org)에서 시민의 기금을 모아 장애 어린이를 위한 재활 병원을 짓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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