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이번 미국 방문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미·일 동맹의 전 세계적 확대·강화를 통해 노골적인 중국 견제를 공식화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방위협력지침 개정을 통해 전 세계적 차원에서 군사협력을 강화하기로 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일본이 분담하기로 했다. 센카쿠(尖角, 중국명 다오위타오·釣魚島)를 상정한 도서(섬) 방어를 위한 공동 대처도 명문화됐다.
미·일 정상회담 이후의 공동성명에서는 ‘힘에 의한 현상변경’에 반대한다며 중국의 움직임을 견제하겠다는 의도가 다시 한 번 천명됐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미·일동맹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중국을 겨냥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긴 했지만, 누가 봐도 미국의 아시아재균형 정책이 일본의 힘을 빌어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해졌다.
둘째, 아베 일본 총리는 미국 방문 과정에서 과거사를 직시하라는 주변국의 요구를 끝내 외면했다. 미 의회 연설뿐 아니라 미·일 정상 공동회견, 하버드 케네디스쿨 강연 등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인신매매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깊은 고통을 느낀다"며 국가의 책임을 비껴갔고, 2차 대전의 침략행위에 대해서는 "아시아 국가의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말로 넘어갔다.
반면, 아베 총리는 "일본과 일본 국민을 대신해 2차 세계대전에서 숨진 모든 미국인의 영혼에 깊은 경의와 함께 영원한 애도를 보낸다"며 미국에게는 최대한의 예우를 갖췄다. 주변국은 무시한 채 미국만 바라보고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미국도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본에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미국은 아베 총리를 극진히 환대하면서 "일본이 아시아 정책의 중심"이라며 노골적인 러브콜을 보냈다. 미 행정부 관료들이 일본의 과거사 직시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무게중심은 분명히 '과거'보다는 '미래'에 가 있었다.
어찌 보면, 미국이 과거사를 언급하는 주요한 이유는 '올바른 역사인식 자체가 중요하다'는 판단보다는 '일본의 과거사 외면이 한미일 3각 동맹에 해가 되지 않을까'라는 현실적인 우려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도 그러한 미국의 계산법을 정확히 궤뚫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사에 대한 미국내 여론의 압력을 외면해도 큰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달갑지 않게 돌아가는 동북아 구도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고 싶지 않든 동북아 구도가 우리에게는 썩 달갑지 않게 돌아가면서, 이제 더욱더 냉정하게 지금의 현실을 바라봐야 할 때가 됐다. 일본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접어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국익에 부합한 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단 두 가지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앞으로 일본에 올바른 역사인식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더라도 큰 기대를 갖지는 말자는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는 이제 상수가 되었다. 일본 사회의 인식이 전반적으로 우경화된 상황에서 일본이 갑자기 입장변화를 하기도 어렵고, 과거사에 대해 일부 진전된 언급이 나온다고 해서 일본이 진정으로 변화했다고 믿기도 어렵다. 일본이 조금이라도 사과하면 우리 외교의 성공이고 일본이 사과의 뜻을 보이지 않으면 우리 외교의 실패인 것처럼 인식해, 일본의 사과에 우리가 목매는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이제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는 진정성과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국익이라는 측면에서 타산적으로 생각해야 할 외교적 수단으로 바뀌는 양상이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끌어내 한일간의 우호를 진전시키겠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 되었다. 과거사 문제로 일본을 압박하면서 우리가 어떤 국익을 얻을 것이냐를 생각해야지, 과거사를 외면하는 일본에 대해 감정적 반응을 앞세울 때는 지나갔다.
둘째, 미·일 동맹 강화로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미·일의 구도에 우리가 편승할 필요는 없다. 중국에 대한 견제는 우리의 국익과 부합하지 않는다. 일본은 해양세력인 데다가 미국에 편승함으로써 '보통국가'를 이루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일 동맹을 통한 중국 견제에 적극적이지만, 우리의 이해관계가 일본과 같을 수는 없다. 미·일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전 세계적인 미·일 동맹에 편승해 중국과 대치하는 입장에 설 필요는 없다.
한국, 미국 일본과는 다른 새로운 입지 구축해야
결국, 한국은 변화하는 동북아 구도 속에서 미국, 일본과는 다른 새로운 입지를 구축해야 하는 상황에 서게 됐다. 좋든 싫든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과제가 던져진다. 아베 일본 총리의 미국 방문에서 드러난 '미·일동맹 강화를 통한 중국 견제'와 '일본의 과거사 외면'이라는 상황을 어떻게 우리 국익에 맞게 재해석해낼 것인가?
발상을 바꿔 '일본의 과거사 외면으로 인한 한일 갈등'을 한미일 관계에서 카드로 활용한다는 생각을 가져보자. 일본이 역사를 외면하고 한국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않는 상황에서 한미일 3각 동맹을 통한 중국 견제에는 동참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한미동맹이 우리 안보의 초석이고 한미일 관계의 중요성을 물론 인식하지만, 동북아에는 엄연한 역사적 긴장이 존재하며 우리의 중국에 대한 국익이 미·일과 같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데 있어 한일 갈등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미일 3각 군사협력에는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한일관계를 긴장관계로만 가져가서는 안 된다. 경제와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은 일본과 협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다. 비단 이런 이익을 떠나 한일관계가 긴장되면 될수록 일본의 우경화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므로 적절한 한일관계 유지를 통해 일본의 우경화를 제어해야 할 정치적인 수요도 우리에게 존재한다. 일본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과거사는 외면하면서 한일관계를 발전시키자고 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해관계에 따라 과거사 문제는 계속 제기하면서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른 분야의 관계는 발전시켜나갈 필요가 있다.
점차 확연해지고 있는 미·일 대 중국, 혹은 미·일 대 중·러의 구도가 우리의 외교적 선택을 어렵게 하고 있지만, 이러한 대립 구도를 역으로 보자면 지금의 동북아 대립구도를 대화와 협력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국만이 미·일, 중·러와 이해관계를 일정 정도 공유하면서 동북아 국가들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 수 있다.
미·일이나 중·러도 대화와 협력의 필요성을 인식할 것이나, 대립 구도의 한 축에서 대화를 주도적으로 추진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그 역할을 한국이 맡아준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경제, 사회, 문화 등 비정치적인 분야부터 시작해 정치 나아가 군사적인 분야까지 미·일과 중·러를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반도 국가로서의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제고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은 독자적인 위상과 역할을 찾아야 한다.
* 북한학 박사인 안정식 기자는 SBS에서 한반도 문제를 취재, 보도하고 있으며 북한 포커스(http://www.e-nkfocus.co.kr)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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