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굴뚝 청소부'라 칭하며 70미터 굴뚝 위에서 101일을 보냈다. 그 사이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었고, 쌍용자동차의 신차 '티볼리'가 출시됐으며, 7년간의 '해고 일기'를 묶은 책이 세상에 나왔다. 해고자와 회사의 교섭 역시 5년5개월 만에 재개됐다. 햇수로만 7년째 이어진 싸움, 그 기나긴 시간의 끝을 향한 또 한 번의 출발이 굴뚝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교섭이 시작된 지도 석 달째로 접어들었고 교섭 차수 역시 늘어가지만, 아직 해고자 복직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쌍용차 평택공장 앞, 희생자 26명의 얼굴 없는 영정이 걸린 분향소 역시 그대로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떤 '믿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공장 안 동료만 믿고" 굴뚝 위로 올랐고, 이젠 "회사를 믿고, 믿어야 살 수 있기에" 땅으로 내려왔다. 고립과 공포 속에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하고 100여 일의 시간을 보낸 이들에게, 더 나아가 지난 7년간 "이어지는 동료들의 죽음으로 몸에 향 냄새가 떠날 날이 없었다"던 해고 노동자들에게, 이제 회사는 어떤 답을 내놓을까.
이창근 전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획실장은 그 답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리고 믿겠다고 했다. 더 이상 분노를 삶의 중심에 놓고, 그것 때문에 다치고 싶지 않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내일을 믿습니다.' 2009년 쌍용차 옥쇄파업 당시, 평택공장에 내걸린 회사의 커다란 광고판 문구처럼, 지난 7년 동안 닿지 않았던 '내일'에 이젠 닿고 싶다고 했다.
101일간의 굴뚝 농성을 마치고 지난달 23일 땅으로 내려온 이 전 실장을 농성 해제 일주일 만인 지난달 30일 만났다. 인터뷰는 그가 입원해 있는 평택의 한 병원에서 진행됐다.
프레시안 : 한겨울에 굴뚝 위에 올랐다가 봄에 내려왔다. 건강은 어떤가?
이창근 : 아직 어지럽고, 몸이 무겁다. 잠수부도 심해에 있다가 올라오면 감압을 하고 표면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잠수병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 감압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그래도 정신적으로는 지금이 가장 건강한 것 같다. 굴뚝 위에선 너무 복잡하고 괴로웠는데, 빠져나오니까 이제 숨은 쉴 것 같다.
굴뚝에서 내려왔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어쩌면 2라운드의 시작일 수 있고, 드라마로 치면 이제 6막 정도가 끝난 것 아닐까 싶다.
그 드라마의 마지막 장을 가끔 상상한다. 2009년 정리해고 이후 정말 전쟁처럼 싸웠다. 이 싸움의 심판이 있다면, 그 마지막 장엔 당신들 모두 치열하게 싸웠고, 최선을 다했다고 회사와 해고자의 손 모두를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런 엔딩이었으면 좋겠다. 회사도 살아야 하고, 해고자도 살아야 한다.
프레시안 : 농성 해제 전 회사를 믿고 굴뚝에서 내려가겠다고 밝혔다.
이창근 : 지난해 12월 굴뚝 위로 올라갈 때, 우리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올라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 얼마나 무서움 많고 여린 인간인지 알리기 위해 올랐다고 했다. 공장 안 동료들만 믿고 70미터 굴뚝에 올랐다고 했다.
내려올 때는, 최종식 신임 사장과 중역들, 사무직 및 생산직 동료들을 믿고 내려간다고 말씀 드렸다. 믿는 게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지, 자꾸 의심하면 더 괴로울 것 같았다.
프레시안 : 공장 안 고공 농성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해고자 입장에선 일종의 무기일 수 있는데, 스스로 내려놓은 셈이 됐다. 농성을 해제하면서 교섭 중단 등에 대한 불안감은 없었나?
이창근 : 굴뚝에 올라갈 때는 이번 농성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올랐다. 모든 문제가 해결돼야, 그때 내려간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이유일 사장에서 최종식 사장으로 경영진이 바뀌고, 교섭 역시 진행 중인 상황에서 새 경영진과 해고자들이 협상을 해야 한다. 그런 교섭의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되려면 먼저 굴뚝의 자리를 비워서 부담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새 경영진이 선임되는 주주총회가 24일에 있었는데, 그전에 굴뚝을 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는, 장기 농성을 하고 싶지 않았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 위에서 버틴 시간이 309일이다. 그 언저리에 가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봤다. 그 시간은 죽음의 시간이었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나 자신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불안과 공포가 바늘처럼 찔렀다. 누군가 올라와서 우리를 끌고 내려가진 않을까, 노이로제 걸린 것처럼 겁을 먹었다.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김정욱 사무국장이 89일째 먼저 내려갔는데, 혼자 남으면서 많이 외롭고 무서웠다. 힘들었고, 많이 울었다.
원래는 고공농성 최단 기록을 세우고 싶었다. 빨리 해결하고 하루라도 빨리 내려가고 싶었는데, 그것 또한 녹록지 않았다. 노와 사 모두 정리할 것이 너무 많았다. 4가지 의제를 가지고 대화를 하는데 하루이틀 만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프레시안 : 이제 공은 회사로 넘어간 셈인데, 회사가 그런 믿음에 화답할 것이라고 보나?
이창근 : 화답할 것이라고 믿는다. 최종식 사장 취임 이후 처음 한 일이 부품사, 협력사들을 모아놓고 컨퍼런스를 연 것이라고 들었다. 협력사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당신들 덕택에 티볼리가 나올 수 있었다고, 고맙다고 했다고 한다.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임 최종식 사장 체제에, 어떤 희망과 기대를 걸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프레시안 : 굴뚝 농성 해제 전, 복직자 명단에서 스스로를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7년간 복직을 위해 싸워왔는데, 그렇게 밝힌 까닭은 무엇인가?
이창근 :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같이 싸워온 노조 동료들 입장에선 서운할 것이다. 저도 생계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해고자 187명 중에 나 하나 빠진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7년 동안 이름표처럼 달고 있었던 이 해고자라는 이름을, 회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런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회사를 믿는다거나, 복직 명단에서 스스로를 제외하는 것과 무관하게, 26명의 희생자들은 이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희생된 동료들에게, 복직 명단이란 게 존재하나. 그 누구도 대표할 수 없고, 대리할 수 없는 문제다.
저 역시 지난 7년간 복직을 위해 싸우면서, 인생의 소중한 시간이 모두 날아갔다. 26명의 동료를 잃었고, 개인적으로 소중한 시간을 많이 잃어버렸다. 이건 복직된다고 해서 회복되고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복직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싸움을 중단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 작은 힘이라도 남아있다면 기꺼이 보탤 것이다.
이창근 : 그런 걸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얘길 한다. 그렇게 싸우는 동안에 새 직장을 알아보지 왜 그러고 있냐고. 왜 7년, 10년을 싸우냐고. 나는, 그 사람이 10년을 싸우는 동안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고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고 이후 오랜 시간 싸우다 보면, 때로 분노가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이 다친다. 장기투쟁 하다가 병 걸리고 죽는 사람들이 나오는 게 우연일까? 아니라고 본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또 문드러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살고 싶어서 그랬다. 지금도 살고 싶다. 그걸 담아두고 분노하고 화내면, 내가 죽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이었다.
프레시안 : 굴뚝 위에 있는 동안 '반듯한 승리'를 여러 차례 이야기 했다.
이창근 : 어떤 건물이 제대로 서기 위해선 지면 자체가 반듯해야 한다. 그래야 건물이 기울어지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출발했으면 좋겠다. 해고자 문제가 풀린다고 해도, 회사가 계속 방어하는 차원에서 시혜적으로 접근한다면 과연 온전한 해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는 노사가 4대 의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볼륨을 키웠으면 좋겠다. 구체적인 각론만 얘기하지 말고, 총론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제 서로의 입장을 확인했으니, 노사가 윈-윈 게임을 했으면 좋겠다. 이 묵은 숙제들을 제대로 풀어서 쌍용차가 제2의 도약을 하고, 현대·기아차 중심의 시장 구조를 바꿔서 고객과 사회에 10원이라도 이익이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렇게 나온 결과가 이 7년의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이 긴 드라마의 최종회가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다.
프레시안 : 101일간의 농성을 마치기 전, '나도 사랑해'라는 글씨를 굴뚝 위에 썼다.
이창근 : 원래 쓰려던 말은 다른 말이었다. '잊혀진 사랑'. 조용필의 명곡이다. 이젠 굴뚝과 이별이니까. 여긴 더 이상 누군가 올라선 안 되는 곳, 이별해야 할 곳이니까. 이제 굴뚝은 끝이니, 굴뚝 밑 아래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나도 사랑해'라고 썼다.
살려고 버틴 시간이었다. 욕 나오면 욕을 했고, 화가 나도 삭히지 않았다. 상처받은 동료들이 너그럽게 봐 주셨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나면 사과할 날도 오지 않을까. 굴뚝에 있는 동안 <해고 일기>를 사주신 많은 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원하는 분이 있다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저자 사인을 해드릴 것을 약속드린다.(웃음)
대법 판결 즈음에 가장 많이 봤던 사진이 있다. 프레시안 최형락 기자가 찍은 공장 옥상 위 사진인데, 굴뚝에서 그 옥상이 바로 내려다보인다. 그 옥상을 보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많이 했다. 예전엔 그 공장 안에서 다시 일하는 상상이었고, 이젠 그때 동료들과 그 옥상 위에서 구름을 올려다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내일에 닿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희생자 26명은, 이제 더 이상 늘어나지 말아야 할 숫자다. 해고자들에겐 시간이 많이 없다. 어쩌면 이제 1초의 승부라는 생각을 한다. 지난 과거를 멈춰야 할 1초, 새로운 시간을 시작해야 할 1초의 시간이다.
101일의 굴뚝 농성, 이창근 지난 인터뷰 보기
<1> 어느 해고자의 6년…'렛잇비'에서 '사랑의 배터리'로
<2> 굴뚝 위에서 보낸 SOS…쌍용차 해고자들의 '프리클라이밍'
<3> 웃으면서 싸울거야, '분홍분홍'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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