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해고자 이창근.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9년 7월, 77일간의 옥쇄파업이 진행 중일 때였다. 당시 기자는 입사 2주차 신입이었다. 회사 내에서 진행된 2주간의 교육이 끝나고, 각 팀으로 배치되기 전 '연습 삼아' 어떤 현장이든 취재를 해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때 찾았던 첫 취재 현장이 하필 쌍용차 파업이었다.
경찰 병력이 검게 깔린 평택공장, 공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개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휴대전화 통화 연결음을 기억한다. 비틀즈의 '렛잇비(Let it be)'였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지난 10월이다. "예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었어요."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6년여의 시간을 거리에서 싸우는 동안, 노조의 언론 담당인 그의 휴대전화엔 이미 기자 수백 명의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을 테니.
햇수로만 6년째였다. 입사 2주차 신입이 6년차 기자가 되는 동안, 파업 당시 세 살이었던 그의 아들이 아홉 살 초등학생이 되는 동안,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프레시안 노동 담당 기자는 대여섯 번쯤 바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휴대전화 통화 연결음은 여전히 '렛잇비'였다.
"그게 렛잇비인데, 자꾸 기분이 이상해진단 말이지. 볼트가 날아다니고 경찰특공대가 들어오고 파업이 빡세지면 빡세질수록, 전화 연결이 잘 안 되잖아. 그럼 계속 렛잇비가 흘러나온단 말야. 어떨 때는 통화가 안 돼서 인터뷰를 못해도, 그 음악을 그냥 멍하니 듣고 있게 되는 거야. 근데 이상하잖아. 파업은 점점 빡세지는데, 음악은 렛잇비. 그냥 내버려두라는 거잖아. 야, 뭔가 겁나 슬프지 않냐?"
77일간의 파업이 끝날 무렵, 술잔을 앞에 놓고 타사 선배가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당시 쌍용차 파업을 취재했던 기자들 사이에 회자되던 비틀즈의 팝송. '우릴 그냥 내버려 두세요'라는 노랫말이 공장 옥상 위 최루액을 뿌려대는 경찰특공대의 헬기 모습과 겹쳐졌다. 파업이 끝나고, 그는 감옥에 갔다. 렛잇비는 한동안 들을 수 없었다.
6년 만에 돌아간 공장…'지상' 아닌 '허공'에 서다
그가 다시 그 공장 안에 있다. 2009년 쌍용차의 정리해고는 '유효'하다는 대법원 판결 후, 결국 돌아간 곳이 공장 안 굴뚝이다. 지난 6년 동안 해고자들이 애타게 돌아가고 싶었던 곳이지만, 결국 지상에 닿지 못하고 70미터 허공 위에 섰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지상에서 몰리고 몰린 사람들이 높은 곳으로 오르는 일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은 아닐 테니. 쌍용차 해고자들만 해도 이번이 벌써 3번째 고공 농성이다. 왜 다시 공장 안 굴뚝일까.
"대법원 선고 당일엔 눈물이 많이 안 났어요. 지부의 입장을 정리하고, 전화가 걸려오면 응해야 하고 …경황이 없었어요. 밤 10시가 넘으니까 정신이 조금 들었는데…다음날이 되니까, 동료들 상황이 보이잖아요. 전화, 문자, 그리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다들 뭐랄까 철퍼덕, 주저앉아 있는 느낌이더라고요. 이러다 큰일 나겠다, 뭐라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여러 방법을 생각하고 고민도 많이 했는데, 결국 돌아갈 곳은 공장이었어요. 싸우고 있는 해고자들한테 '문제가 좀 풀리고 있구나'라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보여줘야 하는데, 공장 밖에서는 잘 안되겠더라고. 공장 안 동료들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방식은, 결국 굴뚝 밖에는 없더라고요."
수화기 너머 차가운 공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혹한 속 70미터 굴뚝에서의 생활. 스스로를 '굴뚝 청소부'라고 칭하는 그는 건강을 우려하는 이들에게 "이곳 쌍용차 굴뚝은 가장 높은 곳이 아니라 공장 안 동료들과 70미터로 가까워진 가장 낮은 곳"이라고 했다. 가장 위험한 곳이 아니라, "동료들을 24시간 볼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곳"이란 얘기다.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획실장, 김정욱 사무국장. 이들의 굴뚝 농성이 24일로 벌써 12일째다. 하필 맹추위가 한반도를 가격할 때, 육포 몇 장과 1인용 텐트, 여분의 배터리만 들고 그들은 굴뚝 위로 올랐다.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냐는 질문에 이 실장은 "밥 문제는 공장 안 동료들만 믿고 올라왔어요. 못 먹으면 굶어야지 뭐…"라며 웃는다.
"밥은 하루에 한 번, 매일 오후 6시30분에 올라와요. <무한도전>은 본방 사수를 외치는데, 우리는 '밥통 사수'를 외치고 있습니다. (전화 인터뷰가 진행된 21일까지 하루에 한 번 올라오던 식사는 노조의 항의 끝에 다음날부터 하루에 두 번 씩 제공되기 시작했다.-편집자)
다음날이 되면 당연히 밥이 식는데, 침낭에 넣고 해도 차갑게 식고 얼어버려요. 이 식은 밥을 어떻게 데울까 궁리를 하는데, 짜증이 확 나더라고요. 우리 동료들이 밖에서 밥이랑 물품을 올려주는데 회사에서 '이건 된다, 저건 안 된다' 이런 제약이 많아요. 기준이 뭐냐고 물어 봤지. 그런데 기준이란 게 없어. '(농성자들) 트위터 보니 모자는 이미 있는데 왜 또 올리나'. 이런 식이에요. 아주 감시를 하고 있다니까.
그런데 사람이 얼마나 간사하냐면, 그러다가도 따뜻한 밥이 올라오면 허겁지겁 먹어요. 그걸 먹다 보면 또 서러워. 그게 참 간사해요. 회사가 우리를 '파블로프의 개'로 만들고 있는 것 같아. 매일 6시30분 종소리가 울리면 침 흘리게 하는.
또 우리 동료들은 밥 한 끼 제대로 못 올라갈까봐, 혹시 우리가 여기서 굶을까봐 회사에 사정을 하고 또 사정을 해야 돼요. 그게 참 웃긴 거예요. 우리가 여기서 무슨 집을 짓고 사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우리가 밥 타령 하러 올라온 건 아니니까. 못 먹으면 어떻게 해. 굶어야지 뭐. (웃음)"
공장 안 동료 향한 연가
공장 안 동료만 믿고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70미터 굴뚝으로 왔다는 그들에게, 공장 안 노동자들도 소리없이 응답하고 있다. 농성 일주일 만에 평택공장 안에선 '내미는 손, 꼭 맞잡아 줍시다'라는 제목의 유인물이 돌기 시작했다. 5명의 현장 노동자들이 자신의 실명을 걸고 "2009년 사태(정리해고)는 우리 모두에게 아직도 불편한 진실"이라며 "지난 아픔 앞에 우리는 서로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도 해보지 못한 아픔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호소했다. 농성에 돌입하며, '조립3팀 샤시과 A조'에 근무했던 김정욱과 '조립3팀 샤시과 B조'에 근무했던 이창근이 보낸 편지의 화답이기도 했다. 이창근 실장은 이들을 '그림자위원회'라고 불렀다.
"실명을 걸고 움직인 다섯 분의 동료들은 이른바 '그림자위원회'의 대표들인 셈이죠. 그림자위원회가 몇 명인지, 그들이 누구인지는 몰라요. 그래도 출퇴근 할 때 굴뚝 아래에 와서 손 한 번 흔들어주는 동료들, 뒷걸음치면서 우리 얼굴 한 번 더 보고 가는 동료들. 그런 동료들이 많아요. 가끔이지만 '힘 내라'는 문자 메시지가 오기도 하고…. 조용하지만, 마음으로 지지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 분들이 그림자위원회죠.
물론 기업노조는 (농성에 대해) 아직까지 조심스러운 입장이고, 공장 안에서도 여러 의견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전 그런 의견들이 서로 대립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어떻게 보면 정반합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일 수 있는 거죠. 지금 이 과정이 건강한 진통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공장 안 동료들이 갈등하고 번민하는 과정이, 6년간 앓고 있는 이 정리해고의 홍역을 벗어나는 과정은 아닐지. 그 과정에서 발열이나 발진이 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농성 11일째인 23일, 이창근 실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두꺼운 방한 점퍼를 입고 있는 자신과 김 사묵국장의 '셀카'를 찍어 올렸다. "자랑 좀 하려고요. 공장 안에서 일하는 몇몇 분이 돈을 모아 겨울용 점퍼 두 벌을 올려주셨네요. 사무직인 분도 있고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분들이 마음을 모아줬습니다. 모두 2009년 해고되지 않았던 분들. 따뜻합니다." 농성 돌입 후 가장 '행복한 자랑'이었다.
공장 밖 해고자들은 쉼 없이 공장 안 동료들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회사도 법원도 외면한 상황에서, 마지막 버팀목은 공장 안 동료 밖에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1미터 폭에서 왔다갔다 고개를 빼서 아래를 보고, 눈을 들어 출근하는 동료를 봅니다. 표정을 볼 수는 없는 거리니까 천리안도 되어 봅니다. 굴뚝 아래로 동료들이 조금 더 지나가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12월15일 이창근 실장 페이스북)
"6년간 버티고 서있는 장승같은 사람들. 아래도 추운데 굴뚝 위는 얼마나 춥겠냐는 공장 안 동료의 말에 숨 한번 참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게요. 굴뚝 밑에 가서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주세요. 그래야 마음이라도 얼지 않지." (12월17일 고동민 쌍용차지부 대외협력실장 페이스북)
"쌓인 눈 치우는 동료를 본다. 차라리 저 눈처럼 당신들 눈 앞에 보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6년간 죽음 쌓이고 고름 흘러 바닥 적셨지만, 우리는 눈보다 더 못한 보이지 않는 유령 취급당하고 있으니까요. 눈이 부럽습니다." (12월22일 이창근 기획실장 페이스북)
미련해 보일 만큼 절절한 연가(戀歌)가 매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 울려 퍼진다.
티볼리를 함께 만드는 꿈
이들의 굴뚝 소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뉴스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내달 출시되는 쌍용차의 신차 '티볼리'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를 정도로 입길에 오르내렸다. 가수 이효리 씨가 "티볼리가 많이 팔려 해고됐던 분들이 복직되면 정말 좋겠다"는 글을 올린 것이 발단이 됐다. 쌍용차는 이효리 씨의 '무료 광고 모델 제안'을 거절했다.
신차 출시와 맞물려, 쌍용차의 최대 주주인 인도 마힌드라그룹 아난드 회장이 내달 12일 방한한다. 공장 안 기업노조와 해고자 복직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아난드 회장은 지난해 11월 정의당 심상정 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법적 결과에만 의지하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큰 틀에서 해고자 복직 문제를 2014년 말까지 전향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언급한 시기가 다가왔다. 이제 6년간 계속되어온 '죽음의 행렬'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이창근 실장은 "아난드 회장의 입국이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신차 출시와 해고자 복직은 별개의 문제"라고 했다.
"저희도 공장 안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신차가 잘 되고, 잘 팔렸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해고자 복직은 신차의 성공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에요. 그게 신차 성공과 '딜(deal)' 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닌거죠. 신차가 잘 팔리길 바라지만, 만약 차가운 반응이라면 해고자들은 공장에 못 돌아가나요? 그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신차가 잘 팔려서 우리가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분들의 마음은 틀린 게 아니에요. 쌍용차 문제 해결을 바라는 수많은 마음들이 있는 거죠. 바람이 있다면, 인도의 학자나 아룬다티 로이 같은 유명한 작가들이 '인도발 지지선언' 같은 걸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아난드 회장이 좀 들을 수 있게."
해고자들은 하루라도 빨리 공장으로 돌아가, 5년 만에 출시되는 신차 티볼리를 함께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들을 응원하는 이들도 농담처럼 "이효리랑 해고자들이 함께 신차의 광고 모델을 하면 좋겠다"고 바람을 이야기한다.
헛된 바람만은 아니다. 근로기준법상 사용자는 신규채용 시 해고된 노동자를 우선 고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신차 생산을 앞두고 쌍용차의 작업 물량이 크게 늘었고, 일손도 추가로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법이 법조문 밖을 벗어나지 못한 결과, 해고자들이 공장으로 돌아갈 시간은 유독 더디게 흘러간다.
정리해고 6년, '렛잇비'에서 '사랑의 배터리'로
이창근 실장은 해고자 가족의 아이들에겐 "축구를 가장 잘하는 삼촌"(권지영 가족대책위 대표)이고, 동료에겐 "김주익이 죽었을 때 입사 이후 가장 많이 울었던 눈물 많은 형"(해고자 고동민 씨)이기도 하지만, 그를 잘 모르는 기자가 보기엔 늘 재치와 유머가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가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인 SNS엔 이따금 서러움과 분노가 스치기도 한다. 그들이 굴뚝 위로 오른 날, 또 한 명의 해고자가 목숨을 잃었다. 정리해고 이후 "상복을 벗은 날이 없고, 몸에서 향 냄새가 떠난 날이 없었다"는 해고자들에게 날아온, 26번째 부고장이었다.
"여기에 올라오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요즘엔 우리를 봐 주는 사람들의 마음에 본의 아니게 악마를 선사하고 있구나…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켜보는 분들도 괴롭죠. 그럼 어떻게 손 내밀 수 있을까. 웃어야죠. 웃는다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에요. 그것 만큼 스스로 견디게 하는 것도 없고요. 물리적인 이유도 있어요. 눈물이 많이 나는데, 바람 불 때 특히 서러워요. 그럴 때 눈물이 나면 찬바람에 얼잖아요. 그러면 피부가 망해. (웃음) 그래서 참는 거예요.
낮이 선생일 때도 있지만, 밤이 선생일 때도 있어요. 밤에 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요. 가급적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회사에선 저기 올라가서 농담이나 하고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웃음의 이면을 봐줬으면 좋겠어요. 정말 그걸 봐줬으면 좋겠어요. 우린 정말, 치열하게 웃고 있거든요. 저 밑의 동료들은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고. 그런데 이 상황을 책임져야 할 회사는, 정부는, 너무 느긋한 것이 아닌지…."
나를 사랑으로 채워줘요
사랑의 배터리가 다 됐나봐요
당신 없인 못살아 정말 나는 못살아
당신은 나의 배터리
인터뷰를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그의 통화 연결음은 더 이상 '렛잇비'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배터리가 절실하기도 하고, 지금도 '렛잇비'하자고 하면 사람들이 괜히 걱정할까봐"라며 웃었다. 트로트 가수 홍진영의 '사랑의 배터리'였다.
"또 알아요? 굴뚝에 있는 어떤 해고자가 이 노래를 컬러링으로 썼다는 걸 홍진영 씨가 알면, 우리를 한 번 봐주고, 한 마디 말이라도 해줄지. 지금 이곳을 그대로 놔둬선 안되잖아요. 지금 여긴 온기가 필요하고, 손길이 필요하고, 또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니까."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조립3팀 샤시과 B조의 노동자였던 이창근이 다시 농을 친다. 해고자와 가족은 물론 의료진도 취재진도 들어갈 수 없는 공장 안, 그는 아마 어제의 동료들이 선물해준 점퍼를 입고 있을 것이다. 70미터 굴뚝 위에선 파업 당시 동료들과 함께 구름을 올려다본 공장 옥상이 보일지도 모른다. 정리해고 이후 2000일 동안 "내일에 닿을 수 없었다"던 그는, 바람대로 그 옥상 위에 다시 앉아 내일에 닿을 수 있을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