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끊임없이 글을 쓴다. 노조의 언론 담당, 희망버스의 대변인을 지내며 수천 건의 보도자료와 언론 기고글을 썼다. 2011년 김진숙과 한진 해고자들을 응원하는 '소금꽃 천리길'을 떠날 때에도, 평택부터 부산까지 9일간 420km를 걷는 살인적인 여정 속에 낮에는 걷고 밤에는 글을 썼다.
70미터 굴뚝에 오른 지금도 매일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아침과 저녁 인사를, 굴뚝의 일상을, 굴뚝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지난 6년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이창근 씨(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 얘기다.
그런 글들이 묶여서 나온 책이 <이창근의 해고일기>(오월의 봄 펴냄)다. 당초 대법원에서 승소하면 '복직 후 회고' 형식으로 낼 책이었다는데, 정반대로 그가 70미터 굴뚝 위에 있을 때 책이 세상에 나왔다.
"정말 간절히 바라는 건 그의 책보다 그가 먼저 땅에 닿을 수 있기를…". 책의 추천사를 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노동조합 간부이자 활동가, 그러면서 해고자로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쉼 없이 쓰고 또 쓰는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 싶었다. 인터뷰는 굴뚝 농성 62일차를 맞은 11일 이뤄졌다. 법원이 굴뚝 위의 그와 김정욱 사무국장에게 하루당 100만 원의 '방세'를 내라고 통보한 다음 날이었다.
잃어버린 어떤 한 단어
"그 날 이후, 우리는 단어 하나를 잃어버렸어요."
글을 쓰는 것의 의미를 묻기 위한 인터뷰였는데, 글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왔다. 한 언론사의 요청으로 세월호 유족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쓰기 위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쓰지 못했다는 그는, 유족들이 4월16일 이후 '어떤 한 단어'를 잃어버렸듯 그들 역시도 2009년 이후 단어 하나를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했다.
"4월16일 이후, 잃어버린 거예요. 역설적이게도 4월16일 이후 수천 편의 글과 수백 곡의 음악, 수만 점의 그림이 태산처럼 쏟아져 나왔지만, 찾지 못하고 있는 거죠. 수천, 수만 가지 언어가 나와도 그 고통과 찰나의 아픔들을 설명할 단 한 단어는 이제 없는 거죠."
팽목항으로 향하는 세월호 유족들의 도보 행진이 17일째를 맞은 날이었다. 마침 트위터에 도보 행진 소식을 전한 그는, '세월호 이후'의 잃어버린 언어를 이야기하며 쌍용차 해고자,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말들의 의미를 찾기 위한 과정일까. 해고 생활이 길어질수록 그가 쓴 글과 기록도 수북하게 쌓여갔다. 햇수로만 7년째 이어지는 싸움의 '기록'을 남기기 위함이냐 물었더니, 그 '한가한' 질문이 민망해지는 답변이 돌아왔다.
말 그대로, 자본과 권력이라고 하는 놈들은 전방위적으로 치고 들어오잖아요. 그렇다면 우리의 방어와 공격도 일방일 수는 없어요. 글이라는 표창도 던지고, 다른 대포도, 미사일도 던지고. 손에 잡히는 게 숟가락 밖에 없다면 그거라도 던져야죠. 그들이 '멀티(multi)'로 덤빈다면, 우리도 '멀티'가 되어야 하는 거죠. 우리 투쟁의 기록을 남기겠다,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수천 개의 말과 기록으로 해결될 문제였다면 진즉에 끝났어야 하는 싸움이었다. 그 자신의 표현대로, "투쟁은 기록이고 기록이 투쟁이라 말하지만 어떻게 3000장이 넘는 기자회견문을 쓰고 수백 번의 칼럼을 써대고 <해고일기>로 묶인 것보다 더 많은 홍보물을 만들고 뿌렸는데도 왜 이 사건은 끝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럴 바에야, 이 세상 모든 단어를 모조리 소진해 버리고 싶었다"던 그다. 그는 "우리가 맨몸뚱이로 싸우는 것은 그것만이 허락된 언어이기 때문"이라며 "노동자들은 몸이 언어"라고 말한다.
울다가 참다가, 다시 웃으면서
그래서일까. 김진숙 지도위원은 추천사에서 그를 '종군기자'라고 불렀다. 77일간의 옥쇄파업 당시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 또 하고 늘 통화 중이었던"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고통을 설명하는 일, 절망을 말로 전달해야 하는 일, 절망의 벼랑 끝에서 웃으며 희망을 말해야 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역할"이라고 증언한다.
이창근 실장은 손사래를 쳤다. "종군기자가 아니라 전투요원"이라는 것이다. "종군기자가 총을 드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추천사는 추천사의 가벼움으로 존재해야 하는데, 너무 좋은 추천사를 써주셔서 내 글의 값어치가 떨어져 안타깝다"며 웃는다.
그렇지만 김 지도위원의 말대로, 귀 닫은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고통을 설명해야하는 혹독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지난해 12월13일, 평택공장 70미터 굴뚝 위로 올라 그가 가장 먼저 쓴 글은 그날 세상을 떠난 동료의 죽음을 알리는 보도자료였다.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해 굴뚝 위로 오른 날 날아온, 26번째 부고장이었다. 그 자신도, "울음을 참으며 쓴 보도자료가 더 많았다"고 이야기 한다.
"2011년 2월 26일. 임무창 조합원. 그 때부터예요."
한 동료의 죽음이 있었다. "숟가락이라도 던지는 마음으로" 쉼 없이 글을 쓰게 된 시작이었다. 수화기 너머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동료의 부고일을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갈라진 목소리가 전해진다. 언론에는 13번째 사망자로 알려진 이. 아내의 자살 10개월 후, 통장 잔고 4만 원과 카드빚 150만 원, 두 아이만 남긴 채 아내 뒤를 따랐던 한 무급 휴직자의 이야기다.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내 안에서 무언가 턱 하고 무너지더라고요. 내가 싸워온 것에 대한 알량한 자존심, 이런 게 다 무너졌어요. 부질없었어요. 이어지는 동료들의 죽음들 앞에서 아직 나한테 그런 자존심이란 게 남아있었구나. 그게 정말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 때부터 미친듯이 썼습니다. 트위터든, 보도자료든, 언론 기고든."
고통의 글쓰기다. 이어지는 동료들의 죽음으로 파업 당시 외쳤던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가 현실이 됐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괜히 저 구호를 외쳤나 후회도 됐다"(38쪽)던 그다. 어제의 동료들을 '산 자(비해고자)'와 '죽은 자(해고자)'로 나눴던 정리해고가 실제 죽음으로 이어지면서, '죽은 자'였던 그 자신도 "상대적으로 살아남은 자의 위치에 서게 된", 그래서 그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마지막 기름 한 방울이라도 짜내는 심정으로" 글을 쓰게 됐다던 그다.
부고장이 하나둘 씩 쌓여갈수록,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다시 쌍용차 문제에 주목했다. 그의 표현대로,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가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기보다 압도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40쪽). 죽음이 마치 쌍용차 사태의 본질이 되어버린 상황, 그는 그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는 "고통을 말하고 싶지 않고, 고통의 박물관에서 하루빨리 나가고 싶다"고 했다.
"고통을 말하고 싶지 않다. 저들은 웃었기에 잘 살아오지 않았나. 살아 있으려면 웃어야 한다는 걸 안다. 힘들고 춥고 어지럽다는 말로 아픔을 전시하지 않을 테다. 몇 마디 단어로 소구되고 이미지가 호출되어 불려 다니는 것으로는 뿌리 삶의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았고, 없었다. 고통의 박물관에서 하루빨리 나가고 싶고 저들이 전시 운영하는 박물관을 폐쇄하고 부숴버리고 말 테다. 그래야 적어도 죽지 않고 잃지 않고, 사라지는 동료의 서늘함이 사라지지 않겠나.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살려고 오늘도 웃는다." (2월 11일 페이스북)
그는 "즐겁게 싸우고 기쁘게 사랑하는 것이 살아남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83쪽)이라고 썼다. "이것이 죽음이 내게 준 지침"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어두움과 좌절, 비극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전달되는 그의 굴뚝 생활기만 봐도, '이것이 혹한에 60일 넘게 농성 중인 자의 글인지' 신기할 정도로 발랄한 유머와 시시껄렁한 농담, 때론 찰진 욕이 부지런히 이어진다. 하지만 그 '웃음'의 이면을 읽지 못한다면, 그 또한 지독한 난독증일 것이다.
김밥 말아 공장 앞에 서다
<해고 일기>의 표지엔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를 머리에 이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실렸다. 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물었다.
"2013년 대한문 농성 접고 내려와서, 뭘 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여러가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김정우 지부장은 구속됐지, 말 그대로 '억 소리' 나는 손배도 나왔지, 2심 선고는 당장 몇 달 후로 다가왔지, 대한문 가더니 뭐 하고 돌아 왔냐, 이런 비판도 나오지…. 뭔가 돌파구를 만들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막연히 공장 안 동료들과 만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김밥이나 팔아 볼까? 이런 얘기가 나왔고, 일단 한 번 해보자고 해서 열심히 김밥을 말았죠. 출근길 공장 앞에서 동료들 상대로 김밥을 판 거예요.
사실 팔기 전날 밤새 잠을 못 잤어요. 반도 안 팔리면 어떻게 하지? 엄청 떨렸어요. 구속되고 나와서 공장 앞에 처음 섰을 때, 그 마음이었어요.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거든. 6개월 살고 나오는데, 출근길에 노조 홍보물을 뿌리니까 받는 사람이 3분의1도 안 되는 거야. 대부분 안 받고 그냥 휙 지나가고…. 그 때의 그 비참함, 절망감, 쪽팔림…등에는 주책없이 땀만 흐르고. 너무 도망가고 싶었어요. 미쳐버리겠더라고. 자존심도 깡그리 무너지고. 파업 끝나고 구속돼 6개월 살고 나오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너무 힘들었던 거예요. 오히려 감옥 안에 있던 우리보다 밖에서 싸웠던 동료들이 더 힘들었던 거지.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깨지고.
그런 생각이 나서 김밥을 팔자고는 했는데, 파업 후 다시 공장 정문 앞에 섰을 때 그 느낌이더라고요. 그런데 8시도 안 됐는데, 김밥이 다 팔렸어요. 완판!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었어요. 혼자 신나서 빈 박스 들고 철없이 좋아하는 걸, 박승화 기자가 찍은 거예요. 속으로 엄청 웃었거든요, 그때. 첫 날 그렇게 완판되고 우리 김밥 장사, 오래했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만으로도 상상할 수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공장 앞에 다시 선 날, 파업 당시 '죽은 자'들을 향해 쇠파이프를 들던 손에 김밥을 기꺼이 받아든 동료들, 다 팔려 텅 빈 김밥상자를 들고 신나서 뛰어다니는 해고자들의 모습…. 그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웃고 있었다.
싸움의 색깔이라면, 분홍
책의 인세는 전액 '분홍 도서관' 건립에 쓰일 예정이다. 그의 오랜 꿈이다. 쌍용차 해고자들과 그들의 아이들,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연대했던 사람들이 모여 책 읽고 놀며 이야기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도서관은 도서관인데, 왜 하필 '분홍'이냐고 물었다. 처음엔 "그냥 따뜻하고 예뻐서"라고 답하던 그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긴 이야기를 이어갔다.
"작년에 몇몇 예술가들이 '파국 이후의 삶'이라는 전시 기획을 한 적이 있었어요. 몇몇 사람들을 인터뷰 했는데 각각 다른 색깔의 카드를 준 다음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카드를 고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과거는 회색, 현재는 분홍, 미래는 초록을 골랐어요. 이유를 설명하라고 해서 회색은 먹구름, 불안, 초조를 뜻하고 초록은 푸른 잔디 같은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막연히 썼죠.
그냥 그게 지금까지의 경험이에요. 우리가 정말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까지 너무 아프게 놔두진 말자는. 그래서 싸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우리의 싸움의 색깔이, 분홍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가 생각하는 '분홍 도서관'의 모습은 이렇다. 일단 아이들이 뛰어노는 너른 마당이 있다. 노인이 되어가는 해고자(그 때는 더 이상 해고자라는 이름이 아닐 것이다)들과 그 가족들,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많은 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공간이다. 먼저 떠난 동료들의 아픈 이야기를 기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도서관의 가장 중앙, 가장 넓은 공간엔 책이 한 권도 없다. 대신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가장 훌륭한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이창근 실장은 "그런 소박한 도서관 하나 만드는 것이 착한 사람들의 따뜻한 연대에 할 수 있는 보답 아니겠나"라고 했다.
이 구상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목소리도 어느새 '분홍분홍'해졌다. '분홍분홍'이란 말이 가져다주는 어떤 이미지가 있다면, 그랬다.
<해고 일기>의 후속작이 나온다면, 분홍 도서관 건립 일기일까. 혹은 많은 이들이 희망하듯 <복직 일기>란 제목이 붙을까.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른다면 근접하게나마 '잃어버린 단어' 하나 쯤 찾을 수 있을까. 그 책엔 그 목소리처럼, 또 어떤 '분홍분홍'한 이야기들이 담기게 될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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