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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한국의 성공? 어떤 성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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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한국의 성공? 어떤 성공인가"

[굴뚝신문]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지난해 12월 13일 쌍용자동차 굴뚝 위에 오른 해고자 이창근 씨의 휴대폰엔 기자 연락처만 수백 개라고 합니다. 2009년 해고된 이후 6년째 노조의 '대변인' 일을 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런 그가 동료 해고자인 김정욱 씨와 함께 70미터 높이 공장 안 굴뚝에 올랐단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절절한 보도자료를 밤새워 쓰던 그의 농성 시작 소식에 <프레시안>, <경향신문>, <한겨레>, <미디어오늘>, <오마이뉴스>, <참세상>, <미디어스>,<레디앙>의 전·현직 노동 전문 기자들이 머리를 맞대기로 했습니다. <굴뚝신문>이 만들어진 배경입니다.

<굴뚝신문>의 한 꼭지인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지젝은 2012년에도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 차려졌던 쌍용차 정리해고 희생자들을 위한 분향소를 방문해 지지의 마음을 전한 일이 있습니다. 이창근·김정욱 두 사람의 고공 농성 소식을 듣고는 지난해 12월 18일 "당신들의 굴뚝은 세계를 비추는 등대"란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지젝과의 인터뷰는 지난 6일 이메일을 통해 이뤄졌으며, 인터뷰 진행과 정리는 이택광 경희대 교수가 맡았습니다. 편집자

이택광 : 당신은 "노동의 보편적인 연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늘날 그것은 왜 중요한가?

지젝 : 당신이 세 번째 질문에서 완벽하게 공식화하고 있는 것처럼, 자본은 세계로 확산되고 있지만, 노동은 지역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자본은 끊임없이 하나의 집단을 다른 집단에, 하나의 국가를 다른 국가에 대립하게 만들면서 작동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투쟁이 기회를 잡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국제적인 연대 네트워크를 건설하기 위해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우리의 연대는 공식적인 실업자들 만을 망라하지 않는다. 실업자라는 범주는 더 많은 사람들, 일시적인 실업상 태에 있는 사람들이나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더 이상 취업할 수 없는 사람들과 영원히 취업하지 못하 는 사람들, 빈민가나 다른 모든 종류의 게토에 사는 사람들(마르크스 자신이 "룸펜 프롤레타리아"라고 묵살했던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대 지도의 빈 공간처럼 세계적인 자본주의화의 과정에서 배제된 모든 영역, 인구, 또는 상태까지도 포괄해야 한다.

이택광 : 당신은 처음으로 서울 대한문 농성 장을 방문한 뒤 계속 쌍용 해고 노동자 들을 지지했다. 해고 시스템에 대한 그들의 저항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가? 이런 행동이 당신이 "노동의 보편적인 연대"라고 부른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지젝 : 쌍용 해고 노동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간디의 지침을 떠올린다. "너 자신이 세상에서 보고자 하는 변화가 되라." 쌍용 해고 노동자들은 보편적 연대를 위해 기여할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바로 살아 있는 보편적 연대 자체이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싸우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목적으로 삼을 만한 어떤 대안도 없다는 말을 듣는다. 맞다.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노동자들은 대안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논쟁의 화제를 제기한다. 그들이야말로 대안인 것이다.

이택광 : 지금 쌍용 자동차의 최대 주주는 인도의 마힌드라이다. 이 회사는 해고 노동자를 고용할 여력이 없다고 말하면 서도 새로운 인력을 계속 충원하고 있다. 자본은 세계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는데, 노동자들은 지역에 묶여 있다. 새로운 고용의 문제가 이런 처지에서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해결책은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젝 : 오늘날 우리는 적의 선동이라고 불러야 할 끔찍한 압박에 놓여 있다. 알랭 바디우를 인용해서 설명하자면, "적의 선동 목적은 존재하는 세력을 절멸시키는 것(이 기능은 일반적으로 경찰력으로 넘겨진다)이 아니라, 오히려 상황의 간과된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적은 희망의 싹을 잘라 버리고자 한다. 이런 선동의 메시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모든 가능 한 세계 중 최고가 아니긴 하지만, 가장 덜 나쁜 곳이고, 그래서 발본적인 변화는 더 나쁜 것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체념적인 확신이다.  

발본적인 사회변화가 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라는 말을 들을 때, "불가능"이라는 말이 우리를 멈춰서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오늘날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은 이상한 방식으로 나뉘어 있다. 한편으로 사적인 자유와 과학적인 기술의 영역에서 본다면, 불가능한 것은 점점 더 가능해지고 있다. (아니면 그렇게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다)

"불가능한 것은 없다." 우리는 온갖 도착적인 방식으로 섹스를 즐기거나, 음악, 영화, 텔레비전 시리즈의 아카이브를 몽땅 다운로드 받거나, (돈만 있으면) 우주에 가는 것도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능력을 강화하거나, 유전자를 통해 기본 자질을 조작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정체성을 소프트웨어에 저장했다가 다른 하드웨어에 다운로드하는 방식으로 영생을 가능하게 만들 유전공학의 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경제적인 관계의 영역에서 본다면, 우리 시대는 성숙의 시기로 받아들여지는데, 공산주의 국 가의 붕괴와 더불어 인류는 오래된 천년왕국의 꿈을 버리고 불가능성에 갇힌 현실성(이라고 쓰고 자본주의적인 사회경제적 현실성이라고 읽는다)이라는 제약을 수용했다. 당신은 단체행동을 할 수 없고(필연적으로 전체주의적 테러로 귀결될 것이니까), 낡은 복지국가에 집착할 수 없고(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경제위기를 초래할 것이니까), 세계시장으로부터 당신을 고립시킬 수 없고, 기타 등등, 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생태주의 역시 불가능성의 목록에 추가된다. 전문가의 견해에 기초해서 제시되는 섭씨 2도 이상 지구 온난화는 안 된다 따위의 이른바 한계치가 그렇다.

그 이유는 우리가 경제의 자연화라는 탈정치적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결정은 순수한 경제적 필연 성의 문제로 제시되는 규칙으로서 존재한다. 긴축정책이 실행될 때, 우리는 되풀이해서 그냥 해야 하는 일이라는 말을 듣는다. 경제는 새로운 우리의 운명이고, 제기되는 커다란 질문은 이 운명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나누어야 할 때가 우리에게 도래했다.


▲ <굴뚝신문> 1면과 8면.

이택광 :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 재난적인 영향을 끼친 신자유주의에 대해 지적했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끝나지 않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의 의미는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젝 :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독특하게 명징한 방식으로 지구적 자본주의의 적대를 눈앞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상황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 도입부에 나오는,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는 앞에 놓인 모든 것을 가졌고, 우리는 앞에 놓인 어떤 것도 가지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천국으로 향했고, 우리 모두는 다른 길로 향했다"라는 구절을 상기시킨다. 높은 경제적 성과, 그러나 맹렬하게 강도 높은 작업리듬, 고삐 풀린 소비의 천국, 그러나 고독과 정말에 빠져 있는 지옥, 넘쳐나는 물질적 부, 그러나 불모의 풍경, 고대 전통의 모방,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 이런 극단적인 양면성은 한국의 이미지를 궁극적인 성공담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방해한다. 성공, 좋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성공인가?  

이택광 : 당신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염세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말 했다. 만일 역사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위한 실마리를 하나 인정한다면, 어떤 것을 들고 싶은가?  

지젝 : 나는 만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염세적인 관점에서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좋다면, 바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망이 어두울 때만, 우리는 미래로부터 비치는 징조들을 알아볼 수 있다. 숨겨진 잠재성으로서 현재에 잠들어 있는 유토피아적인 미래의 파편들.   

그래서 지금 한국에서 이런 방향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있는 것인데, 그것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의 행동이다. 그들의 저항은 더 나은 임금이나 더 나은 작업 조건, 또는 자신들의 취업이라는 단순한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다. 온전한 삶을 위한 투쟁이고, 급속한 한국의 근대화로 위협받는 하나의 세계가 저항하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가, 전체 문명, 또는 탈역사적인 상품화로 위협 받는 일상적인 제례와 의례의 문화를 구해내기 위해 구 체적인 의미의 지평으로서 여기에 서 있다.    

이런 저항은 보수적인 것인가?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자기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선언한 오늘날의 주류는 진짜 보수가 아니다. 자본주의적으로 끊임없이 자기 혁명을 수행하면서, 단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인 삶에 대한 파괴적인 결과를 억제하고 사회적인 일관성을 지키고자 몇몇 전통적 제도(종교 같은 것)로 자본주의를 보충하긴 하지만 말이다. 오늘날 진짜 보수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적대와 교착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자, 단순한 진보를 거부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진보의 어두운 이면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가장 급진적인 좌파가 가장 진실한 보수일 수 있다.  

이 때문에 나는 해고 노동자들의 의로운 투쟁에 깊은 존경심을 가진다. 그들의 항의는 몇 년 동안 지속되었고,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이 저항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 그들이 그곳에 있기에, 우리 모 두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굴뚝신문> 발행위원회

발행인 : 신학림
취 재 : 김도연(미디어오늘) 김용욱(참세상) 박철응(경향신문) 이광호(레디앙) 전종휘(한겨레) 최지용(오마이뉴스) 최하얀(프레시안) 한윤형(미디어스)
편 집 : 한겨레 정정화 주민규 김원일 박정민 이천우 김지야 나성숙 유홍상 임병학
사 진 : 노순택 박승화 변백선 이명익 정기훈 정택용 최형락
광고디자인 : 이원우 정하연

* 이들 외에도 많은 이들이 마음과 정성을 보태주었습니다. 백기완 선생과 김소연 시인이 글을 보내주셨고, 만화가와 사진작가들, 디자이너들도 재능 기부를 했습니다. 지금도 전국의 많은 이들이 '굴뚝 배달부'를 자청해 신문을 배포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노사 간 논의가 빨리 진척 돼 <굴뚝신문> 2호가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 굴뚝신문 1호 전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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