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엔 여수를 방문해 "나더러 무의식적으로 '한 쪽으로 치우쳤다'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어떤 부분이 그러냐고 물으면 답을 못하더라"며 "내용을 잘 모르면서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내가 바로 중도"라고도 했다.
이런 행보는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강경보수'로 규정하는 것이 '선입견'에 불과하다는 항변으로 들린다. 정치인도, 언론도 '이미지'가 아니라 내용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리 있는 지적이 아닐 수 없었다.
친기업주의-강경대북관 가진 중도론자?
하기야 방법론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중간층을 잡아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한나라당 내에서도 드물다. 한나라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스스로를 '중도'라고 생각하는 유권자가 36.9%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내가 바로 중도"라는 박 전 대표의 발언은 이런 기류 속에서 나왔다. 그의 발언을 두고 팬사이트 내에서도 논쟁이 없지 않았지만 이내 잦아들었다. 많은 지지자들이 "이는 중도층을 포섭할 수 있는 훌륭한 전략"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박근혜 전 대표가 중도를 표방하면서 이명박 전 시장을 '좌파'로 몰아붙일 수 있게 됐다"는 글도 눈에 들어 왔다.
하지만 이런 인위적인 포지셔닝이나 이미지가 아니라 그가 밝힌 정책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선뜻 이해하기 힘든 점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경제정책에 있어 박 전 대표는 "투자를 얽매고 있는 것은 '반기업정서'다. 일자리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 만드는 것"이라며 "소득이 없는데 무슨 복지를 할 수 있나. 기업 중심의 정책을 펴야 한다"고 했다. "반(反)기업문화를 친(親)기업문화로 바꾸자"는 주문도 곁들였다.
전 세계 보수정당의 단골메뉴인 '감세'도 전면에 내세웠다. 박 전 대표는 "(집권할 경우) 더 이상 세금 올리지 않겠다. 더 이상 새로운 세금은 없다. 세금을 낮추겠다"고 말했다.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도 그의 지론이다. 그는 작년부터 "(정부는) 시대착오적 출자총액제한제도를 갖고 몇 년 동안 우왕좌왕하고 있다"며 "출자총액 규제와 금산분리 원칙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회와 시위로 인해 1년에 12조 원의 낭비가 있다고 하는데, 이런 것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는 식의 언급에 이르러서는 도대체 그가 말하는 '중도'의 실체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북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중도'와 거리가 멀어진다.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남북경협과 대북지원의 전면 중단"을 촉구하며 한나라당의 대북 제재 강경론을 이끌었다. 자칫하면 남북 간 무력충돌을 야기할 수도 있는 대량학살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이쯤 되면 상황은 블랙코미디로 흐른다. 우리는 경제적으로는 '감세와 친기업문화', 대북문제에 있어선 '강경론' 등 전통적인 보수의 주장을 앞세우면서도 자신의 이념을 '중도'로 규정하는 이상한 정치 지도자를 목격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 전 대표는 '천륜'이라는 말까지 동원하면서 '박정희 효과'의 활용에는 적극적이면서도 법원이 바로 잡은 인혁당 사건 등 그의 과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유신의 기억'마저도 표심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 한국사회는 유신을 옹호하는 인물을 중도론자로 부르기로 한 것인가?
말이 아닌 정책적 총합이 박근혜의 노선
선입견은 깨져야 한다. 그것도 대선에 출마하고자 하는 정치인이라면 그에게 덧씌워진 선입견을 적극적으로 논파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러나 억지로 꿰어 맞춘 '중도'라는 수사로 자신의 색깔을 위장하는 것은 정도에 어긋나는 행태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억울함을 드러내는 것은 본인의 자유지만, 현재 박 전 대표의 이념과 노선을 규정하는 것은 여태껏 쌓아 온 정책적 '내용'의 총합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연출한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희극처럼, '중도론자 박근혜'도 일종의 형용모순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혹시 당 내의 '아웃사이더'로 평가받는 고진화, 원희룡 의원 등을 '좌파'로 보고 스스로를 '중도'로 규정한 것일까? 그렇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한나라당 내에만 존재하는 이념적 스펙트럼을 잣대로 '좌, 우, 중도'를 판단하는 정치 지도자를 신뢰할 수 있는 국민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중도'의 깃발을 내세우지 않는 정치인이 드문 풍토라고는 하지만 '중도'의 개념을 하루 아침에, 그것도 통째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이 차라리 '박근혜 중도론'을 겨냥해 "뭔가 착각이 있는 것 같다. 이념은 가치관이고 신념이다. 반공우파 이념 위에서 건국된 대한민국에선 '나의 이념은 중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을 순 없다"는 보수논객 조갑제의 비판이 더 솔직하게 들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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