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 NHK에서 방영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대하드라마 <료마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가 고향인 도사 번(藩)을 탈번해 교토로 올라갔다가 난생처음 지구본을 보고는 경악하며 외친다.
"요게 정말 일본이란 말인가?"
전통적인 일본의 '삼세계관'에 따르면 일본은 천축(인도), 중국과 함께 천하를 삼분하고 있는 큰 나라였다. 당시에 료마가 정말 그런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장면이 미국의 개항 압력에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던 당시 일본인의 정서를 표현해 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무렵 조선의 지식인도 비슷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지구본을 보면서 아마도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정말 중국이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인가?"
중국을 천하의 중심이자 거의 전부로 알고 있던 대다수 조선 사람들에게 중심 없이 둥글고 넓은 세계는 카오스였다. 게다가 1842년 청이 서양 오랑캐 영국에 패했다는 소식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영국에 무릎 꿇은 것이 한족의 명이 아니라 만주족의 청이었던 것은 다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조선의 지배 세력은 이미 오래전 청과 차별화를 선언하고 중화 문명의 적자를 자임하고 있었다. 그래서 청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가치를 지키기로 결심해 나라의 문을 더 단단히 닫아걸었다.
그러나 세상 소식은 들려오게 마련이었다. 세계적인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로 명성이 자자한 한국인의 유전자가 어제오늘 생겼겠는가?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조선도 서둘러 그 흐름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런 생각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려고 한 사람들을 역사는 '개화파'로 기억한다. 그와 반대로 서구 문명을 배척하고 전통의 가치를 지키려 한 사람들은 '위정척사파'로 불렸다.
'개화(開化)'는 civilization의 번역어이다. '문명화'라는 뜻이다. 이미 중화 문명의 적자로 자부하던 조선에 '문명'이 없어서 개화를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서구에서 시작된 과학 기술 중심의 문명이 바야흐로 세계를 지배할 조짐이니 그것을 빨리 배워 시류에 뒤처지지 말자는 뜻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화는 '산업화', '선진화' 등 표현을 바꿔 가며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를 앞장서 이끌어가는 화두가 되어 왔다.
개화파는 여러 부류가 있었지만 선두에 선 것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노론 집권층 출신의 똑똑하고 혈기 방장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서구 문물을 접하며 꿈을 키우다가 1876년 개항이 되자 일본의 메이지 유신 같은 근대화를 의욕적으로 추진해 '개화당'이란 별칭도 얻었다.
▲ 김옥균. |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 박영교 등 수십 명이 붙잡혀 맞아 죽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옥균은 부도(不道)한 역적으로 낙인찍힌 채 이역을 떠돌다가 10년 후 상하이에서 암살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사를 결심할 때부터 이미 각오한 시련이었으리라. 육신은 죽더라도 큰 뜻은 살아남아 욕되지 않은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혁명아'의 영광 아니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에 대한 역사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특히 그들이 걸었던 '개화' 노선은 찬양보다는 비판과 질책의 대상이 될 때가 많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민중의 적이 된 개화파, 그와는 다른 길을 간 안중근
개화파는 메이지 유신의 주도 세력을 '멘토'로 삼았지만 양자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메이지 유신은 미국의 개항 요구에 굴복한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주면서 시작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에 반대하던 세력들은 여러 측면에서 이질적이었으나,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우국지사들의 노력으로 '존왕양이'의 기치 아래 힘을 합쳐 막부를 몰아낼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마치 조선에서 개화파와 위정척사파가 힘을 합쳐 민씨 정부를 타도하고 근대화에 나선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위정척사파와 협력하기는커녕 같은 개화파의 온건한 부류조차 끌어안지 못했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한 셈이다.
개화파의 결정적인 오류는 일본에 대한 인식에 있었다. 갑신정변의 주도 세력은 청의 위협을 의식한 나머지, 개항을 강요했던 일본을 오히려 거사의 동지로 삼았다. 이것은 개항 이후 밀려든 일본인 때문에 큰 피해를 보고 있던 민중과 심하게 엇박자가 나는 일이었다. 개화당이 일본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해 일본 공사관을 불태우고 일본인을 보이는 대로 폭행했다. 이후 조선의 민중들 사이에 '개화'는 사실상 '일본'과 동의어였다.
갑신정변 실패 후 '잃어버린 10년'이 지나가고 개화파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894년의 개화파 정권은 동학농민혁명을 핑계로 조선에 들어와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의 꼭두각시로서, 동학농민군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진행한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갑신정변의 정강을 대부분 실현했지만, 그 개혁은 조선의 독립을 촉진하기보다는 일본의 침략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 민중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무너질 때 김홍집이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는 설은 개화파에 대한 민중의 누적된 분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개화파는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기겠다는 의도와는 정반대로 일본의 침략을 앞당기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제국주의 침략자의 면모를 숨김없이 드러냈을 때는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개화파 지식인들은 뼈를 깎는 반성과 성찰 없이는 역사에 지은 죄를 씻을 길이 없었다. 바로 그때 하얼빈에서 울린 총성은 개화파의 그 모든 죄를 씻어 내고 진정한 해방 투쟁이 다시 시작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안중근은 그 자신이 동학농민혁명에 맞섰던 개화파 지식인으로서 러일전쟁 전만 해도 일본을 동양 평화의 수호자로 지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쟁 후 한국을 거침없이 침략해 들어오는 일본의 모습에 배신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 주역인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릴 때와 비슷한 나이의 젊은이는 체포된 뒤에도 예수 못지않은 의연한 태도로 일본의 침략을 꾸짖은 뒤 그것을 방조했던 개화파 지식인들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하늘로 올라갔다. 뒤늦게나마 침략자의 본성을 발견하고 진정한 투쟁의 첫발을 내디딘 안중근의 숭고한 정신은 봇물처럼 터져 나온 독립운동의 함성과 함께 부활했다.
안중근의 뜻과는 달리 회개하지 못한 개화파 인사나 그 후예들은 일제의 침략에 노골적으로 협조하는 친일파로 전락했다. 해방 후에도 국민의 피폐한 삶이나 그들의 바람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외세에 의존하든 어떻든 국가를 근대화, 산업화, 선진화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역사를 오도하는 개화파의 후예들은 개화파가 왜 민중의 적이 되었는지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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