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안중근=범죄자" 규정에 분노하면 끝인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안중근=범죄자" 규정에 분노하면 끝인가

[기자의 눈] 피해야 할 국가주의의 덫, 나아가야 할 평화의 길

"그동안에도 안중근에 대해 범죄자라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밝혀왔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19일 한 말이다. 안중근이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을 기리는 표지석을 세우는 것이 불쾌하다는 뜻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발언이다(안중근 의거에 대해서는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참조).

일본의 고위 관료가 공개석상에서 "안중근=범죄자"로 규정한 건 이례적인 일이지만, 관방장관의 돌출 발언으로 보기는 어렵다. 관방장관의 발언은 표지석 건립 이야기가 나온 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보인 반응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베 신조 총리는 7월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인물"이며 "그 점은 상호 존중해야 한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안중근=범죄자" 발언 후 한국 정부는 "대단히 유감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누리꾼들 사이에서도 '범죄자는 안중근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침략자들'이라는 규탄 목소리가 쏟아졌다. 언론들도 이른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일본 관방장관 발언을 비판하는 논조다.

중국 정부도 공개적으로 한국에 힘을 실어줬다. 훙레이 외교부 대변인은 안중근이 "역사상 유명한 항일 열사이며 중국에서도 존경받고 있다"며 일본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었고, 최근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 등으로 일본과 신경전을 벌이는 중국으로선 당연한 반응이다.

한국과 중국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일본 언론에선 '한국이 중국과 연대를 강화해 일본을 압박하려 하고 있다'(NHK)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일부 우익 성향 언론은 '중국이 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립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안중근으로 표상된 과거사 문제를 놓고 '한국·중국 대 일본'이라는 대립 구도가 형성된 모양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국과 중국은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아픔뿐만 아니라 일제에 맞서 함께 싸운 경험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역사를 고려하면 '한국·중국 대 일본'이라는 구도는 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성찰 대신 우편향을 택한 아베 신조 정권을 비판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걸 전제하고 이야기하면, 그럼에도 과거사 문제가 국가 간 대결 구도로만 치닫는 건 경계할 필요가 있다. 침략의 역사를 규탄하는 정당한 목소리가 권력자들이 원하는 국가주의의 함정에 빠져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 안중근 의사. ⓒ독립기념관

안중근을 폭도로 몰아간 한국인, 안중근을 기린 일본인

그건 동양 평화를 꿈꾼 안중근의 뜻에도 맞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 안중근의 의거 후 펼쳐진 두 개의 장면을 함께 떠올렸으면 한다.

하나는 일진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한 '이토 히로부미 추도, 안중근 규탄' 움직임이다. 이들에게 안중근의 의거는 2000만 한국인이 "도쿄로 가서 일본 천황에게 죄를 고하고 용서를 받아야" 할 일이었다. 국내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는 모임을 열고 그 덕을 기리는 송덕비 건립을 추진하며, 나아가 일본에 조문·사죄단을 보내는 것이 이들이 선택한 길이었다. 그다음에 한 건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에 넘겨야 한다는 운동이었다.

역사는 이들을 친일파라 부른다. 여성들이 '위안부'로 끌려가고 숱한 이들이 일제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 등으로 내몰린 것도 이 세력과 무관하지 않다. 전쟁 범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음에도, 이들은 해방 후에도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는 동안 안중근 일가를 비롯한 독립 운동가 집안의 다수는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한국에 돌아와서도 고초를 겪어야 했다. 안중근의 사촌 동생이자 독립 운동가인 안경근이 평화 통일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5.16쿠데타 후 옥살이를 해야 했던 것처럼.

안중근을 폭도로 몰아간 일부 한국인들의 인식은 전쟁 범죄를 반성하지 않는 옛 주인, 즉 일본 극우의 역사관과 닿아 있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부 한국인들의 문제를 흘러간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제국주의, 친일, 독재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힘을 실어주는 역사 인식을 고스란히 담은 교과서, 그리고 그것을 옹호하는 일부 언론과 지식인 및 정부. 이 모두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일제의 전쟁 범죄에 협력한 이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중용한 이승만 전 대통령 같은 이들의 행위를 비호하면서 "안중근=범죄자" 규정에는 펄쩍 뛰는 건 모순이다. 과거사 정리 작업엔 경기를 일으키면서, 성찰하지 않는 일본 극우를 향해선 도끼눈을 뜨는 건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다. 인터넷에 떠돈 이야기와 달리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유관순은 깡패'로 규정하는 서술은 자신들이 옹호하는 교과서에 담기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일 처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안중근=범죄자" 발언에만 분노한다면, 국가주의의 덫에 걸릴 우려가 있다. 한국과 일본의 극우가 과거를 성찰하려는 자국 내 움직임은 '자학 사관'으로 몰아세우고, 주변국과는 대립하며 정치적 이득을 노리는 식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는 말이다. 일본 우익의 반성을 촉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성찰해야 하는 건 일본만이 아니다.

또 하나의 장면은 의거 후 뤼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과 어느 일본인 간수의 우정이다. 지바 도시치라는 이 일본군 헌병은 안중근의 사상과 인품에 감명을 받는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의 명복을 빌며 그를 기렸다. 안중근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을 비롯한 유묵들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이 사람 덕분이다.

안중근에게 감화된 일본군 헌병. 생각해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 다수의 일본인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영웅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40년 넘게 정치의 중심에서 활약하며 일본을 강국으로 만든 인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일 뿐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사형수 안중근을 평생 기린 건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지바 도시치를 시작으로 안중근을 추모하는 일본인이 하나둘 늘었다. 이들은 안중근의 의거와 동양 평화 사상의 의미를 짚는 행사 등을 열고 있다. 자국에서 영웅으로 칭송되는 인물을 사살한 안중근을 기리는 이들이 물론 일본에서 다수는 아니다. 일본 극우의 눈에 이들은 배신자로 비칠 것임도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들은 한국만이 아니라 안중근이 꿈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도 소중한 존재들이다. 자국의 역사 왜곡 움직임을 규탄하는 일본인, 일제 침략의 유산인 재일 한국인(자이니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일본인 등도 마찬가지다. 일본 안의 이런 사람들을 기억하고 이들과 굳건하게 손을 잡는 것이 국가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길이다. "안중근=범죄자" 규정에 대한 분노가 자칫 국가 간 대결 구도만 강화하는 쪽으로 이어진다면, 일본 사회 내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는 이들이 설 곳이 줄어들 우려도 있다.

국가주의 함정을 피하고 동아시아 평화로 나아가야

안중근을 폭도로 몰아간 일부 한국인과 자국의 영웅을 처단한 안중근을 기리는 일부 일본인. 이것이 말하는 건 이번 사안에 국가주의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가 간 관계의 문제를 빼놓고 역사를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매몰돼 국가 간 대결 구도로만 이해하는 건 곤란하다. 그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수의 일본인이 존경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판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강변이 힘을 받을 수도 있다.

필요한 건 국가주의가 아니라 평화의 관점이다.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중국인이건 전쟁 범죄를 획책한 세력과 그것에 부화뇌동한 이들에게 평화를 해친 죄를 엄중하게 묻는 것을 말한다. 군사적 긴장감을 높이며 국가 간 대결 구도를 강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한 관점이다. 그것을 통해 한국과 일본과 중국이 삼발이처럼 균형을 이루고 세계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 안중근이 꿈꿨던 것도 그것이다.

평화의 관점을 밀어붙여, 안중근이 말하지 않은 평화에 대해 탐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국가 간 평화를 넘어, 각 사회 내에서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의 삶을 해치는 것들에 맞설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권력을 쥐고 세상을 흔들기 위해 심심찮게 국가주의를 부추기는 탁월한 속물들에게 온몸으로 맞선 이들이 꿈꾼 세상을 여는 길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