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만 30세의 한국인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68세의 일본인 노정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와 약 5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사된 세 발의 총탄은 정확히 급소를 꿰뚫었다. 안중근은 이토의 수행원들을 향해 세 발을 더 발사한 뒤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라고 외친 뒤 러시아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토는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숨졌고 안중근은 일본 측에 넘겨져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서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찰관의 심문을 받았다. 안중근은 메모지조차 들고 있지 않았지만 막힘없이 열다섯 가지 거사 동기를 열거했다. 명성황후 살해 지휘, 을사조약 체결, 군대 해산, 의병 탄압을 빙자한 양민 학살, 한국의 정치 기타 권리 박탈, 동양 평화 유린, 한국 보호를 위장한 불리한 정책 시행…….
"한국은 무사하다고 세계를 속였다"는 것을 이토의 열다섯 번째 죄목으로 제시한 안중근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바로 일본 천황에게 알려달라고, 그렇게 해서 동양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하얼빈은 러시아와 일본의 야욕이 만나는 제국주의의 교차로였다. 일본 역사학자 나카노 야스오[中野泰雄]에 따르면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고무라 지타로[小忖壽太郞] 외상과 가쓰라 타로[桂太郞] 수상이 입안한 '한일합병' 계획을 승인하고 그 정지 작업을 위해 그곳에 왔다. 그러나 하얼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만이 아니었다. 무명의 젊은 한국인도 환영 인파 속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세계를 속이고 동양 평화를 해치는 범죄를 저질러 왔음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침착하게 총을 빼들었다.
일본 응원에서 이토 사살로…동양 평화를 갈망한 안중근의 변모
당시는 러일전쟁이 끝난 지 4년째 되는 해였다. 러일전쟁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영국과 대립하던 러시아가 힘에 부쳐 동쪽으로 전력을 돌리자, '큰형님' 영국이 동방의 '중간 보스' 일본에게 그 처리를 맡겨 일어난 청부 전쟁이었다. 그러나 당시 적잖은 아시아인에게 이 전쟁은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서구 제국주의와 이에 맞서는 동양의 작은 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대한의 개화파 청년 안중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른 개화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쳐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기를 바랐다. 일본은 개전 직후 강제로 대한제국 정부와 맺은 한일의정서 제3조에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이라고 명시해 이러한 안중근의 기대를 부추겼다. 그를 가톨릭 신자로 받아들인 빌렘 신부는 "한국은 일본이 이기면 일본의 속국이 되고, 러시아가 이기면 러시아의 속국이 될 것"이라 경고했지만, 안중근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1905년 5월 대한해협 해전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일본군에게 무참히 패배하면서 전세는 일본의 승리로 기울었다. 아시아 각국의 지도자들은 환호했다. 인도의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는 영국 유학 중에 날아갈 듯한 기분을 느꼈고, 인도인의 정신적 지도자 간디는 "일본의 승리가 사방 곳곳에 뿌리를 내려서 이제 그 열매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한다. 런던에서 이 소식을 접한 중국의 국부 쑨원도 뜨거운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배를 타고 귀국하다가 그를 일본인으로 오해한 아랍인 노동자에게서 축하를 받았다고도 한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의 총성은 이런 아시아인들에게 짧은 사자후를 던졌다. "당신들은 속았소!"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는 동양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던 일본은 사실 또 다른 제국주의였을 뿐이며, 침략과 강탈의 전선에 동과 서의 구분 따위는 없었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침략자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 중심에는 을사조약 후 한국에 설치된 통감부의 초대 수장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안중근은 배신감을 느끼고 항일 구국 투쟁의 길에 올랐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거점을 옮겨 대한의군이란 의병 부대를 창설하고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지만, 적은 수의 군대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안중근은 그를 처단하고 일본의 정체를 만천하에 알리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 안중근 의사. ⓒ독립기념관 |
그해 11월 4일 일본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지는 가운데, 안중근은 아직 이토가 절명한 것도 모르는 채 뤼순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잇단 심문에서 그는 이토를 동양 평화의 적으로 규정하고 평화란 모든 나라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고 일갈했다. 이듬해 2월 7일부터 벌어진 공판은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진군할 때 염두에 둔 최후·최대의 전장(戰場)이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판을 지켜보고, 재판정에서 자신이 폭로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실상을 정확히 깨달아 참된 평화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안중근의 기대는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은 안중근의 고발이 한국과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인 재판관, 일본인 검사, 일본인 변호사로 진용을 꾸려 재판을 진행하고, 대외적으로는 철저하게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몰고 갔다. 일본 정부는 제2, 제3의 안중근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안중근을 극형에 처하라고 뤼순의 사법 당국을 압박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자신의 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만이라도 다 쓰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당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사 5개월 만인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뤼순 감옥의 좁고 더러운 형장에서 31년의 거룩한 생애를 마쳤다.
안중근의 큰 뜻을 뤼순 감옥 뒤편 광야에 묻어 버린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의 유지를 받들어 그해 8월 29일 한국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안중근의 조국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비참한 운명을 안겨주었다. 큰아들 중생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고, 둘째 아들 준생과 딸 현생은 일제의 공작에 넘어가 지금의 서울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박문사(博文寺)를 참배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분키치에게 '부친의 죄'를 사과하는 치욕을 당했다. '박문사'는 이름 그대로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이었다. 동생 정근과 공근은 형의 뜻을 이어받아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그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평화란 모든 나라의 자주 독립이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한 안중근의 사상은 이처럼 그와 그의 일가를 풍비박산케 했다. 그러나 그의 동양평화론은 3.1운동을 비롯한 식민지 피압박 민중의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장엄하게 부활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황해도 해주 지역의 소년 접주로 반동학군의 안중근과 적으로 맞섰던 김구는 그의 넋과 화해하고 그 희생정신을 기리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안중근의 조카 안미생은 김구의 며느리가 되어 시어머니가 돌아간 후에는 임시정부의 퍼스트레이디 노릇까지 하며 성심껏 시아버지를 도왔다.
두 번째 10.26…군부 독재 무너뜨린 건 '외로운 총'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안중근의 숭고한 희생과 그 뜻을 이은 민중의 역사적인 항일 투쟁 위에 세워진 나라이다. 그런 나라의 국민을 상대로 독재를 휘두르다 못해 영구 집권을 꾀한 이승만은 정말 무모한 사람이었다. 나라의 자주 독립을 위해 외세와 싸운 국민이 어렵게 세운 나라 안에서 국민의 주권과 자유를 유린하는 독재자를 용납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을 심판하고 축출한 4.19혁명의 대의를 계승하겠다고 해 놓고 이승만과 똑같은 길을 걸어간 박정희는 더욱더 무모한 사람이었다. 그런 무모함이 1979년 또 한 번의 '10.26'을 낳았다.
그해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책임자였던 김재규는 서울 궁정동의 안가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 당시 정치, 경제,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위기를 맞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독재 시위로 막다른 길에 몰려 있었다. 김재규는 온건 대응을 주장했지만 박정희는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김재규는 임박한 유혈 참사를 막고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앞당기기 위해 거사를 도모했다고 진술했다.
같은 10월 26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김재규를 안중근과 비교할 수는 없다. 김재규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20년에서 25년을 앞당겨 놓았다는 자부심을 안고 세상을 하직한다"고 밝혔지만, 그는 이미 유신 정권의 앞잡이로 너무나 많은 때를 묻힌 인물이었다. 안중근의 10.26은 아시아인들에게 그릇된 환상을 불러일으키던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폭로했지만, 김재규의 10.26은 그의 말대로 자유민주주의를 앞당긴 것이 아니라 몇 년을 더 늦춰 놓았다. 그의 거사로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국민을 상대로 한 유혈 참극은 몇 개월 뒤 광주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김재규는 국민이 자기 손으로 해야 했고 또 할 수 있었던 일을 미리 막아 버린 꼴이 되었다.
박정희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군부 독재를 결국 역사의 유물로 만들어 버린 것은 국민의 힘이었다. 그 힘은 10.26과 같은 비극이 이제는 불필요하고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을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도처에서 두 차례 10.26의 교훈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고 독재자를 찬양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언동들이 도를 넘은 것 같다. 김재규라면 몰라도 안중근이 살아 돌아온다면 이들을 보고 어떤 결심을 할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게 안중근이 부활한다면, 그 '안중근'은 권총 한 정에 모든 것을 의지하던 외로운 의사(義士)가 아니라 이미 승리를 경험하고 역사의 주인이 되어 있는 이 나라의 모든 국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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