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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산주의자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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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산주의자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

[장석준 칼럼] 루치오 마그리를 추념함

11월 28일은 루치오 마그리(Lucio Magri)의 2주기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마그리는 이탈리아 현대 정치사와 사상사에서 꽤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2011년에 79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확히 말하면, 안락사가 합법인 스위스에서 조력 자살을 결행했다. 3년 전 먼저 사망한 아내 마라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였다.

이 소식을 처음 듣고 나는 앙드레 고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사상가였던 고르 역시 2007년에 84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한 살 적은 그의 아내 도린과의 동반 자살이었다. 도린은 얼마 전부터 불치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노부부가 함께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고르가 아내에게 부친 편지가 번역돼 나와(<D에게 보낸 편지>(임희근 옮김, 학고재 펴냄)) 그의 이름이 뒤늦게 한국 독자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황혼의 두 지성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 이유는 사랑이었다. 한데 두 인물 사이의 공통점은 단지 이런 최후의 장면만이 아니다. 고르와 마그리, 두 사람은 공히 유럽 신좌파의 핵심 사상가였다.

1968년 5월 파리 거리에 바리케이드가 등장하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천만 노동자 총파업이 벌어졌을 때 두 사람은 이 사건의 가장 진지한 해석자들이었다. 둘은 청년들을 맹동주의자로 비난한 주류 좌파에도 동감하지 않았지만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을 추구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대다수 극좌파에도 동조하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은 5월 봉기가 진정한 대변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상 투쟁으로 이어져야만 하는지 설득하려 애썼다. 그들은 이상이 승리하자면 현실로부터 얼마나 무두질을 당해야 하는지 직언을 서슴지 않는 믿음직한 동지들이었다.

▲ 루치오 마그리(1932~2011년). ⓒoggi.it

그 중에서도 마그리는 첫 이력부터 독특했다. 그는 좌파 정당이 아니라 우파인 기독교민주당(DC)의 당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젊은 시절에는 좌파였다가 나이 들수록 체제와 자신의 이해를 동일시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성숙해질수록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1958년 마그리는 마침내 이탈리아 공산당(PCI)에 입당했다. 그리고 이내 안토니오 그람시 사상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으로 당 안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쭉 갔다면 거대 정당의 당료로서 순탄한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회에 변혁이 필요한 만큼 그 변화의 주창자인 좌파에게도 혁신이 절실히 필요했다. 마그리는 감히 이러한 혁신을 부르짖는 데 앞장섰다. 당 내 좌파의 총아로 활약하던 그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이런 문제의식을 전개하는 무대로 <선언(Il Manifesto)>이라는 잡지를 냈다.

<선언>은 파리 5월 봉기를 비롯해 1968년의 전 세계적 투쟁에 주목했다. 그 중에는 '프라하의 봄'도 있었다. <선언>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시도에 연대를 표했고,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입을 규탄했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모순을 정면 비판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선언>을 발간하던 마그리와 그 동지들은 1969년 공산당에서 제명되고 만다.

15년 뒤인 1984년에야 마그리는 공산당에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그 사이의 15년은 결코 잃어버린 세월은 아니었다. <선언>은 1970년에 일간지로 전환해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좌파 신문으로 성장했다. 이 신문은 지금도 계속 발간되고 있다. <선언> 그룹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72년에 독자적인 신좌파 정당도 창당했다. 당명은 '프롤레타리아 단결의 당(PDUP)'이었다. 1970년대 말 공산당이 한창 기독교민주당과의 좌우 대연정을 추구할 때(이른바 '역사적 타협') 이 당은 이 노선에 맞서는 거점 역할을 했다.

1980년대 초에 공산당이 결국 대연정에 대한 기대를 접고 좌파 야당 노선으로 돌아오자 '프롤레타리아 단결의 당'은 공산당과 합당했다. 허나 이것으로 어지러운 분리와 통합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지자 이탈리아 공산당은 재창당을 추진하게 된다. 그 핵심은 당명 변경이었다. '공산당'을 버리고 '좌파민주당'을 채택하자는 것이었다. 마그리는 처음부터 당명 변경에 반대하고 나섰다. 동구 '공산주의' 체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탈리아에서 '공산주의'는 그람시, 반파쇼 레지스탕스 그리고 60년대 말의 대중운동과 결합된 자랑스러운 이름이자 전통이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사실 이름 문제만은 아니었다. 마그리가 비판한 것은 신자유주의 공세, 현실 사회주의 붕괴 등 좌파가 직면한 근본 문제들에 단지 외양만의 변화로 대응하려는 태도였다. 100만 명이 넘는 당원 중 3분의 1이 마그리와 같은 입장에 섰다. 그러나 결국 다수파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마그리와 그 동지들은 다시 한 번 분리를 결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명 변경 반대파는 좌파민주당(PDS)에 합류하지 않고 공산주의재건당(PRC)을 따로 창당했다. 지금까지 계속되는 이탈리아 좌파의 우경화와 끝없는 분열의 시작이었다.

공산주의재건당 안에서 마그리는 이번에는 폐쇄적인 극좌 경향의 만연에 맞서 싸워야 했다. 언론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중심으로 급부상한 신우파 세력과 대결하자면 유연한 연대 전술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공산주의재건당의 독자적 발전을 추구한다는 원칙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마그리의 문제 제기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공산당 붕괴로 지지 정당을 잃은 상당수 대중은 정치적 부유층이 되어갔다. 이것이 오늘날 포퓰리즘이 지배하는 어지러운 이탈리아 정치의 출발점이다.

1995년 마그리는 마침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정당 정치에서 은퇴했을 뿐이지 보다 넓은 의미의 정치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간 <선언>의 자매지로 이론지 <선언 평론(La Rivista del Manifesto)>을 내기 시작했다. 좌파의 이론과 노선을 총결산하고 새로운 모색을 자극하려는 시도였다.

좌파가 부활하려면 이제 협소한 정파나 정당 차원의 노력을 넘어 정치 문화 자체의 심원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만년의 마그리의 생각이었다. 그 일환으로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 역사에서 무엇이 잘못됐었는지를 꼼꼼히 따지는 마지막 저작 <울름의 재단사(Il sarto di Ulm)>(2009년)를 발표하기도 했다.

마그리의 죽음을 재촉한 게 꼭 부인에 대한 사랑뿐이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그토록 번창했던 이탈리아 좌파 정치의 추락에 대한 감회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 자신은 새 세대에 대한 기대를 결코 버리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회한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탈리아 좌파가 수십 년 동안 겪은 우여곡절을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마그리가 지나온 삶의 굽이굽이에서 다름 아닌 우리의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바야흐로 전 지구적인 '시험'의 시대다.

하지만 마그리는 어쨌든 마지막 저서의 제목을 통해 우리에게 더없이 강렬한 메시지 하나를 던지고 떠났다. '울름의 재단사'란 본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제목이다. 이 시는 하늘을 나는 기구를 발명하고 이를 실험하려다가 추락사한 16세기 독일의 한 재단사를 노래한다. 그의 죽음을 보고 울름의 주교는 말한다.

"성당의 종을 울리시오 / 그의 말은 거짓에 지나지 않았소 / 사람은 새가 아니오 / 어떤 사람도 절대로 날 수 없을 것이오."

어쩌면 마그리도, 고르도, 그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동지들도 또 다른 '울름의 재단사'들이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몇 세기 뒤 인간은 결국,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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