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3일 16시 03분
홈
오피니언
정치
경제
사회
세계
문화
Books
전국
스페셜
협동조합
미국은 왜 북한의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했나
[김기협의 냉전 이후] <30> 북한의 '숨겨진 의도'에 집착하는 미국
지금까지 10회가량 1993년의 '제1차 북핵위기'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북한이 냉전 해소의 조류를 타는 데 실패한 고비였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북한이 특이한 고립상황에 빠져든 출발점이다. 21세기 초 한반도 긴장상태의 뿌리가 거기에 있다. 긴장 해소를 위해서는 1993년 사태 안에서 긴장의 원인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이 사태의 내용을 정밀하게 다룬
김기협 역사학자
2014.05.26 10:43:37
불발로 끝난 '김영삼 독트린'…왜?
[김기협의 냉전 이후] <29> 한완상의 '햇볕' 씨앗은 왜 싹을 못 틔웠나
지난 회에 "문민정부의 햇볕정책"이란 말을 썼다. '햇볕정책' 하면 대개 김대중 대통령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실행에 앞장선 임동원을 떠올린다. 햇볕정책은 국민의정부 것이었다. 그런데 김영삼의 문민정부에도 햇볕정책이란 것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김영삼 정부의 초대 통일원장관(부총리)을 지낸 한완상의 회고록 한반도는 아프다에 "'햇볕정책'을 처음 제시하다
2014.05.22 08:23:23
청와대의 감동적 메시지 보름 만에 북한은 왜?
[김기협의 냉전 이후] <28> 출범 벽두에 뒤통수 맞은 문민정부의 '햇볕정책'
1991년 여름 이후 북한은 노선의 큰 변화를 보였다. 이 변화를 무엇보다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 1992년 4월의 헌법 개정이었다. 정통성을 중시하는 북한에서 헌법은 남한보다 훨씬 큰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1992년의 개헌은 20년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1948년 9월에 제정된 북한 헌법은 네 차례 부분 개정을 겪으며 1972년까지 시행되었다. 이것을 '
2014.05.19 05:48:48
핵무기는 어떻게 북한 안보의 필수 요소가 됐나
[김기협의 냉전 이후] <27> 1992년 북한이 놓인 상황과 미국의 강압노선
남한이 미국에게 안보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데 비해 주체적인 안보자세를 취한 북한이 더 일찍부터 핵무기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히 짐작되는 일이다. 1960년대부터 북한이 중국에게 핵무기 기술 이전을 요청했다고 하는 돈 오버도퍼의 이야기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도 충분히 있었을 법한 일로 보인다.1964년 중국이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2014.05.12 11:42:02
이스라엘 감싸는 미국, 북한엔 핵공격 위협
[김기협의 냉전 이후] <26> 핵확산금지조약, 북한에게만 가혹했다
1993년 '북핵위기'의 빌미가 된 핵확산금지조약(NPT,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살펴보겠다.1968년 작성되어 1970년 3월 발효에 들어간 NPT는 이름 그대로 핵무기의 확산 금지에 목적을 둔 조약이다. 이 조약의 효력은 애초 25년간으로 규정되었다가 1995년
2014.05.08 06:56:36
팀스피릿 훈련은 남북대화의 독약이다
[김기협의 냉전 이후] <25> 팀스피릿 훈련에 진저리 치는 북한
남북 간의 화해 전망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은 2000년과 2007년의 정상회담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가장 긴밀한 접촉이 이뤄진 것은 1990년 9월에서 1992년 9월 사이에 3박4일씩 여덟 차례 열린 고위급회담이었다. 남북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대규모 대표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2년간 회담을 이어간 것은 남북 간의 화해와 관계 발전을 위한
2014.05.05 07:37:58
미친 건 MAD가 아니라 MD다
[김기협의 냉전 이후] <24> 미국 군사주의자들이 필요로 했던 '불량국가' 북한
시어도어 포스톨(Theodore Postol)이란 사람이 있다. 1946년생으로 MIT에서 원자력공학 학위를 받은 후 연구소, 의회, 국방성을 거쳐 1980년대 말부터 스탠포드대학 등 학계에서 군사기술 관련 연구에 종사해 온 사람이다. 1992년 걸프전에서 패트리어트미사일 적중률에 대한 정부와 업계의 선전이 거짓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나선 후 미국 미사일방어
2014.04.28 08:17:25
북한의 핵무기 개발, 미국이 바란 것이었을까?
[김기협의 냉전 이후] <23> 제1차 북핵위기와 IAEA, 그리고 미국
핵무기와 관련된 중요한 정보는 어느 나라에서나 최고급 기밀로 취급한다. 20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1993년 시점 북한 핵무기 사업의 정확한 실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그러나 그동안 밝혀진 사실도 적지 않고, 이를 근거로 대략의 실상은 파악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세계평화에 대한 중대하고 긴박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대화를 거부
2014.04.21 07:53:59
'1차 북핵 위기에 미국 책임 크다'…미국 전문가들은 왜?
[김기협의 냉전 이후] <22> 북핵 문제와 미국 입장의 문제점 (2)
1992년 1월 22일 뉴욕의 유엔 미국대표부로 북한의 김용순 로동당 국제비서가 찾아가 캔터 국무부 차관을 만난 뉴욕회담은 당시 진행되고 있던 한반도 해빙의 흐름 속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그런데 이 회담에서 보인 미국의 경직된 태도가 이후 북핵문제의 난항을 예고하는 것이었다."서울 불바다" 발언에까지 이르게 될 북핵 문제의 난항에 물론 북한의 책임이 크다.
2014.04.14 09:19:45
미국의 북한 왕따, 치졸하고 악랄했다
[김기협의 냉전 이후] <21> 북핵 문제와 미국 입장의 문제점 (1)
미-소 냉전 해소로 종래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국가들 사이에 교차 승인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 흐름 속에서 남한도 거의 모든 '적성국'과 수교하게 되었는데, 그중 중요한 상대가 물론 소련과 중국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이 흐름을 제대로 타지 못했다. 미국 및 일본과 수교에 실패한 것이 결정적 좌절이었다.중국과 소련에게는 남한과의 수교가 새로운 세계정세 앞에
2014.04.07 10: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