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와 관련된 중요한 정보는 어느 나라에서나 최고급 기밀로 취급한다. 20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1993년 시점 북한 핵무기 사업의 정확한 실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밝혀진 사실도 적지 않고, 이를 근거로 대략의 실상은 파악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세계평화에 대한 중대하고 긴박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대화를 거부하는 극한적 제재 정책으로 나간 것이 현명하지 못하거나 또는 악의적인 과잉반응이었다는 사실 정도는 분명히 밝혀져 왔다.
북한은 1950년 이래 미국의 핵공격 위협을 계속해서 받아 왔다. 1980년대까지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월하다는 평가가 미국과 남한에서 지배적이었고, 남한의 열세를 메우기 위해 미국 핵무기의 존재가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남한에는 1957년 이래 다량의 미국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던 반면 북한에는 소련 핵무기가 배치된 적이 없었다.
한반도 내에서 핵무기의 불균형 상태가 수십 년간 계속되었지만, 소련 붕괴 때까지는 미-소간의 핵균형 덕분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소련이 무너지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소련의 수십 분의 1에 불과한 중국 핵능력으론 미국과의 핵균형이 불가능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재래식 군사력에 있어서 남한의 열세 주장도 설득력이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 핵무기의 남한 배치는 누가 봐도 평화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래서 1991년 하반기에 남한 배치 핵무기를 철수하고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독자적 핵능력 확보 의지를 1970년대부터 드러냈다. 그러나 남한의 핵능력 확보를 누구보다 미국이 꺼렸고, 북한의 핵능력 확보를 누구보다 소련이 싫어했다. 종주국으로서의 통제력 상실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남한의 핵발전 기술을 제공하면서 핵무기 개발을 틀어막은 것처럼 소련은 1985년 북한의 핵발전 확장을 포함하는 경제기술협력협정을 맺으면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을 요구했다.
1991년까지 소련은 북한에 핵발전 기술과 핵우산을 제공하면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가로막았다. 설령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그 기간에 추진했다 하더라도 소련의 눈을 피하면서 해야 했다. 그리고 두 나라의 가깝고 깊은 관계를 감안하면 소련의 눈을 피해 북한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남한이 미국의 눈을 피하면서 핵무기 개발을 할 수 없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1991년 후반 소련 해체가 진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소련은 더 이상 북한에 핵우산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었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감시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으로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이 물려받은 소련 핵무기의 통제가 중대한 과제가 되었다. 소련 핵무기를 물려받은 여러 나라의 핵무기에 대한 집착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전 세계에 배치했던 미국 핵무기를 철수할 필요가 있었고, 남한 배치 핵무기 철수는 그 일환이었다. 핵전쟁 수행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팀스피릿 훈련의 1992년 중단도 이 맥락에서 필요한 일이었다.
1991년 하반기 중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한반도 비핵화선언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해빙 현상의 배경에는 미국이 구 소련 핵무기의 통제를 위해 호전적 태도를 삼가야 했던 조건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나 소련 해체에 따른 제반 문제가 정리되고 나자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위세를 뽐내는 데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다. 1992년 10월 이후 미국이 팀스피릿 재개 방침을 비롯해 북한에 고압적 태도를 취하게 된 데는 1년 사이의 입장 변화가 작용한 것이었다.
'플루토늄 90g 추출' 북한의 IAEA 보고서가 불러일으킨 파장
북한은 이런 상황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북한은 1948년 건국 당시부터 정통성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해방 때 조선 인민이 갖고 있던 민족 독립과 민주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염원을 제대로 실현하는 건국의 길을 걸었다고 자부했으며, 같은 길을 걷지 못한 남한을 '해방'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해방전쟁'을 일으켰던 것이고, 전쟁 후에도 '하나의 조선'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하나의 조선' 주장을 보류한 유엔 동시 가입은 분단 후 남한에 대해 가장 유연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건국 이래 최대의 동맹국이었던 소련의 몰락을 현실로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에는 핵우산을 비롯한 소련의 보호자 노릇을 대신해줄 역량이 없었다.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제시하는 조건에 따라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응하는 길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 길을 거부할 경우 군사적 안전이 보장되지 않음은 물론, 경제의 어려움도 '고난의 행군'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은 1991년 10월 김일성의 중국 방문 이후 이 길을 따라 움직였다. 유엔 가입에 이어 남북대화를 통해 기본합의서를 도출했다. 그해 연말 남북 핵협정이 체결되던 상황을 돈 오버도퍼는 이렇게 서술했다.
김일성의 지시 때문이었는지 북측 대표단은 평소와는 다르게 순순히 타협에 응했다. 남한측 대표단은 협상 결과에 매우 만족했지만 훗날 남한의 일부 관리들은 당시 북한을 너무 심하게 몰아붙였던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었다. 12월 가조인된 후 2개월이 지나 핵협정을 발표시키는 조인식을 마치고 평양에서 개성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북한의 김영철 소장은 남한의 박용옥 소장에게 협정 문안의 90%가 남한측 주장에 따라 작성된 것인 만큼 "이것은 당신네 협정이지 우리 협정이 아니다"라고 불평했다. 그 순간 박용옥은 북한이 협상 과정에서 양보한 사항들을 과연 실제로 이행할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남한 대표의 불안감과는 달리 김일성은 그믐날 조인된 남북 핵협정을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기쁨에 젖어있는지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헬리콥터를 판문점에 보내 협상 대표단을 개선장군 모시듯 평양으로 데려왔다. (<두 개의 한국> 394-395쪽)
북한으로서는 40여 년간 미국 군사력, 특히 핵무기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소련 해체가 진행되고 있던 시점에서 남한 배치 핵무기의 철수는 오랜 공포로부터 벗어날 희망을 보여주었다. 남한 쪽이 보기에도 무리한 조건을 북한 대표들이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김일성이 기뻐한 것은 핵무기의 위협에서 벗어난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이 희망을 꺼트릴 짓을 할 생각이 이 시점에서 북한 측에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북한은 1992년 5월초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최초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가 정직하지 못한 것이라는 의혹을 미국이 제기함으로써 한반도 상공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5개월 후 팀스피릿 재개 방침이 나오면서 사태가 마구 악화되기 시작했다. 북한의 IAEA 보고서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가?
문제의 초점은 최초보고서 중 플루토늄 90그램을 추출해 놓았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은 보고서 제출 직후 방문한 IAEA 시찰단에게 이 90그램을 내놓았다. 미국에 모든 정보를 의존하던 IAEA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이 90그램의 추출방법과 경위를 완벽하게 파악하려고 했다. 그리고 실험실에서 추출했다고 하는 북한 측 설명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90g의 플루토늄은 핵무기 1기를 제조하기 위한 4-7kg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플루토늄 생산에 성공했다면 어느 정도 생산됐는지 과학적 확인이 어렵기 때문에 은닉 가능성이 대두됐다.
시험실에서 소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IAEA 전문가들은 북한이 생산과정 점검을 위해 실험공장을 만들지 않고 엄청난 건설비가 드는 거대한 공장부터 세우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은 파일럿 플랜트의 존재를 계속해서 부인했고 의혹은 점점 커져갔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401-402쪽)
북한이 제출한 플루토늄의 정밀분석 결과 1989년, 1990년, 1991년 세 차례에 걸쳐 추출작업이 행해진 사실을 확인했는데도 북한측은 1990년 한 차례 추출한 것이라는 주장을 계속했기 때문에 불신의 근거가 되었다. 이 점에서 북한은 사실의 일부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왜 그랬을까?
미국은 왜 북한의 국제질서 진입 노력을 돕지 않았을까
북한은 미국이 요구하는 개방의 길로 나설 결정을 내리기는 했으나 반세기 가까이 적대적으로 대해 오던 미국의 '선의'를 무조건 믿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92년 1월 뉴욕회담에서도 미국이 북한을 냉랭하게 대한 사실을 앞 회에서 설명했다. 모든 요구에 응할 자세를 성의껏 보여줬는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냉랭하게 대한다면 미국의 진정성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긴박하게 진행 중인 소련 해체에 대응하기 위해 점잖은 시늉을 하는 게 저 정도라면, 그런 시늉을 할 필요가 없어진 뒤에는 어떤 태도로 나올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북한은 IAEA가 요구하는 공개를 하고 사찰을 받아들이되 종래 IAEA 활동의 관행에 비추어 최소한의 공개만을 할 방침을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나라들이 받아들이는 기준에 따라 공개할 것을 공개하면서 그 기준 밖의 활동내용을 비밀로 남겨두는 것을 최소한의 주권 수호를 위해 필요한 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IAEA의 사찰 기준이 바로 이 시점에서 바뀌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소련의 견제가 사라진 이제 미국은 IAEA를 자기네 산하기관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라크의 핵무기 개발 작업을 IAEA가 파악하지 못한 사실이 걸프전 때 밝혀지면서 권위가 실추된 IAEA는 완전히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평양은 아마도 이러한 핵사찰의 성격을 걸프전 이전 IAEA에서 근무했으며 92년 북한 원자력부 안전 연락사무소 소장으로 부임했던 한 인사의 제한된 경험으로만 판단했을 것이다. 하이노넨은 걸프전 이후 과학 기술의 괄목할 만한 발전과 미세한 방사성 물질 시료에서 정확한 분석 결과를 이끌어 낸 쾌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그들은 핵사찰 기술이 이처럼 놀라운 발전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핵 사찰팀의 책임자였던 빌리 타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IAEA의 분석 능력을 터무니없이 과소평가했다. (…) 우리가 동위원소 분석까지 실시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은 우리가 그 사실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모순되는 사항을 하나하나 지적했을 때 미처 그럴듯한 설명을 준비하지 못한 듯 보였다. 발견된 사실을 하나씩 알려줄 때에도 북한은 사전에 숙지한 획일적인 대답만 되풀이했다. 몰래 옳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더라도 우리에게는 그것을 명백하게 밝혀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해 보다 강경한 태도를 보여야만 했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403-404쪽)
이 서술에는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걸프전 이후 기술의 괄목한 만한 발전"이라 하는데, 한두 해 사이에 무슨 대단한 기술 발전이 있었겠는가. 걸프전 이후 바뀐 것은 기술이 아니라 IAEA의 정책이다. 동위원소 분석이 새로 개발된 기술이겠는가. 소련의 견제가 있던 시절에는 미국이 IAEA를 냉대했기 때문에 동위원소 분석을 할 예산이 없었을 것이다. 이제 IAEA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자 미국이 예산도 제공하고 정보도 제공하면서 사찰을 엄격하게 하도록 몰아붙인 것이다. 걸프전 이전의 관행과 전혀 다른 엄격한 사찰 기준에 첫 번째로 걸려든 것이 바로 북한이었다.
북한은 힘들더라도 IAEA 사찰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팀스피릿 재개 방침이 나왔다.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미국과 남한이 거꾸로 가고 있으니 어쩌란 말인가. 팀스피릿을 재개할 경우 자기네도 더 이상 협력할 수 없다고 북한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고했다. 그리고 팀스피릿이 재개되자 NPT 탈퇴를 선언했다.
1993년 NPT 탈퇴 당시에 북한의 핵기술이 핵무기 제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밝혀져 왔다. 북한의 국제질서 진입 노력을 그 시점에서 미국이 도와줬다면 북한이 핵무기 개발 시도를 포기할 가능성이 컸으리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미국은 도와주지 않았고, 그 결과 북한은 참혹한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어내며 핵무기를 만들어냈다. 미국은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예측했기 때문에 그런 정책을 폈던 것일까? 다음 회에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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