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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붕괴' 믿었던 YS정부, 경수로 비용 부담 이유는?
[김기협의 냉전 이후] <50> 1994년 북미회담 지연이 남한 탓? 내막은 '돈 때문'
1994년 8월 12일 제3차 북미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합의 내용은 1년 전 제2차 회담에서 제시된 방향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미국은 경수로를 제공하고 북한은 핵 활동을 줄이고 공개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이 빤한 내용을 확인하는 데 왜 1년 넘는 시간이 걸렸을까? 북한이 남한 및 IAEA와의 관계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바람에 제3차 회담을 열지
김기협 역사학자
2014.09.25 18:25:05
1차 북핵위기에서 북한은 합리적이었다
[김기협의 냉전 이후] <49> 1차 북핵위기와 북한의 전략
김일성의 사망 소식에 접한 미국 정부는 꽤 명쾌한 반응을 보였다. 조의를 담은 아주 짧은 대통령 성명을 내고 제네바에 가 있던 북미회담 대표단이 북한대표부를 조문차 방문하게 했다. 전 세계의 북한 외교공관에 분향소가 설치되었지만 제네바 외의 다른 곳에서는 미국 외교관이 방문하지 않도록 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것이다. 한 미국 관리는 그 의미를 이렇
2014.09.18 13:18:19
김정일은 광인(狂人)도 초인(超人)도 아니었다
[김기협의 냉전 이후] <48> 김일성 죽으면 북한 붕괴? 수구세력의 착각
김정일(1942-2011)은 1970년대 초 김일성 '1인 체제'의 후계자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공식적 제2인자의 위치에 나서고 1990년경부터 통치권을 분담하고 있다가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후 2011년 12월 자신의 사망까지 최고권력자 자리를 지켰다.1인 체제란 1인의 안위에 체제의 안위가 걸려있는 체제다. 김일성 1인 체제는 195
2014.09.11 11:29:54
김일성의 죽음과 김영삼의 갈팡질팡
[김기협의 냉전 이후] <47> 끝내 실패한 YS의 남북정상회담의 꿈
1993년 7월의 제2차 북미회담 이후 제3차 회담이 기약 없이 늦어지는 가운데 분위기가 회담 재개를 어렵게 만드는 쪽으로 계속 흘러갔다. 10월 4일 IAEA총회에서 북한의 사찰 수용 거부를 '우려'하는 결의를 채택했고, 11월 1일 유엔총회에서 IAEA의 노력을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연말에 이르러(12월 29일) 북-미간 뉴욕 접촉에서 협력 방침이
2014.09.04 11:00:44
북한 붕괴론의 '확인 사살'이 아직도 필요한가?
[김기협의 냉전 이후] <46> 북한 붕괴론의 붕괴, 수구세력의 집착
1927년생의 셀리그 해리슨은 워싱턴포스트 도쿄지국장으로 있던 1972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인터뷰하면서 북한 사정에 가장 정통한 서방 언론인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그 후 언론계를 떠나 국제관계 연구에 나서면서 최고급 북한 전문가가 되었다. 1994년 6월 사망 한 달 전의 김일성과의 세 시간에 걸친 면담으로 그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미국
2014.08.29 14:45:15
미국의 '종북주의자' 셀리그 해리슨
[김기협의 냉전 이후] <45>카터 방북에 대한 두 가지 시각
셀리그 해리슨(1927~ )은 미국의 가장 뛰어난 한반도 전문가의 한 사람이다. 워싱턴포스트 도쿄 지국장으로 있던 1972년 미국 언론인으로는 처음 북한을 방문한 이래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변화를 살펴왔다.1994년 6월 카터-김일성의 만남에 관해서는 해리슨의 설명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만남의 바로 며칠 전에 해리슨이 김일성을 만나 비슷한
2014.08.29 10:10:15
'북핵 위기' 전환점 '카터 방북', 클린턴과의 교감은?
[김기협의 냉전 이후] <44> 카터와 클린턴의 '짜고 치기'?
2012년 9월 8일부로 카터(1924~ ) 전 미국 대통령이 한 가지 기록을 깨뜨린 것이 있다. 퇴임 미국 대통령으로서 31년 7개월 16일을 채움으로써 1964년 10월 20일 사망한 허버트 후버(1874~1964)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긴 퇴임 기간의 내용이 충실하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닮았다. 재임 중 인기가 폭락했다가 퇴임 후 되살아난 카터를
2014.08.14 11:06:15
북한의 선군정치, '호전성'으로 이해한다면…
[김기협의 냉전 이후] <43> 北 선제공격론자들, 1994년 경험에서 배우라
남한과 미국의 대 북한 강경파가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의 근거로 '호전성'을 내세워 왔다. 1950년의 남침을 비롯해 그런 주장의 근거를 북한이 만들어준 것도 많이 있다. 그러나 7.4 공동성명(1972) 이후로는 호전성의 수준이 크게 달라졌다. 그 후의 북한 도발은 아웅산 사건, 민항기 폭파 등 1회성 사건으로 나타나, 그 이전의 무장공비 파견처럼 지속적인
2014.08.11 14:49:59
'전쟁 불사' 외친 北, 미국이 '쳐부수지' 못한 까닭?
[김기협의 냉전 이후] <42> 북한은 이라크처럼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독재정치가 정책 결정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개발에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1990년대에 한국과 함께 "아시아의 용"으로 꼽힌 타이완, 말레이시아 등 신흥산업국(NICs)의 1960~1990년간 경제발전 실적은 한국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독재와 경제통제가 심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호황기의 성장률이 한국만큼 높지 않더라도 197
2014.08.05 15:17:09
"'엉클 샘'에 착 달라붙어 있는" 남한 수구세력
[김기협의 냉전 이후] <41> YS정부의 '북한붕괴론', 관중석에 비껴 앉은 남북관계
김영삼 정권 대북정책의 배경으로 많이 거론된 것이 '북한 붕괴론'이다.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북한에 관한 정책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남북대화에는 치명적인 주장이었다. 상대가 곧 쓰러질 것이라는 가정 하에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있는가? 또 그런 속셈을 감추지 않으면서 북한을 대하는데, 북한 쪽이 신뢰를 갖고 대화에 임할 수 있겠
2014.07.28 10:5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