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7일 13시 20분
홈
오피니언
정치
경제
사회
세계
문화
Books
전국
스페셜
협동조합
북한은 왜 NPT 탈퇴를 선언했나
[김기협의 냉전 이후] <20> 팀스피릿 훈련 재개는 NPT 탈퇴선언의 충분조건
1985년 12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한 것은 소련으로부터 경수로 핵발전소를 제공받는 데 따른 조건이었다. 당시 북한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NPT 실행기구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입 후 절차 진행을 IAEA 측에서 서두르지 않은 것에 비추어 확실해 보인다.당시 북한 지도부들이 NPT 서명으로 인
김기협 역사학자
2014.03.31 10:37:13
미국은 왜 핵무기에 집착하는가
[김기협의 냉전 이후] <19> 미-소 대결 종식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핵무기
1830년대에 출간된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의 전쟁론은 지금까지도 전쟁에 관한 뛰어난 저술로 중시되고 있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延長)"이란 말은 나처럼 그 책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그런데 클라우제비츠의 동년배 중 전쟁에 관한 글로 오랫동안 더 큰 명성을 누린 사람이 하나 있다. 앙투안-앙리 조
2014.03.24 10:28:33
우향우 일본, 미국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김기협의 냉전 이후] <18> 냉전 후유증에 시달리는 일본
1990년 10월에서 1992년 10월까지 8차에 걸친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는 동안 북한은 또 하나 일련의 중요한 회담에 임하고 있었다. 1991년 1월에서 1992년 11월 사이에 열린 일본과의 수교회담이었다. 북한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에 해방 후 가장 가까이 간 접촉이다.건국과정에서 북한은 남한과 달리 친일파 처단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일본에 적대적 태
2014.03.20 10:44:41
사라진 미국 핵무기, 남북 협상에 꽃을 피우다
[김기협의 냉전 이후] <17> 소련 쿠데타가 도와준 '남북기본합의서'
1990년을 전후한 세계정세 변화에 맞춰 한반도 냉전을 종식하려는 노력의 가장 큰 성과가 1991년 12월 13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채택된 '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였다. 그 직전의 남북한 유엔 가입, 그 직후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어울려 당시의 남북관계는 화해와 평화의 길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다.기본합의서의 내용은 지금
2014.03.17 10:41:28
정상회담에 매달리는 남한, 튕기는 북한
[김기협의 냉전 이후] <16> "노태우 정권, 정상회담 위해 고위급회담 지연전술"
공산권 붕괴에 따라 '전 방위 수교' 시대가 열렸다. 서로 승인하지 않고 지내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국가들이 서로 수교하는 새로운 환경에 남한은 바로 적응해 나갔다. 1990년 9월 소련 수교에 이어 1992년 8월 중국 수교에 이름으로써 남한은 몇몇 특수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북한도 1991년 가을 유엔 가입을 계기로 외교
2014.03.13 10:33:20
박정희는 남북대화를 발전시킬 뜻이 없었다
[김기협의 냉전 이후] <12> 박정희의 남북대화 회피에서 노태우의 포용정책까지
냉전 후 미국 대외정책의 기조는 '봉쇄'(containment)정책에서 '개입'(engagement)정책으로 옮겨졌다. 봉쇄정책은 접촉과 교류를 줄임으로써 상대방을 괴롭히려는 목적으로 군사적 논리를 주축으로 하는 것인 반면, 개입정책은 접촉과 교류를 늘림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는 목적으로 외교적 논리에 기울어진 것이다. 그리고 봉쇄정책은 이쪽에
2014.02.27 07:54:49
북한은 왜 '남조선혁명론'에서 한발 물러섰나
[김기협의 냉전 이후] <11> 위기 앞에서 방향을 바꾼 북한의 연방제 통일론
지난 회에 황장엽 회고록을 들여다본 것은 공산권 붕괴를 향한 세계정세 변화가 진행되고 있던 1980년대 상황에 북한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 시기에 조선로동당 국제 비서 등 요직을 맡고 있던 인물의 증언이라면 당시 북한 지도부의 상황 인식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그 회고록에서 얻은 것은 많지 않았다. 정직한 증
2014.02.24 11:00:47
북한은 왜 아웅산·KAL기 사건을 일으켰을까
[김기협의 냉전 이후] <9> 고립의 위험 짙어지던 1980년대의 북한
남북한은 오랫동안 상대방을 '괴뢰'라 불렀다. 국민의 주권을 대표하는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라 종주국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란 말이다. 1972년 7.4공동선언을 계기로 최소한의 권위를 상대방에게 인정하는 단계가 시작되었지만,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괴뢰'관은 그 후에도 양측 지도부의 마음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남한을 괴뢰로 본다면 그 종주
2014.02.17 10:14:28
"친미 일변도" 비판한 박철언은 '자주파'였나?
[김기협의 냉전 이후] <8>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과 박철언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에는 두 개의 측면이 있었다. 하나의 측면은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확대였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이 이 측면에 유리한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뒤이어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에 따라 노태우의 임기 말까지 대한민국은 거의 모든 국가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게 된다. 이 측면은 큰 성공이었다.또 하나의 측면은 북한과의 관계였다. 이 측면
2014.01.27 11:18:03
전두환은 왜 ‘만년필 모양 무기 준비’ 특명 내렸나
[김기협의 냉전 이후] <7> 전두환 정권의 1985년 남북 정상회담 추진 ‘작전’
1988년 7월의 7.7선언을 나는 ‘북방정책’의 출발점으로 본다. 사실 공산권과의 교류 확대나 남북대화의 발전을 위한 한국 정부의 움직임은 그 몇 해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굳이 7.7선언에 출발점으로서 의미를 두는 것은 북한을 대화상대로 인정하는 남한 정부의 자세가 이를 계기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앞 회에서 말했다. 그 전에는 북한을
2014.01.23 07:0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