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3일 22시 58분
홈
오피니언
정치
경제
사회
세계
문화
Books
전국
스페셜
협동조합
전범 재판이 없던 유일한 나라, 조선
[해방일기] 1946년 5월 5일
서울재판소 제4호 법정에서 박흥식 등의 선고 공판이 열렸다. 2월 26일 기소 당시 알려진 혐의는 8·15 이후 일반 시민에게 배급할 포목, 잡화를 화신상회에서 부정 매매하여 400만 원의 폭리를 취득한 포고령 위반죄와 조선비행기회사 청산 정리 자금으로 일본육군성에서 받
김기협 역사학자
2011.05.05 11:58:00
소련은 한반도 위성 국가를 원했나?
[해방일기] 1946년 5월 3일
미소공위 제7호 공동 성명이 5월 1일 발표되었다. 4월 18일의 5호 성명에 이어 구체적 진행을 보여준 7호 성명에는 협의 대상에게 보낼 시문서(試問書) 내용이 담겨 있었다. '협의'의 출발점이었다.
2011.05.03 09:53:00
'반탁'만 내세운 그들, 과연 애국자였나?
[해방일기] 1946년 5월 2일
4월 18일 미소공위의 제5호 공동 성명이 나오자 좌익과 중도파는 즉각 이에 호응, 협의 대상 신청을 했다. 반면 우익에서는 모스크바 3상 회의 지지 선언서에 서명한다는 신청 요건을 놓고 혼선을 겪었다. 양대 영수 중 김구는 선언서 서명에 반탁 운동 포기의 뜻이 내포되어
2011.05.02 07:57:00
윤봉길과 김구가 테러리스트라고?
[해방일기] 1946년 4월 29일
일본의 한국 병탄에는 여러 수단이 동원되었지만 가장 기본적인 수단은 무력이었다. 한국이 병탄당한 가장 큰 이유도 무력에 대항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었다. 메이지 시대에 일본이 도입한 근대적 무기와 군대 조직 방법은 청나라를 유린하고 러시아를 격퇴할 수준에 올라
2011.04.29 08:01:00
"쓸 만한 지식인은 다 북으로, 북으로!"
[해방일기] 1946년 4월 28일
1922년 총독부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조선미술전람회(선전)는 해방 전 해까지 23회 개최를 통해 조선의 근대 예술 도입과 성장에 큰 작용을 했다. 1948년 만들어져 1981년까지 30회 개최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는 선전의 뒤를 잇는 관전(官展)으로서
2011.04.28 10:12:00
암초를 향해 흘러가는 미소공위
[해방일기] 1946년 4월 26일
미소공위 제5호 공동 성명 앞에서 우익 진영이 보인 혼란스러운 반응을 지난 주(4월 19일) 일기에서 설명했다. 어제 얘기한 것처럼 미국 대표단에는 3상 회의 결정을 파기하고 미소공위를 좌초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미군정과 밀착 관계를 가진 우익 인사들은 그런 기맥
2011.04.26 09:35:00
한국의 분단을 바랐던 미국
[해방일기] 1946년 4월 25일
미소공위는 3월 20일 출범한 직후 공동 성명 제1호를 낸 후 대략 1주일에 한 차례씩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특별한 내용이 없더라도 진행 상황을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것이 공동 성명이었다. 협의 대상 신청 방법을 명시한 4월 18일의 제5호 성명이 가장 획기적인 내용을 담
2011.04.25 08:03:00
좌우 합작보다 우익 연합이 더 급한 이유
[해방일기] 1946년 4월 22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미소공위가 며칠 전 제5호 공동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3월 20일 개막 후 근 한 달 동안 몇 차례 성명이 나왔지만, 회의 진행에 관한 형식적 내용뿐이었는데, 드디어 알맹이를 담은 성명이 나온 것이 좀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반가운 일입니다. 조선인 협의 대상 신청 방법
2011.04.22 09:43:00
정치 지형을 바꿔 놓은 이승만의 '남선순행'
[해방일기] 1946년 4월 21일
경무부장 조병옥이 38선 이남의 8도 경찰부와 61개 경찰서를 30일간에 걸쳐 순시하고 돌아와 4월 6일 군정청출입기자단 회견에서 소감을 발표했다. 7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 소감의 흥미로운 부분 일부를 소개한다. "이번 순시의 소감을 개괄적으로 언명한다면 조
2011.04.21 08:07:00
미소공위 앞에서 혼란에 빠진 우익
[해방일기] 1946년 4월 19일
미소공위의 주체는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군과 소련군이었다. 한국인의 장래를 결정하는 회담에 한국인이 주체로 참여하지 못한 것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기구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2011.04.19 07:5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