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4월 19일
미소공위의 주체는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군과 소련군이었다. 한국인의 장래를 결정하는 회담에 한국인이 주체로 참여하지 못한 것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기구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미소공위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임시 과도 정부 수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아직 임시 과도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단계에서는 '협의 대상'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인의 정당과 단체들을 회담에 참여시키기로 했다.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옵서버' 자격의 참여일 것이다.
협의 대상을 어떻게 정하느냐 하는 것이 회담 초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회담이 시작된 후 근 한 달이 지난 4월 18일에야 그 기준이 공동 성명 제5호로 나왔다.
미소공동위원회 서울 회담 제4주인 4월 8일부터 제5주 17일까지의 경과와 결정 사항에 관하여 18일 제5호 공동 성명이 다음과 같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공동위원회 사업 순서 제1조 즉 각 민주주의 정당 급 사회단체들과의 협의할 조건에 대한 결정을 지은 것으로 협의하는 순서는 세목이 완성되는 대로 근일 중 발표될 것이다.
그런데 제5호 공동 성명에 발표된 결의문을 보면 미소공동위원회에서 과도 정권으로서의 조선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원조 대책을 강구하고자 구체안을 작성함에 있어서 협의의 대상을 삼는 조선 민주주의 정당 급 사회단체는 진실로 민주주의적이며 이번 결의문에 포함된 선언서를 시인하여야 한다는 조건이 제출되었다.
(선언서 내용 : "우리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의문 중 조선에 관한 제1절에 진술한 바와 같이 그 결의의 목적을 지지하기로 선언함. 즉 조선의 독립 국가로서의 재건설, 조선이 민주주의 원칙으로 발전함에 대한 조건의 설치와 조선에서 일본이 오랫동안 통치함으로 생긴 손해 막대한 결과를 속히 청산할 것. 다음으로 우리는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 조직에 관한 삼상 회의 결의문 제2절 실현에 대한 공동위원회의 결의를 고수하기로 함. 다음으로 우리는 공동위원회가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와 같이 삼상 회의 결의문 제3절에 표시한 방책에 관한 제안을 작성함에 협력하기로 함.")
즉 선언서에는 막부 삼상 회의 결의문 중 조선에 관한 제1절의 목적을 지지하고 제2절의 협의에 대한 공동위원회의 결의를 고수하며 제3절 정치적 경제적 진보에 대한 원조(신탁) 방책에 관한 제안을 작성함에 협력한다는 데 서명을 해야 하는 것인데 이로 본다면 상대가 될 제 정당과 사회단체는 막부 삼상 회의 결정 중 조선에 관한 문제를 전면적으로 수락해야 하는 바로 앞으로의 제 정당과 사회단체 등의 동향은 매우 주목되고 있다.
(<조선일보> 1946년 4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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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합의가 나오기까지 적지 않은 곡절이 있었다. 문제는 미군정과 남한 반탁 세력 사이의 모순된 관계에 있었다. 미군정은 신탁 통치를 추진하는 본국 정책에 반해 점령 지역 우익 세력의 반탁 분위기를 키워주었다.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가 본국 방침을 밝혔을 때 아놀드 군정장관과 하지 사령관이 목소리를 합쳐 빈센트의 개인 의견일 뿐, 미국의 방침이 아니라고 우기기까지 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이 나올 무렵에는 미국이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데 소련이 우겨서 그런 결정이 나왔다고 하는 '오보'를 맥아더 사령부와 미군정 당국자들이 유도한 흔적이 짙다. 이 오보가 '반소'를 겨냥하는 반탁 운동의 쓰나미를 몰고 왔다. 그러나 3상 회의의 엄연한 결정을 미군정이 회피할 수 없으니 하지와 아놀드는 미소공위에 임해야 했다. 소련과의 타협이 싫더라도 이제 막후의 언론 플레이로는 안 되고, 정면으로 붙을 수밖에 없었다.
무책임하게 불 질러 놓은 반탁 운동이 이제 미국 측에 부담으로 돌아왔다. 3상 회의 결정 자체를 거부하는 세력은 협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소련 측은 주장했다. 미국 측이 협의 대상으로 내놓고 싶던 민주의원이 바로 반탁 운동의 소굴이었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공산당과 민전을 비롯한 좌익은 바로 제5호 공동 성명을 지지하며 요구받은 선언서에 서명해서 미소공위에 제출했다. 그러나 우익의 반응은 혼란스러웠다. 민주의원 의장 대리 김규식과 한민당의 김병로는 즉각 지지 의사를 밝혔지만 뒤이어 민주의원 공보부장 함상훈이 이들의 발언은 개인 의견이며 민주의원의 방침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 金炳魯 담
"헌장 내용은 아직 무어라고 구명해 말할 수 없으나 어떻든 민주주의적인 공화국 기구로서의 완전함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제3항 문제에 대해서 원조냐 신탁이냐 하는 해석은 미 당국과 소 당국의 말이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원래 남의 원조를 받는 것도 어느 정도를 초과하면 신탁에 가까운 경우도 있을 것이고 신탁이라 말할지라도 그 내용 여하에 있어서는 원조에 불과하는 경우도 있을 것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3000만 민중은 국제 헌장에 의거한 신탁 통치에 대하여는 이것을 절대로 거부한다는 뜻을 표명한 것으로 朝鮮 독립 정부가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어느 정도의 원조를 받겠느냐 하는 점은 앞으로 수립될 임시 정부와 미소공동위원회가 같이 합의적 결정을 함이 아니면 누구든지 그 구체적 내용을 운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민주주의적 제정당 단체는 앞으로 수립될 임시 정부와 함께 공동위원회와 협의하여 어느 정도의 원조를 받을 수 있을 방책을 제안하는 데에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4월 20일자)
◊ 金奎植 담
민주의원 대리의장 金奎植은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공동 성명에 대하여 18일 하오 1시 45분 서울 중앙방송국 마이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방송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제5호 공동 성명을 보고 민주의원 대리의장으로서 민주의원을 대표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 문제에 대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각 정당과 사회단체와 협의키로 결정하였다는 발표는 매우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치하하여 마지않는다. 민주 임시 정부의 헌법과 정강을 결정하는 데 미소공동위원과 우리 한인이 참가하여서 서로 논의 결정키로 되었고 또 지난번에 신탁 통치를 반대하느니 지지하느니 등의 문제를 막론하고 아무 차별 취급이 없이 우리는 미소공동위원과 합작 협력하여 민주 통일 정권 수립의 기회를 획득하게 된 데 대하여 환영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 咸尙勳 담
민주의원에서는 20일 상오 9시 반부터 창덕궁 인정전에서 정례회의를 열고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공동 성명을 약 3시간에 긍하여 재검토하는 동시에 지난 18일에 민주의원 대리의장의 자격으로 한 金奎植의 방송을 중심으로 하여 토의하였는데 동원 공보부장 咸尙勳 담에 의하면 의원 간에 완전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즉 (1) 제5호 공동 성명은 결국 탁치를 전제로 한 것이라는 의견과 (2) 미소공동위원회와 합작하여 임시 정부를 수립한 후에 국제 헌장에 의한 신탁 통치를 배제할 수 있는 단계를 규정할 것이라는 의견의 차이로 관측된다.
동원에서는 정치적 중대성에 비추어 임시회의를 열고 계속 토의할 예정으로 늦어도 수일 내에 이에 대한 정식 태도를 표명하리라고 한다. 그리고 咸尙勳은 우익 각 당에서 지금까지 신문 지상에 발표한 것은 개인담이고 공식 결의 표명은 아닌 것으로 비상국민회의에 참가한 제 정당 단체는 민주의원의 결정에 쫓아 동일 보조를 취할 것이라 하였고 또 민주의원은 정부조직의 주체가 되는 것이므로 미소공동위원회의 초청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일반의 주목을 끌고 있다.
(<서울신문> 1946년 04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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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의원 의원 중 김구 일파는 3상 회의 결의와 미소공위를 거부하는 입장이었고, 김규식을 위시한 중도파는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며 그 밖의 사람들은 이승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승만이 16일 이후 지방 순회로 서울에 없었기 때문에 민주의원의 결정이 늦어졌다. 21일 이승만의 가장 가까운 동지이며 하지 사령관의 정치고문인 굿펠로가 유성으로 이승만을 찾아갔고, 이승만은 22일 김천 강연에서, 그리고 23일 대구의 기자 회견에서 제5호 공동 성명에 찬성하는 뜻을 표했다.
(문)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공동 코뮈니케가 발표되었는데 박사의 견해여하?
(답) 지방 시찰 도중 유성 온천에서 내용을 들었는데 첫째 반탁과 찬탁을 막론하고 회의에 참가해야 할 것이며 다음으로는 미소공동위원회의 남북을 통일한 각 정당과의 협의가 일치되어야 할 것이고 끝으로 신탁 통치 문제에 있어서는 임시 정부 수립 후에 해결한다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했으니만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보며 어쨌든 우리가 회의에 참가해야만 제반문제를 상의하고 토의하여 의견을 진언하게 될 것이 아닌가.
(문) 정무다단한 시기에 돌연 남조선 각지 심방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답) 과거 3개월간 신병으로 신음했는데 아직 몸이 완전치 못함으로 기온이 좋은 지방을 찾아온 것뿐이다. 다른 의미는 없다.
(문) 남북 통일에 대한 의견 여하?
(答) 우리는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통일 전선에 사력을 다하겠다.
(<조선일보> 1946년 4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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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정도 메시지로도 민주의원의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우익 세력이 제5호 공동 성명을 수용하게 하기 위해 하지도 나서야 했다. 하지는 22일에 미소공위 참여를 권유하는 성명서를 냈으나 27일 더 직설적인 특별 성명을 발표했다. 미소공위 참여가 반탁 포기가 아님을 보증해준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수석대표 아놀드 장군은 공동 성명서를 제5호에 표시된 선언서 서명에 관하여 나와 좌기 점에 견해가 동일함.
(1) 그 선언서에 서명하는 정당과 사회단체에게 신탁의 찬성 혹은 반대하는 의견 발표의 특전을 보장함.
(2) 미소공동위원과 협의하기 위하여 선언서를 서명한다고 해서 그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신탁을 찬성한다든가 혹은 신탁 지지에 언질을 준다는 표시는 무함. 단 그 선언서를 서명치 않는 이는 공동위원의 협의의 상대가 되지 아니함.
(<동아일보>, <서울신문> 1946년 4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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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는 4월 8일에서 12일까지 맥아더 사령부에 다녀왔다. 그의 출발에 관한 기사나 16일 맥아더 사령부 방문을 앞둔 러치 군정장관의 발언을 보면 하지와 러치의 도쿄 행을 놓고 미소공위 대책 협의를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많이 떠돌았던 모양이다. 행정 문제 협의를 위한 방문이라고 열심히 해명하는 것을 보면 그 추측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기사 중 하지의 도쿄 행이 착임 이래 처음이라 한 것을 보면 전 해 10월 중순 이승만을 만나러 간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 주둔 미군 최고 사령부 존 R. 하지 중장은 부관 W. T. 스미스 중위를 대동하고 8일 아침 공로로 東京으로 출발하였다. 동 중장은 東京에 2~3일 체류해서 연합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 장군과 조선 행정 문제에 관해서 회담하리라는 바 동 중장의 東京 행은 객년 9월 착임 이래 처음 있는 일이고 또 근간의 미묘한 정계 동향과 아울러서 어떠한 중대 용무를 띈 것이나 아닌가 추측되어 극히 주목된다. 미24군사령부에서는 동 중장의 東京 행에 관해서 8일 아침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조선 주둔 미군 최고 사령관 존 알 하지 중장은 금조 東京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동 중장은 금주 수요일 혹은 목요일에 귀임할 예정이다."
(<서울신문> 1946년 4월 9일자)
군정장관 러취 소장은 불일간 자기 자신도 東京에 갔다 올 예정이라고 16일 다음같이 언명하였다.
"지난번에 하지 중장이 東京에서 연합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 원수와 회담한 것은 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고 조선의 일반 행정 급 명령 계통에 관해서 토의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군 인사 문제도 있었던 것으로 동 중장은 이번 귀임 시에 신임 참모장대리 벨 대좌를 대동하고 왔다. 나도 군정관 보충과 연결 관계로 불일간 東京으로 갈 예정이다. 그런데 방금 군정장관대리 쉬츠 대장이 입원 중이므로 출발을 못하고 있던 바, 동 대장이 퇴원하는 대로 곧 출발하겠다."
(<서울신문> 1946년 4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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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의원도 비로소 김규식 의장대리의 발언을 추인하는 취지의 발표를 냈으나 공식 성명이 아니라 기자 회견 형식을 취했다. 이승만의 귀경을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고궁에서 한담"만 하는 것이 민주의원이라는 세간의 비웃음을 입증하는 태도였다. 4월 30일 이승만의 편지를 받고야 5월 1일 민주의원의 공식 입장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민주의원이 이승만과 김구 두 '영수'의 지명으로 구성된 기구라는 사실을 감출 수가 없다.
민주의원에서는 27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의 정례 회의를 열고 제5호 성명과 제반 문제를 신중히 토의하였는데 동원 의장 李承晩의 귀경이 지연되어 방금 동원 의원 白南薰, 비서국장 尹致暎 양씨가 부산으로 李承晩 초청 차 출장 중이므로 공식적 발표는 李承晩의 입경 후로 미루고 12시 동원 의원 元世勳, 金俊淵, 공보부장 咸尙勳 3씨 연석 하에 기자단과 회견하고 제5호 성명에 대한 민주의원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민족과 국가대계에 중대한 관계를 가진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성명에 대하여 본원의 태도를 가지고 다대한 관심을 가진 사회제현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성명에 대한 본원의 태도는 제5호 성명 발표 당시에 본원 부의장 金奎植의 방송과 본원 의장 李承晩이 대구에서의 언명한 바에 의하여 대체로 결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민족과 국가에 중대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신중에 신중을 가하여 온갖 각도로 이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모든 점을 보고 본원 내에 의견의 대립이 있다고 보는 것은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때마침 27일 하지 중장의 성명으로 서명 운운에 대한 의운(疑雲)은 일소될 줄로 믿는다. 불일래로 李承晩이 입경할 것이고 따라서 본원으로서의 태도는 李承晩 귀경 후 공식으로 발표하겠다."
(<조선일보> 1946년 4월 28일자)
남조선 지방 순회 중인 李承晩으로부터 민주의원 의원 白南薰 편에 30일 민주의원에 친함이 전달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그 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성명에 대하여 일반 동포가 의려치 말기를 진심으로 바라나니 나의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하지 중장의 4월 26일에 발포한 선언에 밝히어 설명한 바 하지 중장은 절대로 우리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친우임으로 우리를 낙망시키지 않을 줄 내가 확신하며 우리 동포들이 나와 같이 믿으라고 권고하기를 주저치 않는다.
2) 우리가 서명하는 것은 신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신탁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토의에 협동한다는 뜻을 표함이니 그 토의에 참여치 않으면 그 문제가 원만히 타결되기를 바라기 어려울 것이며 설령 우리가 참가하고도 잘 타협이 못되면 그때에 우리가 다른 보조를 취하기에 늦지 않을 것이다.
3) 지금 내가 알기에는 임시 정부를 먼저 수립하고 기후 임시 정부에서 공동위원과 협의하여 조처하기로 된 것이니 임정 수립만 충분히 된다면 더 문제될 것이 없는 줄로 안다.
4) 다만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할 것은 莫斯科 선언에 신탁이라는 것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우리를 도와준다는 의미로 한 것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받겠다고 서명할 수는 없나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이런 문구에 혹 우리 내정에 간섭하려는 이가 있을까 하는 후려를 막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것도 지금에 문제될 것은 아니고 이후 임정이 공동위원과 토의할 때에 우리가 서명하지 않으면 누가 억지로 시킬 것은 없을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5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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