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국 병탄에는 여러 수단이 동원되었지만 가장 기본적인 수단은 무력이었다. 한국이 병탄당한 가장 큰 이유도 무력에 대항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었다. 메이지 시대에 일본이 도입한 근대적 무기와 군대 조직 방법은 청나라를 유린하고 러시아를 격퇴할 수준에 올라 있었다. 무력에 있어서는 조선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을사오적이니 뭐니 하면서 '매국노' 몇몇을 씹는 데 흥이 나지 않는다. 그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마침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니까 팔아먹게 된 것이지, 앞서 관직을 팔아먹던 선배들보다 특출한 범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관직이나 팔아먹으면서 국력을 형편없게 만든 결과가 바로 나라를 팔아먹게 된 상황 아니었는가. '관습 헌법'이란 희한한 포장으로 헌법을 팔아먹은 헌법재판소 판사들도 똑같은 유형의 범죄자다. 사회가 맡겨놓은 것을 제 것처럼 팔아먹는 '횡령죄'다.
무력을 앞세운 침략에는 무력으로 맞서야 한다. 감당이 안 되는 상대라는 사실은 당시에도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달걀로 바위 치는 심정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항쟁에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항쟁이 당장 승리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저항의 정신은 살려놓은 것이다.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정신이 살아남는다면 당장의 상황은 어쩌지 못하더라도 보다 낳은 상황을 장차 이끌어낼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제 몸과 자기 가족의 당장의 안위만을 생각하지 않고 민족 사회의 장래와 후손의 떳떳함을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식민지 시대 무력 항쟁의 가장 큰 상징의 하나가 윤봉길(1908~1932년)의 의거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의 천장절(天長節, 일왕의 생일) 잔치판에 폭탄을 투척해 시라카와(白川義則) 파견군 사령관 등 일본 요인들을 살상한 의거의 기념식이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14년 전 4월 29일 오전 11시 반 경 마침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된 일본천장절 배하식장에 포탄을 던져 왜적사령관 白川 대장 외 문무고관 등 여러 명을 무찌르고 대의 조선의 혼을 만방에 선양한 우리의 영웅 尹奉吉 의사의 의거 기념 대회는 29일 오후 1시부터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어 수만 명의 좌우 양익 내외 명사가 모인 가운데 엄숙히 열렸다.
회장에는 의사의 진영(眞影)을 모신 제단을 중심으로 각 정당 단체 대표·유가족·기타 내빈 다수와 각 남녀 학교·일반 단체 약 수만 명이 정렬한 가운데 金九의 식사·윤 의사 약력 보고에 뒤이어 嚴恒燮으로부터 "윤 의사는 당시 애국단장 김구 선생의 지도 아래 일황을 저격한 李奉昌 의사 다음의 실행자이다"라고 통쾌한 거의 상황을 자세히 말하여, 회장에 참석한 여러 사람의 가슴에 새로운 감격과 뜨거운 애국의 피를 끓게 하였다.
洪震, 러취 장관 대리, 뉴맨 공보부장, 중화민국 교민 대표 鄭元幹 외, 趙素昻, 공산당 대표 洪南杓, 한민당 대표 金性洙, 인민당 대표 申敬哲, 신민당 대표 白南雲, 재미한족연합회 대표 韓始大 등의 여러 내빈의 간곡하고 정중한 축사가 있은 후 김구로부터 유가족에게 위문품을 증정하고 유가족 대표 윤 의사의 외아들인 琮의 감격에 넘치는 답사가 있은 다음 金奎植의 선창으로 소리도 우렁차게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부르고 동 5시 경 대회를 끝마쳤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9년 4월 29일,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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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식은 좌우익 인사들이 모처럼 함께 어울린 모습을 보인 자리이기도 했다. 비상정치회의 추진 노력이 좌익을 배제한 비상국민회의로 방향을 돌리고 좌익 중심의 연합 전선으로 민전이 추진되기 시작한 1월 20일경 이래 좌우익이 하나의 명분 아래 이렇게 모인 일이 없었다. 3·1절 기념식조차 따로 열려 사람들의 한탄을 자아냈다. 이튿날 <조선일보>에는 "피는 하나다"란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1) 민족을 위하여 한 목숨을 바치고 나라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친 의인과 열사를 추앙함은 사람의 예의요 민족의 의무라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이오 또한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한갓 예의요 자못 의무라 하면 여기서 우리가 무슨 감격을 받을 바 있으며 무슨 충동을 느낄 바 있으리오. 한 걸음 나아가 보다 더 날카로운 무엇을 찾아내는 데서 비로소 어떠한 의미가 있지 아니할 것인가.
2) 우리는 어제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의 육군대장 白川 이하 문무대관을 쳐 무찌른 尹奉吉 의사의 기념식전에서 비로소 우리의 구하던 바 무엇을 얻었고 찾던 바 그것을 발견하였다. 보라 그 식전에는 이 사건의 장본인인 金九 씨가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외국인의 내빈은 의례히 있을 것이어니와 이른바 우파니 좌파니 할 것 없이 각 당 각 파의 지도자가 모두 나와서 정성과 열정이 넘치는 축사를 바치었으니 이 얼마나 감격할 일인가. 얼핏 생각하여 보면 의례히 그러할 일이요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나 해방된 이래 우리 사회에서 이번과 같이 좌우 각 파가 한 마당에 모여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이러한 행사를 하여본 일이 있었던가. 우리는 이 광경을 볼 때에 알지 못하는 중에 뜨거운 눈물이 옷깃을 적심을 금할 수 없었다.
3) 왜 무슨 눈물인가. 윤 의사의 장거를 추앙하는 눈물인가. 그렇다. 그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이때까지 전예를 보기 어렵던 좌우 양파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을 볼 때에는 의사가 장하다는 생각이 일층 더하는 동시에 '피는 하나다!'하는 감격이 우리를 울리고 만 것이다.
이제 독립을 바라보며 허덕이는 삼천만 우리 민족은 무엇을 바라는가. 오직 '독립'을 바랄 뿐이요 이 독립을 바라는 '피는 하나다!' 이같이 뚜렷한 사실 흐리려하여도 흐릴 수 없는 사실을 똑바로 인식하자. 나라도 하나, 민족도 하나, 독립도 하나, 피도 하나, 이 길이야말로 조선을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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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봉길 아닌 윤봉길. 거사 직후 일본 신문에 통용된 이 사진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관계자들 중에 이 사진에 집착하는 이들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선열들의 행적을 너무 관념적으로만 받아들이는 풍조가 그들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김구에게 '테러리스트'란 딱지가 붙어 다닌 이유가 윤봉길 등의 거사를 지휘한 실적에 있었다. 그를 적대한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란 이유로 깎아내렸고, 지금까지도 이승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 시각을 많이 들이대고 있다. 김구의 민족주의 정신을 흠모하며 그의 좌절과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하는 사람들도 이 측면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생각을 가진 경우가 많다.
나 자신 <해방일기> 작업을 시작할 때까지 김구를 흠모하는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다가 작업에 들어서면서는 막연한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비판할 점은 냉철하게 비판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실제로 해방 공간 속의 그의 모습에서 성실성을 의심케 하는 면모를 발견하고, 그의 좌절에는 자업자득의 측면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앞으로 그의 허점과 약점을 밝히는 일에는 각별히 공을 들이려 한다. '신화'를 깨뜨리는 의미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러리즘을 무조건 죄악시하는 관념론에는 반대한다. 송진우의 암살(1945년 12월 30일)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런 관념론에 많이 좌우되는 것 같다. 나는 이 일에 확실한 판단을 못 하겠고, 김구의 결백을 주장할 근거도 없다. 다만 '테러리스트'라는 관념 위에서 그의 책임을 상상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당한 침략에 대한 저항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의 막강한 무력 앞에서 그 희생에 상응하는 효과를 바라볼 수 없었지만 최선을 다하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최대한 효과적인 투쟁 방법을 그들은 모색했고, 테러리즘도 선택의 범위 안에 있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의 도덕성은 객관적 잣대로 재단하기 힘든 것이다.
테러리스트 중에는 미국 영화에 많이 보이는 것처럼 폭력의 쾌감에 도취된 자들도 있다. 그러나 안중근과 윤봉길 같은 '의사'들의 행적에는 생명을 아끼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적 자세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들의 행위가 온갖 모색 끝에 부득이한 선택이었고 무고한 인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테러리즘'의 범주에 넣는 것을 반대하고, 굳이 넣더라도 범죄적 행위로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김구는 윤봉길 등의 거사를 지원하고 지휘하는 데 자기 목숨을 걸지는 않았다. 그래서 김구가 자기 야심을 위해 테러리즘을 이용한 것이라는 비난도 있다. 그러나 거사에 나선 젊은이들과 김구 사이의 일체감을 중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구가 윤봉길을 홍구공원으로 보내며 자기 살 잘려나가는 아픔을 느끼지 않을 때 윤봉길이 그의 지휘에 흔연히 따를 수 있었을까? 1945년 4월 29일 장준하 일행이 OSS훈련을 위해 중경을 떠날 때의 장면을 펼쳐본다.
김구 주석의 작별사로 이날 아침은 더욱 비장한 아침이 되었다. 김구 주석은 검정색 중국 두루마기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오늘 4월 29일은 내가 13년 전에 윤봉길 군을 죽을 자리에 보냈던 바로 그날이오. 또 지금이 그때 그 시각이오. 여러분도 다 알 것이오.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왜의 시라카와 대장을 죽였던 그날의 의사 윤봉길 군이 내 허름한 시계를 갖고 대신 내게 자기 것을 준 그 시계가 바로 이 시계요. '이 시계가 선생님 시계보다는 훨씬 새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 이 시계를 선생님이 가지시고 선생님의 시계를 저에게 주십시오.' 하고 시계를 바꿔 넣고 떠나던 윤 군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오. 바로 그날과 같은 날짜 같은 시각에 윤 의사와 똑같은 임무를 띤 여러분을 또 떠나보내고 있소. 심중이 괴롭기 짝이 없소.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반드시 하늘이 정한 뜻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소."
윤봉길이 상해에서 의거 직전에 김구와 시계를 바꿔 가진 일화는 너무 유명하여 모를 수가 없었지만 그 날짜와 시각이 우연히도 자기들의 출발 일시와 똑같다는 주석의 말에 모두 깜짝 놀라는 얼굴들이 되었다. 주석의 그 작별 인사는 일행을 오래도록 깊은 감명에 빠져들게 하였다.
(박경수,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 170~171쪽)
윤봉길은 몸을 죽여 뜻을 살릴 생각으로 죽을 자리를 찾고 있던 사람이었다. 김구가 그 자리를 찾아준 것인데, 살리고자 하는 뜻을 두 사람이 공유한 것이기 때문에 윤봉길은 김구의 안내와 지휘를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였는지 한번 살펴보겠다.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 침략을 시작해 1932년 3월 만주국을 세웠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국제연맹의 항의에 몰리자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이었다.
중국에서 '9·18 사변'이라 부르는 만주사변은 이시하라(石原莞爾) 중령을 위시한 관동군 소장파 장교들이 일본의 만주 침략을 촉발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고 고위층에서는 이것을 추인했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반론도 있다. 사실은 훨씬 고위층에서부터 계획된 작전이었지만 우발성을 강조하고 책임 범위를 좁히기 위해 소장파의 책임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1931~32년은 일본의 정상적 정치가 중단되고 군부가 침략 정책에 앞장서고 나선 시기였다.
일본 군부는 만주 점령이 순조롭게 완성되던 시점에서 중국 본토 침략까지 획책했다.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중국에서는 '1·28 사변')도 만주사변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이 조작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3월 초순까지 진행된 전투에 10만 이상의 일본군이 투입되어 중국의 19로군과 장개석의 최정예부대인 제5군을 격퇴했다. 전투 중에 국민당 정부는 남경으로부터 낙양으로 옮기기까지 했고, 3월 5일 상해휴전협정(淞滬停戰協定) 체결로 중국은 상해에 군대를 주둔하지 못하게 되었다.
윤봉길의 거사 때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분노와 국민당 정부의 무능에 대한 치욕감에 중국인들이 휩싸여 있을 때였다. 그 한가운데서 일본인들이 벌이고 있던 첫 잔치판이 홍구공원의 천장절 행사였다. 윤봉길은 이 잔치판에 폭탄을 던져 파견군(이라 쓰고 '침략군'이라 읽는다.) 사령관을 죽인 것이다. 그 후의 조선 독립 운동에 국민당 정부를 비롯한 중국인의 이해와 도움을 얻는 데는 윤봉길의 거사가 결정적인 효과를 일으켰다.
그로부터 13년 후 김구의 회고를 듣는 광복군 대원들의 마음속에 김구가 윤봉길을 이용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김구의 일부가 윤봉길과 함께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후 다시 66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광복대원들과 다른 눈으로 김구를 바라볼 이유를 알지 못한다.
어제 작성해 놓은 초고를 블로그에서 본 독자 한 분이 관련된 내용을 댓글로 제시해 주었습니다. 제 손으로 근거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해방 공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 윤봉길 의거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이라면 오늘 일기에 붙여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우선 붙여놓습니다. 1932년 7월에 박헌영은 '상해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그는 여기서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개인적인 테러와 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못 박았습니다. 즉, 박헌영은 "개인적인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해가 되며 그들에게 비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투쟁의 환상을 심어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만다"라고 보았으며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에 의한 폭력" 행위라며 비난한거죠. 한편, 이승만은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 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난하여 평가절하했습니다. 이승만은 철저한 외교론주의자였기 때문에 '정치인 테러'같은 것에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었기 때문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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