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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만한 지식인은 다 북으로, 북으로!"

[해방일기] 1946년 4월 28일

1946년 4월 28일

1922년 총독부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조선미술전람회(선전)는 해방 전 해까지 23회 개최를 통해 조선의 근대 예술 도입과 성장에 큰 작용을 했다. 1948년 만들어져 1981년까지 30회 개최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는 선전의 뒤를 잇는 관전(官展)으로서 유신 체제 종료와 함께 문제점이 제기된 끝에 대한민국미술대전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국전 개최 논의는 미군정 하에서 시작되었다.

예술가를 국가적으로 보호하며 예술앙양의 길을 열어주고자 문교부에서는 매년 계속하여 정기적으로 국가에서 주최하는 미술전람회를 열려고 방금 준비 중에 있다. 이는 유구한 조선의 전통 문화와 현대 문화를 조화시켜 새조선 문화 건립에 이바지 하려는 군정당국의 문화앙양책에 발맞추어 국가의 힘으로써 현대 미술 문화의 진흥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이에 문교부에서는 특별한 예산을 계상하여 사계의 권위들로써 국전(조선미술전람회 약칭) 준비위원회 결정에 분망 중인데 제1회는 오는 9월 중순 경복궁 안에서 열 터이다. 그리고 이 전람회에는 동양화·서양화·공예 조각의 각 부 제작품을 종합 전람하려는 것으로, 이왕 총독부 시대의 문화 기만 정책에 의한 명목만의 전람회와는 그 성격부터 다른 점에서 힘차게 일어선 예술 조선에 새로운 화제와 긴장을 던지고 있다.

(<동아일보> 1946년 4월 28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 기사를 보며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문명 발생 이래 인간의 중요한 활동 분야의 하나였던 예술의 목적성을 둘러싼 논쟁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미(美)를 추구하는 본능이 뒷받침하는 행위라는, 목적성을 부정하는 측면과 함께 강한 소구력(訴求力)이 일으키는 실용적 효과가 무시될 수 없다는 측면이 예술 활동에 겹쳐지기 때문이다.

근대 사회에서 예술의 목적성 문제가 정치 측면에서 강하게 부각된 것은 계급 문제가 정치 논쟁의 초점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민중 예술과 귀족 예술이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의 갈등은 산발적인 개인적 문제로 나타날 뿐이었다. 근대에 들어와 귀족 예술이 상업화되어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하나의 축을 이루었고, 이를 "예술을 위한 예술"로 비판하면서 예술가의 주체성과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22년 출범한 선전은 일본 제국미술원전(제전)의 축소판으로 기획된 관전이었다. 관전의 예술계 지배는 국가주의의 득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치적 표현 수단으로서의 기능은 근대 예술 발전의 한 중요한 측면인데, 국가 권력은 예술 활동을 '순수한 예술성'에 최대한 묶어놓음으로써 예술을 통한 도전을 회피하려 한 것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예술의 목적성에 대한 고민은 문학 평론 분야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순수 문학을 지향하는 조선 문단이 1924년에 결성되었고 실천 문학을 지향하는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가 그 이듬해에 결성되었다. 카프는 앞서 결성되어 있던 두 단체 염군사와 파스큘라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공동 목표 아래 통합한 것이었다.

예술의 정치적 기능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카프에 동조했고 그 정치 성향을 대략 '좌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좌익'의 의미는 매우 넓은 것이었다. 목표로 세운 '사회주의 혁명'도 극단적 계급 혁명만을 뜻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카프 내에서도 '내용-형식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김기진 등 예술의 형식 측면을 중시한 사람들은 '순수한 예술성'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내용, 즉 정치적 목적만을 강조하는 '공식주의'에 불만을 표한 것이다.

홍명희는 카프의 정식 멤버가 아니었다. (그 아들 홍기문은 멤버였다.) 그러나 카프 멤버들이 홍명희를 지도자로 여긴 사실은 카프 기관지 <문예운동> 창간호와 제2호에 그의 글이 연속 실린 데서 알아볼 수 있다. 특히 창간호 맨 앞에 실린 그의 평론 "신흥 문예의 운동"은 창간사의 위상을 가진 것이었다.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194~199쪽) 이 글의 한 대목을 재인용한다.

세계를 들어서 새로운 계급의 발흥은 바야흐로 대홍수를 일으키게 되었으니 금일의 시대사조는 사회 변혁, 계급 타파, 대항, 해방 등의 사상이니, 이 시대의 문예가 이것을 중심 사상으로 하고서 새로이 출발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회 변혁, 계급 타파의 사상은 한입으로 말하면 경제사상의 발현이니 이것을 중심 사상으로 한 문예가 맑스-엥겔스로부터 계통받은 사회주의 경제사상을 다분히 가질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것은 구계급보다도 신흥계급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라 함이 가하겠다.

좋다! 그러면 이른바 신흥 문학은 유산 계급 문학에 대항한 문학일 것이며, 생활을 떠난 문예에 대항한 신흥 계급의 사회 변혁의 문학일 것이다. 그러면 프롤레타리아 문예는 즉 신흥 문예의 별명이 아닌가.

근대 초기에 일어선 개인주의 문학이 한 때 '신흥 문예'로 일컬어지다가 유산 계급 문학으로 문단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이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새로운 '신흥 문예'로서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금일의 문학은 생활을 배반한 지 오래"라며 주류 문단의 '예술을 위한 예술' 경향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옹호하고 카프 멤버들에게 존대받으면서도 홍명희가 카프에 정식으로 참여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카프의 지나친 좌경화 추세를 꺼린 것 같다. 1927년과 1930년 두 차례의 '방향 전환'이 카프에 있었는데, 제1차 전환은 '내용-형식 논쟁'에서 형식을 강조하던 김기진이 물러선 것이고 제2차 전환은 임화, 김남천 등 소장파의 '예술 운동의 볼셰비키화' 운동에 따른 조직 개편이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극복한다 해서 예술 자신을 전혀 위하지 않는, '정치만을 위한 예술'에 일로매진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술의 정치성을 놓고도 중도파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 아래 양심적 예술인들, 의식 있는 예술인들은 좌익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넘어서기 위해 좌익이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좌익 조직 활동은 편향적 좌경화를 일으켰고,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조직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억압 체제가 양극화 추세를 일으키는 현상이었다.

해방 후에도 현실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예술인들은 '좌익' 단체를 통해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1946년 2월 8일에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결성되어 민전 결성에도 참여한 조선문학가동맹을 통상 좌익 단체로 인식하는데, 좁은 의미의 '좌익'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사회 혁명'을 주장한 사람들을 모두 좌익으로 본다면 실제로 중도파 모두와 상당 범위의 우익이 그 범주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사회 혁명의 가장 중심 과제인 토지 개혁은 모든 양심적 지식인들이 동의하는 과제였다.

1950년 9·28 '수복'을 앞둔 시점 아버지 일기에 영화배우인 친구(예명 독은기)를 북쪽으로 떠나보내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리하여 자꾸만 없어지는 문화인과 기술자들. 몇 십 년을 길러야 하는 이들을 하루아침에 다 떠나보내고 앞으로 대한민국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려는 것인지?

글줄이나 쓰고 그림폭이나 그리던 사람들, 심지어 음악가-영화인에 이르기까지 쓸 만한 사람이 많이 북으로 가버렸다. 학계로 말하여도 신진발랄한 사람들이 많이 가고 우리같이 무기력한 축들이 지천으로 남아 있다. 간 그들이 모두 다 볼셰비끼였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던 사람들 또는 양심적인 이상주의자들이 죄다 가버렸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깊이 반성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 나는 오늘 저녁 한 사람의 양심적인 예술가를 또 북으로 떠나보냄에 있어 그가 이 몇 해 동안 병고와 생활난과 고문의 위협에 허덕이었음을 생각하고 이 땅의 문화 정책이 너무 빈약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 1950년 9월 26일자)


분단 건국이 행해지고 내전이 일어난 뒤의 상황이다.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이 상황은 해방 직후부터 빚어지기 시작해서 1946년 봄에도 벌써 많은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던 것이다. 토지 개혁을 비롯해 상당한 범위의 사회 혁명이 해방 조선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 이승만과 김구를 무조건 '영수'로 받들기를 내켜하지 않은 사람들이 민전을 비롯한 '좌익' 제 단체가 아니고는 뜻을 제대로 펼 수 없는 상황이 굳어져 가고 있었다. 조선문학가동맹을 비롯한 이 단체들을 간단히 '좌익'으로만 인식하는 데는 큰 허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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