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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대학교가 도대체 뭐기에…
[해방일기] 1946년 9월 14일
강준만이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인물과사상사 펴냄) 279~281쪽에서 '교육 출세론'을 해방 공간의 중요한 현상의 하나로 꼽은 것은 적절한 지적이다. 사실 교육 출세론은 과거제가 국가 체제의 주축이던 왕조 시대부터 조선 사회에 깔려 있던 것이
김기협 역사학자
2011.09.14 11:40:00
사람들이 안철수·박원순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는?
[해방일기] 1946년 9월 12일
지난 주 '프레시안 books'에서 남부디리파드의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에 대한 오창은의 서평을 보았다. 한 때 간디 추종자였다가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한 저자가 간디 노선을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에 입각한 것으로 비판한 책이라 한다. 그 책을 읽지
2011.09.12 11:35:00
박헌영과 美 사령관의 비밀 거래?
[해방일기] 1946년 9월 9일
9월 6일의 세 신문 정간 및 이튿날의 공산당 간부 체포령은 군정청 법령 위반 문제가 아니라 맥아더 포고령 관계라고 했다. 그래서 군정청과 경찰은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이지, 판단과 결정의 주체가 아니었다. 이런 방침은 8월 21일 러치 군정장관
2011.09.09 08:21:00
美 사령관의 일갈 "공산당, 넌 아웃이야!"
[해방일기] 1946년 9월 7일
<자유신문>도 <동아일보>도 1946년 9월 1일자 제1면의 절반 이상을 하지 사령관의 담화문 "조선 민중에게 보내는 말"로 채웠다. <동아일보> 기사에는 "하지 중장이 발표한 지금까지의 성명 중 가장 중대한 성명"이라 했고 <자유신문>에는 "이 발표에
2011.09.07 07:55:00
대중 정당의 개념이 없는 박헌영 일파
[해방일기] 1946년 9월 5일
8월은 박헌영에게 몹시 힘든 한 달이었다. 8월 3일 인민당 중앙위원장 여운형의 3당 합당 제안서를 접수할 때까지는 좋았다. 이튿날 아침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연 중앙위원회에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6인의 원로-중진 중앙위원들이 당 대회 소집을 요구하고 나선 것
2011.09.05 07:58:00
밀수선, 밀항선, 해적선이 넘치는 바다
[해방일기] 1946년 9월 2일
해방 1년이 지나고도 수백만 재외 동포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주와 일본에 가장 많은 동포가 남아 있었다. 만주에서는 200만 이주민 가운데 절반가량이 돌아오고 절반가량이 현지에 남았다. 해방 얼마 후부터 소련군 점령 지역인 만주의 구석구석에 공산군이 자리 잡
2011.09.02 09:18:00
북로당은 왜 박헌영의 손을 들어줬나?
[해방일기] 1946년 8월 31일
8월 28일자 <자유신문>("김-여 양씨에 서한, 하 중장 좌우 합작에 기대")과 <동아일보> ("합작 노력에 큰 관심, 하 장군 김-여 양씨에 친서")에 하지가 8월 24일 김규식과 여운형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기사에는 김규식이 받은 편지 내용이 게
2011.08.31 09:51:00
양심적인 검사를 괴롭힌 정판사 사건
[해방일기] 1946년 8월 29일
7월 29일 첫 공판 이후 중단되었던 정판사 사건 재판이 8월 22일에 재개되었다. 첫 공판 때 변호인단이 공판 기일 연기를 신청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판사 기피 신청을 냈고, 이 기피 신청이 기각된 후 기각에 대한 항고와 다시 그 기각을 거치는 동안 재판이 중단되었던
2011.08.29 07:38:00
좁아지기만 하는 공산당의 길
[해방일기] 1946년 8월 26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지난 번(7월 29일) 만나 뵌 후에도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선, 해방 1주년 기념일에 큰 불상사가 없었던 것이 다행입니다. 온 민족이 함께 기뻐할 날에 큰 불상사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니 참 딱한 일입니다. 하지만 다행은 다행이죠. 지난 3·1절 때와 같은
2011.08.26 08:06:00
박헌영 극좌 노선의 뿌리
[해방일기] 1946년 8월 24일
8월 5일자 일기에서 공산당의 내분 이야기를 했다. 그 문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에서 공산당이 어떤 전통을 갖고 있었는지 개관해 본다. 1920년대 들어 조선인의 항일 운동에 공산주의 바람이 크게 일어난 데는 몇 가지 조건이 함께 작용했다. 고종의 죽음으로 왕조 회복
2011.08.24 09:4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