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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인 검사를 괴롭힌 정판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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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인 검사를 괴롭힌 정판사 사건

[해방일기] 1946년 8월 29일

1946년 8월 29일

7월 29일 첫 공판 이후 중단되었던 정판사 사건 재판이 8월 22일에 재개되었다. 첫 공판 때 변호인단이 공판 기일 연기를 신청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판사 기피 신청을 냈고, 이 기피 신청이 기각된 후 기각에 대한 항고와 다시 그 기각을 거치는 동안 재판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기피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도 그 주된 이유였던 공판 기일 연기는 실제로 어느 정도 이뤄진 셈이다.

개정 직후 박낙종이 '피고 회의'를 요구했는데, 양원일 재판장은 강경하게 불응했으나 모든 피고가 진행을 거부하고 변호사단도 요구하자 자신의 주재 하에 30분간의 피고 회의를 허락했다. 피고 회의에서 피고들은 고문 하에 진행되어 온 취조를 모두 취소하고 다시 취조할 것을 요구했으나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고들과 변호인단은 같은 사건으로 기소된 이관술의 병합 심리도 요구했다.

변호사단은 경찰의 불법 구금을 이유로 공소 취소를 요구했다. 아무리 중대한 범죄라도 경찰에서는 열흘 내에 검찰로 송국하게 되어 있는데 60일 이상 경찰에 붙들어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5월 초순에 구인장으로 유치시켜 놓았다가 7월 9일에야 유치장(留置狀)을 발행한 문제도 지적했다.

이에 대한 조재천 검사의 답변이 가관이었다. "미군 경무부장의 명령으로 경찰에서 계속 취조 중이었으니 위법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각하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미군 경무부장의 명령이 법 위에 있다는 검사의 해괴한 답변, 그리고 그것을 타당한 답변으로 받아들이는 재판장, 그것이 정판사 사건을 통해 드러난 당시 조선 사법부의 모습이었다.

긴 유치 기간은 고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피고 모두 경찰의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다고 호소했는데, 조재천 검사는 "뺨을 때린 일이 있다"는 경찰관의 말을 들었을 뿐이라고 답변했다. 재판장은 고문의 증거가 없으므로 고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조재천(1912~1970년)과 함께 이 사건을 담당한 김홍섭(1915~1965년) 검사의 태도가 흥미롭다. 재판 진행 중 변호인단에서 몇 차례 김 검사를 지목해서 질문을 던졌는데, 김 검사는 답변을 가급적 회피하고 조 검사에게 답변을 맡겼다. 김홍섭은 정판사 사건 기소 직후 사직하고 농사를 짓고 살다가 후에 김병로 대법원장의 간청으로 법원에 들어와 대법관까지 지냈다고 한다. 김병로와는 해방 전 변호사 사무실을 함께 하던 사이였다. 1953년 가톨릭에 입교한 후 '법의 속에 성의(聖衣)를 입은 사람', '사도법관(使徒法官)' 등으로 불린 김홍섭은 한국 법조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은 사람이다.

1954년 이후 3, 4, 5, 6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재천도 정치인으로 좋은 평판을 누린 인물이거니와, 당대 최고의 양심적 지식인인 김홍섭까지도 검사로서 역할을 강요당한 것이 정판사 사건이었다. 10월 21일의 구형 공판에서 김홍섭은 이런 말로 논고를 시작한다.

"소감을 간단히 말하면 유감스럽다고 하겠다. 내가 취조한 중 특히 박낙종은 50 평생 중 30년의 투쟁사를 가진 혁명 투사였으므로 만강의 감사를 드리는 한편 많은 감회를 느꼈으며 사회 여론은 이번 사건으로 말미암아 좌우익이 한층 소원하여지는 감상을 주는데 이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민족 구성의 일인으로 매우 유감히 생각한다. 법률가 입장으로는 형사사건이나 돌이켜 시민의 한 사람으로 볼 때에는 조선의 기근(饑饉)이요 민족적 비극으로 본다. 나는 김창선이 공판정에서 죽고 싶다 말할 적에 2000년 전에 일어난 예수를 은 30량에 잡아준 가롯 유다의 비극을 상기했다. (…)" (<자유신문> 1946년 10월 23일자)

정판사 사장으로 있다가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박낙종(1899~1950년)은 전쟁이 터졌을 때 총살당했다. 결국 '법살(法殺)'이 된 셈이다. 구형 논고에서 "공산당 자체가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애 장난을 잘못 감독한 것이라고 본다"고 한 김홍섭은 사건의 실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김창선을 가롯 유다에 비유한 것을 보면 김창선의 범행은 긍정한 것 같다. 그런데 감독 잘못한 죄로 무기징역 구형이 타당한 것이라고 그가 정말 생각했을까? 검사를 그만둔 그가 변호사로 돌아갈 생각도 않고 농사지으러 간 것을 보면 그 답을 알 듯하다.

고뇌에 찬 김홍섭 검사의 모습과 대조되는 태도를 양원일 판사는 보여준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 관계 기사에서 경찰과 검찰의 주장이 옳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서 재판장의 훌륭한 태도를 찬양하는 묘사를 남발하는데, 8월 25일자 "피고의 일관하는 부인(否認)에 적확한 증거품 제시"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 다음에 재판장의 "소감은 없는가?" "무슨 진술이 없나?" 하는 데 대해서도 아무런 답변이 없다가 "만일 변호인들의 보충 심리가 있을 때도 피고는 말하지 않겠는가?" 하는 물음에 김은 "그 때는 말하겠소" 하고 다시 재판장의 "그러면 피고는 지조가 있는 남아로는 불 수 없다"라는 말에도 답변이 없었다.

이런 데서 '지조'가 왜 나와? 어처구니없는 대목 하나만 옮겨놓았는데, 인권 의식이건 법 의식이건 눈곱만큼도 보여주지 않는 판사였다. 자기 직업이 판사가 아니라 형사라고 착각한 사람 같다. '형사'가 '형사부 판사'의 줄인 말이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재개된 공판에서는 평판과장 김창선을 집중적으로 취조했다. ('취조'가 아니라 '심리'였나? 아무튼 재판장은 취조처럼 했다.) 김창선은 뚝섬 위폐 사건 가담자였고, 뚝섬 사건에서 정판사 사건을 촉발시킨 연결고리였다. 김창선은 10월 29일 공판에서 이런 최후 진술을 했다.

"이 사건은 내가 纛島 사건에 관계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나는 검거 당한 이후 고문으로 인하여 허위 진술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동료에게 어떻게 사죄를 할지 모르겠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1일자)

김창선이 뚝섬 사건 외에 정판사에서도 뭔가 일을 꾸몄던 것일까? 김창선을 포함한 피고 몇 사람이 실제로 범행을 시도했을 가능성을 나는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겠다.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김홍섭 검사도 이 사건이 완전히 조작된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이 주장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1200만 원어치 위폐를 찍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뭔가 꼬투리를 잡고 매달리다 보니까 무리한 강압 수사를 통해 사건 규모를 부풀리게 되었을 것이다. 피고들 쪽에서 경찰의 공명심을 이용해 수사를 혼란으로 이끌려는 목적으로 고문에 못 이기는 척하고 사건을 키워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사건의 진위에 대해 내가 단정을 내리지 못하는 대신 10월 24일 김용암 변호사의 변호 중 중요하고도 설득력 있는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피고들이 송언필을 제외하고는 전부가 경찰에서 또는 검사에게 위폐 인쇄 사실을 진술하였으나 그 진술 내용에 있어서는 인쇄 시간, 액수, 인쇄 인원 등의 중요한 골자가 전부 틀리니 이로 미루어볼 때 사실 아닌 허구의 진술을 꾸미느라고 그리한 것이 틀림없으며, (…) 검사가 경찰서에 출장하여 장시일 병행 취조를 한 데 대하여는 나로서는 그 진의가 나변에 있는지를 이해키 곤란하다. 검사가 경찰서에 출장하여 취조한다는 것은 일제 시대 주로 사상범 취조에 있어 검사국에 고문 기구가 없는 만큼 출장 취조 한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 또한 피고의 인적 구성으로 볼 때 이관술, 박낙종, 송언필, 신광범을 제외하고는 위폐인쇄 하였다는 당시 다른 피고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니, 공산주의자의 장점이요 또한 단점인 필요 이상 타인을 의심하는 그 성질을 가진 그들이 비당원인 피고들과 손을 잡고 인쇄를 할 리가 없으며, 또한 당원이 아닌 피고들이 공산당에 무슨 큰 애착심이 나서 자기 몸을 희생시켜 가며 위폐 인쇄를 하겠다고 자청할까." (<자유신문> 1946년 10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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