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3일 22시 58분
홈
오피니언
정치
경제
사회
세계
문화
Books
전국
스페셜
협동조합
선거권, 중학교 졸업자에게 준다면…
[해방일기] 1947년 5월 14일
5월 1일 입법의원 제63차 본회의에서 '친일파 특별법'이 논의되는 광경을 4월 16일자 일기에 소개했다. 이 회의에서 '재수정위원회'가 만들어져 기존의 '수정위원회'와 맞서게 된다. 원래 이 특별법 제정에는 중간파와 좌익이 열심이어서 수정위원회
김기협 역사학자
2012.05.14 10:25:00
<동아일보>와 장택상의 합작 '빨대질'
[해방일기] 1947년 5월 11일
5월 13일에 안재홍 민정장관이 한 가지 특이한 조치를 취했다. 경찰에서 조사하고 있던 '이범성 사건'을 검찰에 넘기도록 지시한 것이다. 공소권이 검찰에 있으므로 경찰에서 조사한 범죄 사건은 때가 되면 검찰로 이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행정 수반이 나서서 넘
2012.05.11 11:29:00
그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해방일기] 1947년 5월 9일
오랜만에 오기영의 수필 한 편을 소개한다. 1947년 2월 <신천지> 제2권 제2호에 실렸던 것인데 이 무렵 세태의 일단과 함께 정치 상황이 잘 그려져 있다. 애꾸만 사는 세상에 두 눈을 가지고 갔더니 병신 구실을 하였다든가. 확실히 지금 이 판국에 맘 바르고 행실이
2012.05.09 12:39:00
美 '원조'는 냉전의 '무기'였다
[해방일기] 1947년 5월 4일
마셜 미 국무장관이 4월 8일 보낸 미소공위 재개에 관한 편지는 소련만이 아니라 영국과 중국 외무장관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파리에서 미-영-불-소 4국 외상 회담이 열리고 있는 중에 편지라는 형식을 취한 것은 공식적 입장을 최대한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응답
2012.05.04 09:57:00
김두한의 대한민청, 결국 해체된 이유는?
[해방일기] 1947년 5월 2일
해방 공간의 청년단체 중 좌익 단체는 "조공-민전-남로당 등의 외곽 단체로서 이들의 통일적 지도에 따라 정치 활동을 전개"한 반면 우익 단체는 "단일 정치 조직에 의해 통일적으로 지도된 것이 아니라 주요 우익 지도자들의 노선 분열에 따라 복잡하게 이합집산"한 것으로
2012.05.02 10:26:00
어글리 미국인? 이런 사람도 있었다!
[해방일기] 1947년 4월 30일
5월 1일의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앞두고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최근 3·1절까지 군중 행사 때마다 좌우 충돌로 불상사가 있어 왔기 때문이다. 4월 29일 수도경찰청의 담화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담화가 나왔다. "시위 행진 같은 가두 행진은 어떠한 사정이 있든지 간에
2012.04.30 07:05:00
서재필이 오면 이승만을 누를 수 있을까?
[해방일기] 1947년 4월 27일
1945년 10월 이승만의 귀국 때 하지는 이승만을 대단히 깍듯하게 모셨다. 맥아더가 시킨 것으로 보이지만, 도쿄까지 날아가 이승만을 영접한 셈이다. 이승만의 입국 다음날인 17일에는 기자 회견에서 이승만을 '배석'하는 자세를 취했고, 20일의 연합군 환영 대회에
2012.04.27 15:26:00
김구, 왜 이승만을 버리지 못했을까?
[해방일기] 1947년 4월 25일
4월 11일자 일기에 적은 것처럼 미소공위 재개에 관한 마셜 미 국무장관의 편지에 대한 몰로토프 소 외상의 답신 내용이 4월 23일 밝혀졌다. 미소공위 공전의 책임을 여전히 미국 측에 미루고 있기는 했지만 5월 11일로(당시 기사 중에는 5월 20일로 인용된 것도 있음.) 재개
2012.04.25 08:06:00
"외교에는 귀신"? 이승만 방미 외교의 실체
[해방일기] 1947년 4월 23일
4월 5일 미국을 떠난 이승만은 도쿄와 중국에 들러 맥아더와 장개석을 만나고 4월 21일 귀국했다. 장개석의 전용기에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지청천)을 대동한 당당한 위세였다. 트루먼 독트린의 발표와 미국의 대규모 경제 원조 논의가 그 위세를 더욱 당당하게 했다. 이승만
2012.04.23 10:37:00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은?
[해방일기] 1947년 4월 20일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서윤복이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Korea'란 나라 이름이 모처럼 긍정적 의미로 널리 알려진 일이었고, 국제 경쟁에서 조선인이 해방 후 처음으로 자부심을 느끼게 한 쾌거였다. 더욱이 조선인에게는 손기정(1912~2002
2012.04.22 12:2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