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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의 대한민청, 결국 해체된 이유는?

[해방일기] 1947년 5월 2일

1947년 5월 2일

해방 공간의 청년단체 중 좌익 단체는 "조공-민전-남로당 등의 외곽 단체로서 이들의 통일적 지도에 따라 정치 활동을 전개"한 반면 우익 단체는 "단일 정치 조직에 의해 통일적으로 지도된 것이 아니라 주요 우익 지도자들의 노선 분열에 따라 복잡하게 이합집산"한 것으로 류상영이 '8·15 이후 좌·우익 청년 단체의 조직과 활동' 맺음말에서 정리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4>(한길사 펴냄), 99~100쪽)

좌익 청년 단체가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공청, 1945년 8월 18일)에서 조선민주청년동맹(조선민청, 1946년 4월 25일)을 거쳐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1947년 6월 5일)의 흐름에 대개 포괄된 반면 우익 청년 단체의 계보는 정말 복잡하다. 이 차이를 류상영은 "통일적 지도"의 유무로 설명했는데, 내 생각에는 조직 원리가 돈이냐 이념이냐의 차이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구양수(歐陽脩)가 붕당론(朋黨論)에서 의리로 뭉친 조직과 이익으로 합친 조직의 차이를 설명했거니와, 이익의 관계는 쉽게 쪼개지고 쉽게 변한다. 조직의 성립이 전주(錢主)의 존재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방 공간에서 좌익에게는 큰돈이 없었다. 그래서 공산당과 남로당에 대항하는 좌익 정당들이 있어도 조직을 따로 만들 수 없었던 것 아닐까.

1945년 11월 20~22일의 전국 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를 파괴하기 위해 조선건국청년회(건청)이 나섰을 때 동원자들에게 일당을 준 사실이 들통 났다. (1945년 12월 16일자 일기) 자본가들이 공장을 직원위원회로부터 빼앗기 위해 폭력배를 대량으로 고용하는 데서부터 우익 청년 단체의 조직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46년으로 넘어올 때 반탁 운동이 일어나면서 우익 폭력 조직이 궤도에 올랐지만 청년 단체는 대한민주청년동맹(대한민청),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단(국청), 한국청년회, 한국광복청년회 등 여러 갈래로 이합집산을 계속했다. 1946년 말에는 중도 우파를 지지하는 조선청년당도 결성되었다.

우익 청년 단체의 사병(私兵)화는 미군정에게도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1946년 9월 이범석을 앞세워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만들었다. 족청은 미군정의 파격적 지원 아래 순조롭게 세력을 넓혀나갔으나 다른 청년 단체들처럼 정치 활동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미군정의 지원 기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범석과 함께 광복군의 상징적 지도자였던 이청천(지청천)은 1947년 4월 21일 중국에서 돌아오는 이승만과 같은 비행기로 귀국했다. 그가 5월 2일 조선청년당 지도자들과 만나 청년 운동의 통합을 역설했다는 짤막한 보도가 나왔다.

이청천 장군은 귀국 후 처음 조선청년당 최고위원과 회견하고 조선 독립을 전취할 유일한 방도는 오로지 청년 운동의 단일화에 있다라고 말한 후 금후 추진할 청년 운동 방책에 대한 중요한 협의를 장시간에 걸쳐 말하였다 한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3일자)

이청천은 1945년 11월 임정 귀환 때 광복군 조직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중국에 남아 있었다. 그 조직 사업이란 중국에서 항복한 일본군의 조선인 장병들을 빼내어 광복군에 편입시키려는 것이었는데, 연합국 처리 방침에 저촉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중국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아볼 길이 없다. 1946년 5월에서 6월에 걸쳐 그가 곧 귀국한다는 소식이 있었으나 (<자유신문> 1946년 5월 21일자 "이청천 장국 귀국 환영 준비", 6월 16일자 "이청천 장군 환영위원회 조직") 귀국하지 않았다. 그의 부인은 김규식 부인, 이범석 부인과 함께 7월 하순에 귀국했고, (<자유신문> 7월 30일자 "해외 투사 부인 환영회를 개최") 연말에는 독지가들이 그의 가족에게 위문금 2만4000원을 전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자유신문> 1946년 12월 28일자 "이청천 장군 가족에 위문금")

그런 그가 아무 예고 없이 이승만과 같은 비행기로 돌아왔다. 이튿날 찾아온 기자에게 이제부터 조선 실정을 공부할 작정이며 이외에는 아무런 계획도 없다는 말에 이어 "이번 이 박사는 우연히 한 비행기에 편승하게 되었을 뿐 하등의 협의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자유신문> 1947년 4월 23일자)

임정 요인으로서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의 성망은 김구 주석에 다음가는 것이었다. 그의 귀국만으로도 오세창(회장), 안재홍, 김병로, 남상철, 조병옥(이상 부회장)이 이끄는 환영위원회가 조직될 정도였다. 그런 그가 공식적 예고 없이 불쑥 이승만을 따라 들어왔는데 아무 협의가 없었다고?

그는 아무런 계획도 갖지 않고 귀국했다고 말했지만, 열흘 후 조선청년당과의 만남을 보면 청년 운동에 뜻이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그는 그 후 대동청년단을 만들어 우익 청년 단체의 통합에 나섰다. 이범석의 족청이 기존 단체들과 관계없이 새로 단원을 모집한 데 반해 대동청년단은 우익 단체들의 통합에 주력했다. 광복군의 두 지도자가 우익 청년 운동에서 경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한 사람은 이승만을 등에 업고.

민정장관 안재홍의 행정명령 제1호는 4월 22일에 나온 것이었다.

행정명령 제1호
대한민청의 해산 (략)
1947년 4월 22일
상 요청함 경무부장 조병옥
상 건의함 민정장관 안재홍
상 인준함 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아처 엘 러취 (<군정청관보> 1947년 04월 22일)

경찰에서도 도저히 감싸줄 수 없는 짓을 대한민청이 저지른 결과였다.

20일밤 수도경찰청에서는 돌연 활동을 개시하여 시내 남산동 구 동본원사 자리에 있는 대한민청 본부를 수사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21일 수도청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별발표를 하였다.

"20일 오후9시경 씨·아이·씨 통고에 의하여 수도청장 직접 지휘 하에 무장경관 70명이 남산동 대한민청 본부를 습격하여 시체 1(정진룡=32)과 부상자 10명을 발견하였다. 부상자는 백인제병원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시키고 대한민청 김두한 이하 32명을 포박 취조 중인데 시체는 타박상을 입은 것이 판명되었다. (<경향신문> 1947년 4월 22일자)

8일 공보부 특별발표에 의하면 민정장관 안재홍은 행정명령 제1호로 대한민청을 해산하였는데 그 이유와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대한민청단원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공공연히 대한민청원의 이름으로써 폭행과 협박을 감행하며 테러와 악한단의 행동을 계속하여 왔다. 이러한 행동은 질서 있는 정부와 조선의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전에 직접 위협을 주는 것이므로 본관은 다음과 같이 명함.

1) 대한민청은 해산함을 요하며 자에 즉시 해산됨
2) 법령 제55조에 의한 해 단체의 등록은 취소함
3) 해 단원은 동양의 정책을 취하는 다른 단체에 가입함을 금함(략)"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7년 5월 10일자)

행정 명령 제2호는 5월 16일에 나왔다.

행정명령 제2호
조선민청의 해산(략)
1947년 5월 16일
우 요청함 경무부장 조병옥
우 건의함 민정장관 안재홍
우 인준함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아처 엘 러취 (<군정청관보> 1947년 05월 16일)

대한민청의 경우와 같은 구체적 이유가 없었다. 일종의 '상호주의'였을까? 대한민청을 해산했으니 조선민청도 해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군정청 내외의 우익 인사들에게서 나온 결과로 짐작된다. 그런데 두 단체가 이름은 비슷하지만 대한민청이 단순한 테러 단체인 반면 조선민청은 좌익 청년운동의 주류였으니 타격은 왼쪽이 훨씬 더 컸다.

이 정도의 상호주의도 지켜지지 않는 일이 많았다. 조병옥의 회고 중 하지에게 진언해서 '민애청'('조선민청'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을 해체시켰으나 상응 조치로 서북청년회도 해체하라는 지시를 모면한 일을 자랑스럽게 적은 대목이 있다.

하지 장군은 '민애청'을 해체시킴과 동시에 서북청년회를 해산시키라고 삼차에 걸쳐 아놀드 군정장관을 통하여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나는 서북청년회의 해체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대로 있었는데 그 동안 군정장관이 변경되어 [바뀐 시점에 대해서도 착각이 있는 듯] 러치 장군이 군정장관으로 취임하게 되자 서북청년단의 해체를 또다시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부당성을 지적하기를 북한 공산 치하에서 가혹한 비민주적 독재 정치에 시달려 갖은 고역을 다 맛본 젊은 청년들이 고향과 부모형제들과 생이별을 하고 월남한 그들에게 다소 불법성이 있었다고 해서 서북청년회와 같은 열렬한 반공적 우익 청년 단체를 해체한다고 하는 것은 한민족의 자유 독립을 완성하기 위한 준비 기관인 미군 정치의 본래의 임무와 사명에 어긋나는 처사일 뿐만 아니라 또 서북청년회를 해체하는 경우에는 국립경찰만으로는 남한의 치안을 유지할 도리가 없는 실상이므로 절대로 서북청년회를 해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나의 주장을 러치 군정장관은 하지 중장에게 설명하고 그 해체 지시를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다. (<나의 회고록>, 149~150쪽)

식민지 시대보다 경찰 병력을 갑절이나 늘려 놓고도 서북청년회 같은 테러단체 없이는 치안을 유지 못하겠다니, 참 염치도 좋다. 그런 단체의 도움으로 지키겠다는 치안이 도대체 어떤 치안인지.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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