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3일에 안재홍 민정장관이 한 가지 특이한 조치를 취했다. 경찰에서 조사하고 있던 '이범성 사건'을 검찰에 넘기도록 지시한 것이다. 공소권이 검찰에 있으므로 경찰에서 조사한 범죄 사건은 때가 되면 검찰로 이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행정 수반이 나서서 넘겨라 말라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특이한 조치였고, 해명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범성 사건, 안 장관 지시로 검찰청에 이관"
안재홍 민정장관은 문제의 이범성 사건을 경찰의 손에서 검찰 당국에 넘기도록 경무 당국에 지시한 이유를 15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동 지시는 지난 13일 경무부장과 사법부장에게 하였다. 동 사건의 전모는 이미 판명되었고 경찰도 취조를 더 할 것도 없다. 특히 동 사건은 정치 지도자 김규식 박사와도 관련된 것 같이 말이 돌아 일반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검찰 당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동 사건을 조사해 왔으니만치 신속히 검찰 당국이 착수하여 재빠른 귀결을 지어 일반의 궁금한 신경을 풀게 하기 위하여 그러한 지시를 한 것이다. 김규식 박사가 동 사건에 관계하였다는 경찰의 보고를 아직 듣지 못하였고 김 사법부장도 현재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김 박사는 절대 관계가 없다고 말하였다. 어쨌든 이범성이가 김 박사의 이름을 팔고 사기를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자유신문> 47년 5월 16일)
왜 이런 특이한 지시가 필요하게 되었나? 민정장관 보기에 때가 되었는데도 경찰에서 이관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건에 김규식 연루설이 시중에 퍼졌으므로 서둘러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경무부 보고에는 연루 내용이 없는데도 처리를 서두르지 않는 것이 불만스러웠기 때문에 이관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공식적 지시가 나오기 전에 경찰에 대한 민정장관의 의사 표시가 있었을 것이다. 경무부 측이 그런 의사를 묵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 지시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지시가 나온 후 장택상의 움직임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범성 관계? 수도청서 철야 취조"
수도관구경찰청 수사과에서는 돌연 14일 밤부터 장택상 총감과 관계 간부가 철야를 하여 모종의 사건 피의자를 취조 중인데 동일 시내 모처를 가택 수색하였다고 하며 15일에는 시내 모 은행에서 모 여성을 소환하는 등 사건은 자못 주목되는 바 있는데 수도청 측은 절대 비밀에 붙이고 언급을 피하고 있다. 그런데 듣는 바에 의하면 이 사건은 중부서에서 취급하던 이범성 2000만 원 사건의 관계자 취조라는 관측이 있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16일)
"재계 거두 등 연일 취조"
14일부터 수도관구경찰청에서 극비밀리에 취조를 진행하는 모종의 사건이 발생하여 연일 장택상 청장 지휘 하에 취조를 시작하였는데 경찰청 측 말에 의하면 사건은 해방 이후의 최대 사건으로 (…) 이 문제에는 일절 경찰 최고 간부만이 취급하는 것을 보아도 중대한 사건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장 총감의 말에도 이 문제에는 조선 경찰로서 수색치 못할 만한 곳도 수색하였다는 것을 보면 혹은 외국에 국적을 가진 사람의 집도 수색하지나 아니한가도 추측된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17일)
5월 19일 장택상의 기자단 회견에서도 이런 문답이 있었다.
(문) 최근 수도청에서 시내 모 은행 모 씨와 재계 요인을 취조하는 사건이 있다는데 전모를 발표할 수 없는가.
(답) 그 사건은 경찰이 직접 취급하는 사건이 아니고 모 외국인의 사건으로 경찰에 위촉된 사건이다. 재계의 요인 수 명을 경찰에서 조사한 것으로 아직도 조사를 계속 중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발표권은 내게는 없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20일)
도깨비 같은 대답이다. 경찰이 직접 취급하는 사건이 아닌데 위촉받은 것이라니? 경찰이 자기 사건 아닌 사건을 위촉받아 조사하다니 경찰이 흥신소 같은 데란 말인가?
안재홍의 지시로 이범성 사건은 경찰의 관할을 떠났는데, 장택상은 눈 가리고 아웅 하듯, 이 사건을 계속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풍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동아일보>는 열심히 받아 기사화하고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으로 기사 모두를 열람할 수 있는 것이 <동아일보>와 <자유신문> 둘뿐인데, 위 기사들 내용이 <자유신문>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장택상과 <동아일보>의 특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장택상이 김규식 관련 의혹을 놓고 '빨대질'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정장관에게는 의혹이 보고되지 않고 있는데 시중에는 소문이 무성했다. 합작위에서 5월 12일 발표한 성명에서 소문 내용을 알아볼 수 있다.
"김 박사에 대한 중상모략, 민족이 용서 못할 죄악"
좌우합작위원회 비서부에서는 12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작금 일부에서 김규식 박사가 이범성을 이용하여 사기를 하였다느니 원세훈 씨가 관련되었다느니 하는 상식 이하의 엄청나고 비열 흉악한 중상으로써 김 박사의 정치적 신망을 손상시키려는 정치적 음모는 민족의 양심으로써 묵과할 수 없다"라고 통론(痛論)하는 동시에 수개월 전부터 이런 낭설이 있었음에 비추어 김 박사는 공적으로나 또 미군 최고당국에까지 스테-트먼트를 보낸 일이 없어 당국의 조사에 따라 불원 진상이 백일하에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불일 김 박사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발표가 있을 것이나 공산당이나 민청과 관계 운운도 역시 악질 모략이라고 비난하였다. (<자유신문> 1947년 5월 14일)
그런 상황에서 안재홍 민정장관의 이관 지시가 나온 것이다. 이 지시에도 불구하고 장택상은 조사를 계속하며 "경찰에 위촉된 사건"이라고 둘러댄다. 누가 어떻게 위촉한 것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그 위촉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애국심'을 내세웠겠지.
▲ 1947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2면은 '김규식 죽이기' 기사로 도배되었다. 드러난 증거는 없지만 수도경찰청장 장택상과 긴밀한 협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전이 실패한 후 장택상은 김규식을 찾아가 자기 집 가보라며 옥물부리를 바쳤고, 김규식은 그 옥물부리로 담배를 맛있게 피웠다고 한다. 근거도 없이 '노무현 죽이기'에 나선 조현오가 장택상에게 배운 것이 있는 듯한데, 갖다 바칠 가보도 있는지 모르겠다. ⓒ동아일보 |
이 상황을 적다가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의 회고 중 장택상에 관한 부분이 생각난다. 어느 시점의 일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사건 후의 일이었을 것 같다.
평소 김 박사는 장죽을 늘 피우고 있었으며 입원 중에도 장죽을 즐겼는데, 이런 취향을 간파했음인지 장택상은 옥물부리를 갖고 왔다. 자기 집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해 내려오는 것인데 김 박사님께 드리려고 갖고 왔노라면서, 옥으로 된 장죽을 선물했다. 그러면서 아주 정중한 어조로 그는 "선생님과 저 사이를 이간하기 위해 항간에는 악의에 찬 별의별 소문이 다 있지만 저의 본심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울먹이는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가 선사한 옥물부리를 김 박사는 아주 애용했다. (<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88쪽)
같은 책 103쪽에는 1948년 4월 남북 협상파의 평양행을 앞두고 송남헌이 장택상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 적혀 있다. 원세훈이 가는지를 장택상이 특별히 묻고, 딸이 아파 못 갈 수도 있다고 대답하자 5만 원을 주며 딸을 입원시키고 가게 해드리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원세훈도 김규식과 함께 이범성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사람이다. 장택상이 이 일로 김규식과 원세훈의 원한을 살까봐 겁낸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검찰은 5월 26일 이범성 사건을 기소하고 5월 28일 공보부를 통해 기소 내용을 발표했다.
"김 박사는 관련 없다-공보부서 이범성 사기 사건 발표"
김규식 박사가 관계된 듯이 정치적 모략선전으로 인하여 일반의 다대한 관심을 끌던 이범성 외 6명의 사기 사건은 26일 기소되었는데 검찰당국에서는 28일 공보부를 통하여 기소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이범성의 사기 사건은 조사한 결과 그 사취한 금액이 2300여만 원이고 증거가 충분하므로 공범 관계자 6명과 함께 거 26일 기소하였고 이 사건에 관하여 김규식 박사가 직접 관련된 것 같이 일부에서는 전하나 당 검찰청에서 세밀히 조사한 바에 의하면 김 박사는 직접 관계가 없고 다만 이범성으로부터 그 금액의 일부를 항례에 의한 정치자금으로 받은 일이 있을 뿐이다. 즉 김 박사는 내용 진상은 전혀 모르고 정당한 금전으로만 알고 영수한 것이 판명되었다." (<자유신문> 1947년 5월 29일)
담당 검사 조재천은 5월 26일 기자단 회견에서 더 구체적인 내용을 밝혔다.
(문) 원세훈 씨에 대하여서는?
(답) 아직 조사된 점이 없어서 계속 수사 중인데 관련된 구성회는 아직 체포되지 않았다.
(문) 그러면 원 씨가 이범성으로부터 돈 받은 것이 사실인가?
(답) 구(성회)의 손을 거쳐서 이범성으로부터 20만 원을 받은 사실이 있다.
(문) 여하한 명목으로 돈을 받았는가?
(답) 합위 비용이니 개인 정치 자금이니 하여 아직 명백치는 않다.
(문) 사기한 돈인 줄 알고 받았는가?
(답) 모르고 받은 것이다.
(문) 김규식 박사와의 관계는 여하한가?
(답) 김 박사와 부인께 구좌로 입금된 돈은 1100만 원이나 사기한 돈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문) 그럼 입금된 사실은 알고 있었는가?
(답) 구성회가 은행에다가 입금한 연후에 입금된 통장을 김 박사에게 보인 것이다.
(문) 김 박사가 먼저 돈을 요구한 것인가?
(답) 이범성이가 김 박사에게 자기는 여러 가지 사업을 하여 상당한 이득이 있으므로 김 박사의 정치자금을 1000만 원까지는 제공할 능력이 있다고 자진하여 말한즉 김 박사도 이에 승인하였던 것이다.
(문) 김 박사는 이 돈에서 얼마나 소비하였는가?
(답) 공절수(空切手) 700만 원에 관하여서는 입금을 취소하였고 잔여금은 모르겠다.
(문) 이범성이가 합위 요직을 차지했다는데 사실인가?
(답) 김 박사의 양해를 얻어 원세훈으로부터 합위 계획부 부주임을 구도로 임명받았다.
(문) 조선민청에 기부한 돈이 있다는데?
(답) 조선민청은 김영욱이가 안면이 많은 김병균에게 기부 요청을 한 바 동인은 이범성과 상의한 후 금 3만 원을 김영창을 통하여 기부하였다.
(문) 금년 1월 말경 피해자 김목응이가 김 박사에게 피해 전말서를 제출하였으므로 그 비서로 하여금 조사시킨 사실이 있다는데?
(답) 피해 전말서가 아니고 고소장을 작성하여 입법의원 김영규 씨를 통하여 김 박사에게 보인 일이 있었으나 그것은 1월 말경이 아니고 3월 초순이다. 그리고 2월 초순경 송남헌 비서가 고리짝 운운 풍설을 듣고 마침 노상에서 이범성을 만나 물어본즉 동인은 그러한 풍설은 김 박사와 자기를 중상시키려는 모략이며 절대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였으므로 송 비서도 그런 줄 알았던 것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29일)
김규식이 이범성에게 정치 자금을 받겠다는 응낙은 했지만 그 자금의 출처는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즘의 정치자금법으로는 그것만으로도 문제가 되겠지만, 당시에는 뜻있는 사람에게 뜻있는 돈 받는 데 아무 문제없었다. 문제가 된다면 김규식이 좌우 합작에 나서면서 군정청으로부터 600만 원을 가명 통장으로 받은 것도(<송남헌 회고록> 75-77쪽)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사기 총액이 2300만 원인데 그 절반을 김규식에게 바쳤다면 이범성이 단순한 사기꾼은 아닌 것 같다. 사기를 위해 정치적 관계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정치 자금 마련을 위해 사기를 친 것으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꼭 사기를 치려는 게 아니라 당시 모리배들이 하던 '사업'의 흉내였을지도 모른다. '피해자'들을 한 탕 등쳐먹고 말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고리짝을 불하받아 '투자자'들을 만족시키는 사업. 걷은 돈의 절반으로 물건을 불하받고 절반은 김규식의 정치 자금으로 집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닐지.
아무튼 김규식이 이끄는 합위 세력을 미워하는 측에게는 엄청난 호재였음이 틀림없다. 공산당을 작살낸 정판사 사건과 비교해 보라. 1200만 원의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혐의였는데 증거가 매우 부실했다. 그보다 갑절이나 되는 액수에다가 피해자가 명백히 존재하는 등 증거가 분명한 이 일에 책임을 연루시킨다면 김규식 열 명이라도 날려버릴 수 있다고 희희낙락했을 것이다. 장택상의 집착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장택상만이 아니라 우익 신문들도 소문에 기대어 김규식을 물고 늘어졌던 모양이다. 입법의원에서 5월 19일 잘못된 보도를 징치하자는 긴급제안을 의원 43인이 제출했다. 의장에 대한 부당한 정치공세가 넓은 범위의 반감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김 박사 관련설, 구명 징치하자-입의서 제안"
이범성의 소위 2000만 원 고리짝 사기 사건에 김규식 박사도 관련되어 있는 듯이 지난 10일 이래 시내 2, 3 신문에서 이를 취급 보도한 바 있었는데 입의 강순, 박건웅, 오하영, 김약수, 신의경 등 43 의원은 그 보도는 김 박사를 훼방 모욕한 것이요 따라서 입의를 모멸한 것이라고 관계 당국으로 하여금 신문사의 책임을 구명 징치케 하기를 의결하자고 입의에 긴급제안을 내어 19일의 본회의에서 이에 대한 토의를 하였는데 긴급 제안 이유는 다음과 같다. "'김규식 박사의 과도한 노망', '입법의 의장 건재호(健在乎)?' 등 무지망작한 문구를 대서특필하여 천하에 광고함은 사기한 이범성에게 피사(被詐)된 인사들의 성명서에 의거하여 완전한 음모 모략으로 포풍착영하여 함부로 혁명 영도자를 모훼 모욕한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민족질서를 파괴하는 민족 악질, 본원을 모멸하는 민족 패륜 행위는 민족 정의를 위하여 본원 위신을 위하여 반드시 응급 징치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므로 주문과 같이 제안함." (<자유신문> 1947년 5월 20일자)
2, 3개 신문이 어디어디일까 궁금한 차에 마침 한 군데 자수 기사가 나왔다.
"부당한 징치 결의, 취소를 엄중 요구-작일 입의에 본사 항의"
입법의원 제76차 본회의에서 강순 의원 외 42의원이 연서하여 '사기한 이범성 2000만 원 고리짝 사건'을 신문 보도하는 데 있어서 김규식 박사를 중상한 신문을 징치하자는 '긴급 제의안'을 상정 가결한 바 있었다.
본보는 동 사건을 보도함에 있어서 사건에 관련된 모든 방면의 정확한 조사를 하여 (…) 지난 13일부 본보에 보도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김 박사를 중상하였다는 제의안에 본보를 끌어넣어서 본보의 명예를 손상케 하는 부당한 제의안을 신성한 원에 제의하여 다사다난한 차제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시회의 공기로서의 언론 기관의 사명을 모르는 행동인 동시에 입법의원 자체의 권위를 몰각한 행동으로서 그 반성을 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20일 본보에서는 입법의원에 본보에 대한 허위 날조 사실을 지적하는 동시에 이의 취소를 엄중히 요구하였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25일)
1947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제2면을 밑에 붙인다. 총 8단 중 이범성 사건 관계 기사가 5단을 넘어서고 제목부터 선정적인 것이 많다. 김규식 부인이 "미안타고 변명"했다니, 김규식이 지은 죄를 놓고 그 부인이 피해자에게 미안해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2000만 원대 사기 사건 폭로-배후에는 합위 요인들도 관계"
"피해자엔 고학생도 있소-김 박사 부인은 미안타고 변명-피해자 이 모 담"
"사건은 전부터 알았다-김증봉 검찰관 담"
"수표 분실계로 위기일발, 피해 면했소-관계자 신영균 씨 담"
"추천했다는 모 부장 담"
"취조 중이니 말할 수 없다-장 총감 담"
"김 박사 예금 취소되었다-조흥 하 씨 담"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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