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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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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해방일기] 1947년 5월 9일

오랜만에 오기영의 수필 한 편을 소개한다. 1947년 2월 <신천지> 제2권 제2호에 실렸던 것인데 이 무렵 세태의 일단과 함께 정치 상황이 잘 그려져 있다. (<진짜 무궁화>(성균관대학교출판부 펴냄), 28~30쪽)

善良의 窒息

애꾸만 사는 세상에 두 눈을 가지고 갔더니 병신 구실을 하였다든가. 확실히 지금 이 판국에 맘 바르고 행실이 똑똑한 사람은 병신 구실을 할 수밖에 없다. 모리배가 신사요 수회관리(收賄官吏)가 유능한 관리요 친일파가 애국자로 되어 있는 세상에서 청렴한 자 밥을 굶고 개결(介潔)한 관리는 미움을 받아야 하며 애국자는 감옥이나 가야 하는 것은 의당한 일이라 기괴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이니 한심타 하는 바다. 그 간악한 일제의 폭압에서 벗어나서 평화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한 나라를 세워서 인민을 위하여 인민의 손으로 인민의 정치를 하자던 노릇이 세상이 거꾸로 되기로니 이 지경으로 거꾸로 되어서야 옳단 말인가.

이것을 탄식이나 하고 말기에는 오늘날 이들의 작폐가 너무도 심하여 얻은 줄 알았던 독립은 까마득하게 되었다. 옛 시절의 그 지긋지긋하던 배급쌀 타령이 도리어 규칙적이요 제법 믿을 만하였던 것이라고 보게 되었고 해방 이후의 감옥이란 친일파 민족 반역자와 파렴치 범죄한을 위해서만 필요할 줄 알았던 것이 뒤집혀서 여전히 애국자의 갈 곳이 여기요 자유로운 대로(大路)는 군자 아닌 저들 악질분자의 활개 치는 마당이 되어 버렸으니 아무리 성미를 누그러뜨릴지라도 기가 막힌 세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꼴 보기 싫은 세상이라고 잊어버리기에는 이 땅에 이 기회가 그래도 우리를 갱생시키는 기회라 하니 그래서 설마 설마 하며 참아온 지도 이미 오래다. 그런데 여전히 돈이면 만사형통이라 믿는 자가 있고 그래서 또 먹을 수만 있으면 먹어주자는 패가 있다.

옛날 일본의 어느 대신은 자갈을 협잡해 먹고도 이빨이 건전하여 그 민중이 놀랐더니 그 다음 어느 대신은 철도를 먹고서도 역시 건강하여 세상을 아연케 했다지만 오늘 조선의 관리 중에는 복중(腹中)에 잡화상을 차리려는 모양인지 닥치는 대로 마구 들어가는데 고무신도 좋고 가죽도 좋고 병정구두도 좋고 빨래비누도 좋고, 광목도 좋고 그나마 또 식량(食量)이 어떻게 거량인지 가죽을 한꺼번에 600만 원어치도 꿀떡 하며 집어삼키는 판이니 송도(松都) 말년의 불가살이도 기절할 지경쯤 되어 있다.

또 하나 알다가도 모를 일이 있다. 이렇게 뱃속에 잡화상을 차려놓은 관리 중에 혹 체증이 생겨서 소화 불량 끝에 철창 있는 입원실에 모셔 가게 되면 의술도 각양각색인 모양이라 집증(執症)도 서로 달라서 입원 자격이 있네 없네 하고 옥신각신하는 소문이 쩍하면 세상 밖에까지 나오는 것이다.

어떤 환자는 18만 원짜리를 백몇십만 원인가로 불려 먹다가 체증이 걸린 모양인데 한 의사는 단단히 입원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데 한 의사는 또 뭐 그럴 것 없다고 퇴원을 시켰다. 하기는 나중 의사의 집증은 옳은 양하여 그는 퇴원하는 날로 다시 대도(大道)에 활보한다는 신문 기사가 나는 판이다. 신문은 다시 이들 의사들이 집증의 한계를 정하기 위하여 회의까지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이 한계를 정하는 회의에 있어서 어느 만한 한계로 국민의 보건을 고려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모를 일이 또 하나 있다. 이들 모리배와 악덕 관리와 친일파의 작폐가 이렇듯 심한 것은 이제 와서 전 민중의 일상생활에서 체험하고 남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숙청하나는 주장이 대단히 극렬한 사상의 발로로 인정되는 점이다.

친일파가 친일하던 수단으로 또 다시 친미를 하되 진실된 친미가 아니라 제 버릇 개 주지 못하여 사리사욕을 위한 친미인지라, 모리의 원천이 여기 있고 선량한 인민의 생활고가 여기서 말미암음을 누구나 알고 있건만 어째서 이들을 시급히 숙청하라는 주장이 어느 한편의 주장으로만 되어 있으며 그래서 그들을 싸고도는 편에서는 이것이 정쟁의 한 표어쯤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이다.

한 때 술이 귀해졌을 때 술에다가 물을 타서 파는 자가 있었다. 이것이 더욱 발달한 나머지 물에다가 술을 타서 파는 자가 보통으로 되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요즘 세상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기는커녕 역사는 발전하는 법칙이 여기도 응용되는 것인지 악덕상의 악덕수단은 시대와 함께 발전하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선량한 사람이 도적놈의 틈에 끼어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선량한 인민 속에 역시 한두 불량한 분자가 끼어 살되 숨도 크게 못 쉬며 몰래 살던 옛 시절에 비하여 도적놈 틈에 끼어서 질식 상태에 빠져 있는 선량한 인민의 신세가 그저 딱하다고만 보아두는 것으로 그만이라야 옳은가? 어디 두고 보자.

이 글을 올릴 생각이 바짝 든 것은 1947년 5월에 사람들의 큰 관심을 모은 한 건의 사기 사건 때문이다. 주범의 이름에 따라 '이범성 사건'이라고도, 사기 금액이 엄청나게 크다고 하여 '2000만 원 사기 사건'이라고도 했으며, 사기 품목에 따라 '고리짝 사건'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김규식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흑색선전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 사건 이야기는 며칠 후에 하려 하는데, (민정장관 안재홍이 이 사건을 경찰에서 검찰로 이관하도록 5월 13일 명령을 내리는 것을 계기로 사건이 크게 부각되었다.) 아직까지도 명쾌하게 파악되지 않는 문제 하나를 오늘 제시해 둔다. 혹시 관계된 의견이나 지식을 전해주는 독자가 있으면 대단히 고맙겠다.

종방(鐘紡) 창고에 일본인 소유의 고리짝 다수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중 1만 개를 이범성의 회사에서 불하받게 되는 것처럼 서류를 위조하여 피해자들에게 보이고 몇 개를 나눠줄 테니 얼마를 내라는 식의 사기였다고 한다. 5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170만 원을 내고 500개를 분양받기로 한 한 피해자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고리짝 하나에 3000여 원씩 흥정이 된 셈인데, 분양받는 사람들은 하나에 1만 원은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에 선금을 내며 거래에 응했을 것이다. 고리짝 자체가 값비싼 공예품이었을 리는 없고, 내용물의 가치 때문에 고리짝 하나가 쌀 몇 가마 값으로 통했을 것이다.

내용물이 무엇이었는지 당시의 신문 기사에 밝혀진 것이 없다. 추측컨대 조선에 거주하던 수십만 일본인이 해방 후 돌아갈 때 가져가지 못하는 것을 고리짝에 담아두게 한 것이 아닐까? 각자 몸에 지니고 갈 수 있는 짐만 가져가게 하고 그 밖의 재산 중 꼭 보관하고 싶은 것을 고리짝 하나에 담아두도록 한 것이 아닐까?

재 조선 일본인의 재산은 식민 통치에 의거해 부당하게 취득한 것이므로 조선과 조선인이 돌려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당시 당당하게 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농지나 공장 같은 생산재, 나아가 토지나 건물 같은 부동산에는 그런 주장을 적용시킨다 하더라도 의복이나 가구 같은 소비재까지도 압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추측이 틀린 것이기 바란다. 체제 붕괴 상황에서 개인들도 피해를 입을 수 있기는 하지만, 고리짝에 넣어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있다는 것은 주인들이 떠나는 시점에서 일단 그 소유권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시중에 풀어 팔아먹을 수 있게 한다는 생각을 사기꾼들과 피해자들이 모두 할 수 있는 상황이란 것은 상상하기에도 너무 우울하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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