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일종의 정부안이라 볼 수 있는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공익위원안을 내놓은 공익위원 간사인 이철수 서울대 교수도 이날 한국노사관계학회 주최의 추계정책토론회에서 "전임자 급여를 지급하지 않도록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는 아니다"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러나 임태희 노동부 장관은 이날 "(두 문제는) 매우 기본적이고도 원칙적인 것"이라며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시행하는 것이 정부 입장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고 강조했다. 임 장관은 "내년 1월 시행되는 선진 노사관계 제도는 건강한 노사문화의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라고 되풀이했다.
'이명박 정부의 노동정책'을 주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상당수 전문가들은 "현 정부의 노동정책을 경제라인이 주도하고 있다"는 한국노총의 주장과 비슷한 요지의 우려를 내놓기도 했다.
정부와 보수언론만 한 목소리 "전임자 임금 금지가 선진국의 철칙"
이철수 교수는 이날 서울 여의도 CCMM(국민일보) 빌딩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요즘 신문에 이상한 말이 많이 나온다"며 "국제노동기구(ILO)의 분명한 요구는 복수노조 시대를 열라는 것과 전임자 임금을 법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위반이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정부가 이 두 조항의 시행 강행의 근거로 '글로벌 스탠다드'를 자주 언급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 뿐 아니라 정정길 대통령실장도 지난 8일 "복수노조와 노조 전임자 문제의 시행이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얘기한 바 있다.
일부 언론이 이런 정부를 거들고 있다. <매일경제>는 지난 8일자 사설에서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은 영국이 노사 자율에 맡기는 등 일부 예외가 있지만 대부분 선진국에서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글로벌 스탠다드나 다름없다"며 "특히 미국은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을 불법으로 규정해 처벌하고 있고 일본도 노조에 대한 사측의 경비보조를 부당노동행위로 못 박고 있다"고 주장했다.
<문화일보>도 같은 날 "외국에서는 '복수노조 인정'과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다"며 "특히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는 미국와 일본, 영국, 독일 등 발달한 선진국이라면 깨트릴 수 없는 '불문율' 혹은 '철칙'으로 삼고 있는 일종의 '글로벌 스탠다드'라 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정부가 '글로벌 스탠더드'를 내세워 노조 전임자의 임금 지급을 금지하는 법을 내년부터 시행하려 하는 가운데 노동관련 전문가들은 22일 '좌우'를 떠나 한 목소리로 정부의 주장이 틀렸다고 지적했다.ⓒ프레시안 |
이철수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 아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미국은 관련 법규가 없고 주는 곳도 있다"며 "노동부가 주장하는 미국 노동관계법(NLRA) 302조의 경우에는 '뇌물'을 얘기하는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노동부는 "302조에는 종업 대표, 노조가 사용자로부터 금전 등을 지급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1만 달러 이하의 벌금 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설명해 왔다.
이런 반박은 그동안의 노동계 주장과 동일하다. 노동계는 "ILO협약이나 UN글로벌콤팩트에서는 전임자 문제는 법으로 금지할 것이 아니라 노사자율로 맡겨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며 "해외 사례를 보더라도 기업별 수준에서 노조 전임자의 임금을 금지하는 법은 찾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노사 간 협약에 의해 사용자가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전혀 부당노동행위에 해당되지 않고 일본의 경우에도 1949년 사용자의 재정상 원조를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졌지만 조합의 자주성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단체협약으로 규정한 경우에는 부당노동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노동계는 '노사 자율로 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다만 이철수 교수는 법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가급적이면 노조 스스로 전임자 급여를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사용자의 주장은 노사자치라는 '국제기준상의 대원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완전 방임을 주장하는 노동계도 '노동조합의 자주성'이란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전임자 금지가 법질서 확립 첫걸음" vs. "국가가 개입할 영역 아니다"
전임자 급여 지급 금지를 둘러싼 의견 차는 여전히 팽팽하다. 토론자로 나온 현대자동차의 정병무 상무는 "전임자 급여 금지가 법질서 확립과 국가경쟁력 제고의 첫 걸음"이라고 주장했고, 법률사무소 I&S의 조영길 변호사는 한 발 더 나아가 "관련 법 위반 시 제재 등의 실효성 있는 장치가 없으면 (법이 있어도) 힘이 우월한 노조가 힘이 약한 기업에게 편법으로라도 전임자 임금을 얻어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김선수 변호사는 "노조 전임자는 법률로 강제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며 노사 간의 교섭에 의해 자치적으로 결정할 문제"라며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개입해야 할 영역과 자제해야 할 영역을 혼동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캠프의 경제 정책을 만드는데 참여했던 이종훈 명지대 교수는 "전임자의 수가 지나치게 많은 현실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라면서도 "당장 전면 지급 금지를 시행할 경우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노사관계 양극화'가 더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종훈 교수는 "13년 간 두 조항이 유예됐다는 사실은 '원칙이 무시됐다'고 인식할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우리 현실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원칙과 현실을 동시에 고려하는 균형적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복수노조 창구 단일화, 위헌 소지 있다"
공익위원안으로 나와 있는 복수노조 창구 단일화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우려가 제기됐다. 옳고 그름을 떠나 당장 위헌성 시비가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익위원안을 만든 이철수 교수 스스로도 "위헌 소지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토로에 김선수 변호사는 "복수노조 금지라는 위헌을 바로잡기 위해 복수노조를 인정하면서 강제로 교섭창구를 단일화하는 것은 또 다른 위헌적 제도의 도입에 불과하다"며 "이 교수는 이를 인정하면서도 정도를 굳이 피해가면서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교섭창구 단일화를 강제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되물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도 "위헌소지가 있는 창구단일화를 추진할 것이 아니라 소수노조의 교섭권을 보장한 상태에서 다수노조에게 어떤 당근을 줘 한 사업장에서 가급적 하나의 단체협약이 나오도록 유도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철수 "우리 헌법이 노동3권 고도로 보장…헌법 개정도 고려해야" 이날 이철수 교수가 "우리나라의 헌법은 노동3권을 매우 고도로 보장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도 눈길을 끈다. 복수노조 창구단일화가 위헌성 시비는 있으나 가장 적절한 대안이라는 것을 설명하다 나온 말이었다. 이 교수는 "미국은 단체교섭권이 법률적 차원에서 보장되기 때문에 입법자의 광범위한 법 형성권이 허용되나 우리는 헌법에 구체적으로 단체교섭권이 명시돼 있고 구체적 기본권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소수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기본권의 본질적 침해에 해당될 소지가 상대적으로 높다"며 이 같이 말했다. 이 교수는 "창구단일화가 ILO 기준에는 반하지 않지만 우리나라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을 제약하는 부분은 있을 수 있다"며 "사실 어떤 면에서는 탄력적 노사관계 형성을 위해서 헌법 개정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기성 한국노동연구원장이 최근 "헌법에서 노동3권을 빼는 것이 소신"이라고 말했다가 수차례 사과를 거듭한 것을 염두에 둔 듯, 이 교수는 "내 말은 (박 원장의 말과 달리 노사관계가) 더 잘 되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
"MB 노동 정책, '비전문가' 경제팀이 주도"
한편, 이날 토론회에서는 현 정부의 노동 정책을 경제 라인이 주도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우려가 쏟아지기도 했다. 이철수 교수는 "전임자 급여를 일체 지급하지 않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언론에 흘리는 등 정부의 행보의 배경에는 전문가인 노동부 말고 비전문가 부서, 즉 (노동에 대한) 아마추어 부서가 있는 것 아닌가 추측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일체의 금품을 지급하지 말라'는 것은 법 문구로도 적절치 않은데 이미 13년 전에 폐기된 주장이 다시 나온다"며 "그 생각의 출처가 노동부는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종훈 교수도 "이미 96년 말에 청와대 경제팀 주도로 날치기 통과를 했다가 심하게 되치기를 당했다"며 "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데 (현 정부의) 경제팀이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의 실리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김선수 변호사는 "노동부가 경제부처의 뒤치다꺼리를 담당하는 부처로 전락한다면 독자적인 존재 의의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참여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김대환 전 장관도 "정부가 겉으로는 하나지만 실제로는 하나가 아니"라며 목소리를 보탰다.
앞서 한국노총도 지난 8일 청와대의 윤진식 경제수석, 기획재정부 윤증현 장관 등을 거론하며 "이 정부 핵심 고위 관료들이 독재시절 봐 왔던 경제부처 마피아들의 행태와 다를 것 없이 행동한다"고 비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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