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세 권익위'에 '뇌사 인권위' 흡수 우려
▲ 국가인권위원회. ⓒ프레시안 |
권익위의 전신,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참여정부 시절인 2006년 법개정을 통해 대통령 직속으로 위상을 높이고 경찰과 군의 인권침해를 다루기 시작한다. 여의도 농민 사망 사건에 대한 인권위의 경찰청장 문책 권고에 심기가 불편해진 청와대가 대통령 소속 고충처리위에 경찰과 군 인권침해 처리 권한을 중복 허용한 것이었다. 국민고충처리위는 2008년 MB정부 출범 당시 국가청렴위원회와 행정심판위원회를 흡수해 직원 6백 명의 국민권익위원회로 확대 개편된다. 당시 새로 출범한 권익위는 총리실 산하 기구가 됐다.
특히 최근 들어 정권실세 이재오 전 의원이 위원장으로 취임해 거침없는 광폭행보를 선보인 덕분에 주가가 더 치솟고 있다. 끝 모르게 추락 중인 인권위와 정반대다.
안팎의 무소속 인권위 지킴이들은 이러다 인권위가 권익위에 흡수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물론 눈치 보지 않는 무소속 인권위의 완연한 퇴조와 임박한 퇴장에 속으로 쾌재를 부를 국가기관도 없진 않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법무부와 경찰이 떠오른다.
"'행정부 소속 인권위원장' 본색 드러나다"
하지만 인권위에 대한 상반된 평가나 기대와 달리 모든 관측통들은 현 위원장이 자격미달이라는 평가에서 일치한다. 국회운영위 속기록은 여당인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의 평가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청와대 소속 인권위원장'의 연이은 퇴행성 헛발질을 보다 못한 '국가인권위의 독립성 수호를 위한 법학교수모임'은 지난 7일 성명서를 발표해서 지난 2개월간 현 위원장이 보여준 무자격 행보를 낱낱이 적시하며 즉각 사퇴를 촉구했다. 할 일 많고 점잖은 법학교수들이 국가기관장, 그것도 법학교수 출신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촉구하고 나선 일은 지금까지 유례 없는 일이다. 인권위를 잘 아는 법학교수들이 보기에 최근의 인권위 사태는 그만큼 위중하다. 가장 대표적인 보기가 9월 18일자 현 위원장의 '인권위=행정부 소속' 국회발언이다. 현 위원장의 무책임한 발언으로 인권위는 졸지에 무소속 독립기관에서 행정부 소속기관으로 강등, 변질됐다.
현 위원장은 곧이어 행정안전부의 요구에 따라 9월 30일자로 별정직 과장 1인을 전격적으로 해임했다. 지난 4월 인권위의 직제가 행안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개편될 때 인사권자인 위원장의 전보명령을 받고 그에 따랐을 뿐인 간부직원을, 행안부가 '별정직은 전보의 대상이 아니라'며 해임조치를 요구하자, 현 위원장이 덥석 자른 것이었다. '행정부 소속 인권위원장'의 본색을 드러낸 어이없는 인사조치 앞에서 인권위 내부가 들끓기 시작한 건 너무나 당연하다.
정상적인 인권위원장이라면 당연히, '일방적 인력 감축으로 1차 피해를 준 행안부가 그에 따른 불가피한 인사이동을 이유로 2차 피해까지 떠안기는 건 도리에 어긋난다'며 행안부의 요구를 나무라야 정상 아닌가. '위원장이 징계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해임요구만큼은 절대로 들어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뿌리치고 무고한 제 직원을 감싸줘야 정상 아닌가. 백보를 양보해도, '이 문제는 일방적인 인권위직제개편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헌법재판소의 권한쟁의심판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기다려 달라'고 설득하며 버텨야 정상 아니냐 말이다.
이렇게 상식선에서 처신하는 대신 추석연휴 전날 느닷없이 해임통보를 날린 현 위원장에게 마음속의 충성과 존경을 바칠 조직구성원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실제로도 위원장의 사퇴를 실명으로 요구한 직원들의 글이 내부게시판에 올라왔다니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이처럼 현 위원장은 조직내부에서도 이미 신망을 잃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권위 직원들은 연일 자질시비를 불러일으키며 사퇴 요구에 시달려온 위원장 탓에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니기 어려운 터였다.
위원장에 등 돌린 인권위원들
▲ 현병철 인권위원장. ⓒ뉴시스 |
인권위원들도 똑같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 10월 1일 상임위원 전원(3인)은 현 위원장의 국회 발언의 배경과 취지를 추궁하고 행안부 요구에 따른 해임조치의 정당성을 따지기 위해 임시전원위원회 소집을 요구했으나 현 위원장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내부규정상 회의소집권자인 위원장이 응하지 않으면 임시전원위원회 소집을 강제할 길이 없다는 점을 현 위원장이 악용한 셈인데 이런 상황에서 고분고분 물러날 인권위원들은 없다. 현 위원장의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최근 행보에 고강도 비판과 우려를 함께해온 상임위원 3인과 비상임위원 4인(위원장 포함 총11인의 인권위원 중 무려 7인)은 바로 비공개위원간담회를 열고 공동대응책을 숙의했다는 후문이다. 10월 12일의 정례 전원위원회 회의가 기대되는 건 그 때문이다.
세상 물정 모르지 않고 점잖기 그지없는 다수의 인권위원들, 특히 날마다 위원장과 날마다 얼굴을 마주치는 상임위원 3인이 모두 취임 두 달 만에 위원장에게 등을 돌린 이유는 현 위원장이 보수적인 분이라서가 아니다.
그건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 성향과는 전혀 상관없다. 현 위원장의 인권전문성과 인권감수성이 떨어져서도 아니다. 그건 이미 알려진 것이고 새삼스러울 게 없다. 더욱이 조직내부에서는 지위를 막론하고 연세 드시고 기관장 자리에 있는 분한테 이런 걸 요구하지 않는다. 기관장에게는 이것이 부족해도 양심과 상식선에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다른 역할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문성 부족에 대해서는 머리를 빌려주며 덮어주는 방향으로 애쓰게 돼 있다.
생활밀착형 인권?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오직 하나, 현 위원장이 인권위의 기관장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정체성, 기본기, 학습자세를 갖추지 못한데다 앞으로도 변화가능성이 전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런 3무(無) 위원장이 애오라지 청와대만 바라보며 지난 8년간 애써 쌓아올린 무소속인권위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일에 앞장선다는 점이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 오죽하면 인권위원장인지 인권위점령군인지 분간이 안 간다는 불평이 내부에서 터져 나오겠는가.
요컨대, 현 위원장이 취임 두 달 만에 고립무원의 통치불능상태(ungovernability)에 빠진 건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청와대를 향해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불러대며 인권위의 역사와 인권의 속성에 반하는 언행을 일삼은 본인의 업보일 뿐이다.
국회에서 거듭 밝힌 것처럼 현 위원장은 인권위가 현재 "법적으로는 행정부 소속", 즉 대통령 소속이라고 믿는다. 이건 '사실상 행정부 소속'이라고 믿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최소한 법대로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 위원장은 이런 법적 소신에 따라 앞으로도 '청와대소속 인권위원장'으로 처신할 게 틀림없다.
즉, 노인 인권과 스포츠 인권 등 이른바 생활밀착형 연성인권에 치중하며 권력기관에 대해 불편한 진실을 외치고 일깨우는 인권위 본연의 권력감시 역할을 소홀히 할 것이다. 정권의 입장에서 껄끄러운 민감한 경성인권 사안에 대해서는 초동 단계부터 사무처 직원들의 손발을 묶고 입단속을 시킬 것이다. 이런 인권위가 왜 있어야 하나?
인권위와 권익위, 모호해진 경계
청와대의 눈치나 보는 '행정부 소속 현병철 인권위'가 '생활밀착형 인권'을 노래할수록 본래부터 생활밀착형 시민권익 보호가 본령인 국민권익위와 국가인권위간에는 구별과 경계가 약화될 터이다.
더욱이 적극적이고 욕심 많은 '총리실 소속 이재오 권익위'도 군과 경찰관련 진정처리권한을 통해 권력감시형 인권위의 경계를 넘나들며 양 기관의 구별과 경계를 허물 것이다. 이런 상호잠식과정을 통해 업무의 내용과 방식에서 구별의 실익이 엷어지면 두 기관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 이때 '생활밀착형 총리실 소속 권익위'와 '권력감시형 무소속 독립 인권위' 중 어느 기관이 눈앞에서 사라질지는 상상에 맡긴다.
불행하고 안타깝게도 현 위원장이 자리를 지키는 이상 인권위는 위에서 거칠게 묘사한 고사(枯死)경로를 밟아 머잖아 무대 밖으로 퇴장 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인권위 붕괴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행정부 소속 인권위원장'의 '생활밀착형 인권위'에 대한 내외부의 고강도 반발과 저항이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소속 인권위 지키려는 안팎의 움직임
볼썽사납고 다면적인 갈등과정을 거치면서 자칫 인권위 조직 자체가 시끄럽고 못된 조직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처럼 역풍과 낙인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소속 인권위 수호천사 인권단체들과 법학교수들은 비협조선언과 사퇴촉구를 끈질기게 밀어붙일 태세다.
마침 아시아국가인권기구민간감시단(ANNI)도 7일자로 국가인권기구국제조정위에 진상조사단 파견과 특별등급심사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내는 등 조직적 행동을 개시했다.
믿고 기댈 곳이라곤 사방 천지에 청와대밖에 없는 현 위원장은 자고나면 더욱 악화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겉으로는 뭐라고 둘러대도 속으로는 더더욱 청와대소속인권위원장의 자세를 가다듬으며 청와대의 신호와 주문을 집행하는 데 앞장설 것인가? 그럼으로써 개인의 보신과 영달을 위해 인권의 대의와 인권위의 독립성, 그리고 법학자의 양심을 저버릴 것인가? 그럼으로써 재임기간 내내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인권위를 시나브로 죽음으로 이끈 주범으로서 한국인권사의 불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것인가?
현병철 위원장이 명예 회복할 유일한 방법은…
임박한 파국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 현 위원장에게 마지막으로 호소 드린다. 무엇을 위해 위원장 자리에 연연하시는지 깊이 생각해보시면 좋겠다. 만약 쏟아지는 비난과 질타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직을 고수하는 이유가 인권의 보호와 증진을 위해서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없으시다면 훌훌 털고 물러나실 것을 간곡히 당부 드린다.
'처음엔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맡았는데 잠시 경험해 보니 내게 맞는 자리가 아니더라. 나로 인해 더 이상 인권위가 시비와 분란에 휩싸이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담담히 말씀하시고 표표히 떠나시라. 틀림없이 떠나시는 등 뒤로 감동의 박수갈채가 쏟아질 것이고 그 순간 모든 명예회복과 화해가 이뤄질 것이다. 현 위원장의 지혜로운 판단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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