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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이 이건희라서!"…대법원의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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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피고인이 이건희라서!"…대법원의 굴욕

[기자의 눈] "법원, 사법 불신 걱정하기 전에…"

"이거 왜 이래. 나 경제사범이야!"

주가 조작 세력을 다룬 영화 <작전>에 나오는 말이다. 영화가 끝날 무렵, 깡패 출신 주가 작전꾼은 자신에게 수갑을 채운 경찰에게 이렇게 쏘아붙인다. 물론, 이 대사가 영화 줄거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대규모 경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이른바 '범털' 취급을 받으며 큰소리치는 현실을 비꼰 것이다.

삼성 비리 덮어준 법원, 사법 불신 키웠다

사실인즉 그렇다. 경제 범죄에서는 죄가 클수록 사법부 판결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회삿돈을 빼돌려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조성한 재벌 총수가 제대로 된 처벌 없이 금세 풀려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그리고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대중의 믿음도 견고해졌다. 대신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서민의 잘못에 대해서는 추상같던 사법부가 재벌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다는 믿음이 뿌리내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역시 삼성이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집안의 비리는 언론이 감춰주고, 어쩌다 언론이 보도해도 검찰이 외면하고, 검찰은 수사해도 기소하지 않고, 기소가 이뤄져도 법원이 죄로 인정하지 않고, 법원이 죄를 덮어도 언론이 비판하지 않는 악순환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죄를 인정한다면서 처벌 접은 법원…'이건희 집행 유예'가 판결 기준?

▲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14일 오전 특검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을 마친 뒤 서초동 서울고법을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악순환에 새로운 고리가 하나 더 생겨나게 됐다. 법원이 죄를 인정해도 처벌은 하지 않는다는 것.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 등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 전 삼성 회장 및 고위 임원들에 대한 파기환송심 재판이 그 계기다. (☞관련 기사: 이건희 집행유예…"227억 원 배임이 '사회적 비난 가능성' 낮다니…")

14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이 전 회장 등이 배임죄를 저질렀다는 점을 분명히 못 박았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가법)에 따르면, 50억 이상 배임에 대해서는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을 선고할 수 있다. 그런데 재판부는 이 전 회장 등이 저지른 배임 규모를 227억 원으로 산정했다.

무거운 처벌이 뒤따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실제 판결 내용은 엉뚱했다. 아무런 처벌이 없었다. 재판부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이라는 1심 선고 내용을 그대로 유지했다. 1심 재판부는 배임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조세포탈 등에 대해서만 형(刑)을 선고했었다. 그런데 여기에 227억 원 배임죄가 더해졌는데, 형이 똑같다.

재판부가 이 전 회장 등이 저지른 배임에 대해 죄는 인정하되 처벌은 하지 않기로 했다는 뜻이다. 새로 인정된 배임죄에 대한 처벌이 추가되면, 이 전 회장은 집행 유예 대신 실형을 피하기 어렵다. 만약 대법원이 이런 고려 때문에 배임죄에 대한 처벌을 포기했다면 깜짝 놀랄 일이다.

법원의 '제멋대로 감경' 조치…대형 경제사범이 큰소리 치는 이유

하지만 다들 무덤덤한 반응이다. 법조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반응에는 이유가 있다. 한 특수부 검사 출신 변호사는 대형 경제사범이 처벌 받지 않는 현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대형 경제사범은 대개 법원의 형량 감경(減輕) 조치를 통해 처벌을 피한다. 형법에 따르면, 범죄의 정상(情狀)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을 때 법관의 재량으로 형을 줄여줄 수 있다. 이를 '작량감경(酌量減輕)'이라고 부른다. 대형 경제사범은 대개 사회적 지위도 높은 편인데, 이를 놓고 법원이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소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면 '작량감경'을 통해서도 실형을 면하기 힘들다. 이런 경우에는 법원이 '거듭감경'을 통해 실형을 피하게 해주곤 했다.물론, 이런 일이 법원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검찰도 한몫했다. 실제로는 자수하지 않은 피의자를 검찰이 자수한 것으로 처리해서 형이 감경되도록 해주는 일도 흔했다. 이른바 '자수감경'이다."

"대형 경제사범은 처벌 받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겨난 배경에는, 제멋대로 '감경' 조치를 남발했던 법관들이 있다는 지적이다. 사법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법원 역시 이런 지적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고무줄 양형' 막자"…대법원, '양형 기준안' 마련

그래서 나온 게 '대법원 양형 기준안'이다. 돈 많고 힘 있는 사람에게는 관대한 형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엄한 형이 선고되는 현상, 이른바 '고무줄 양형(量刑)'을 막기 위해 대법원이 지난 4월 확정한 기준이다.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마련한 기준안에는 배임·횡령 규모에 따른 형량이 꼼꼼하게 구분돼 있다. 배임·횡령 규모가 1억 원 미만, 1억 원에서 5억 원 사이, 5억 원에서 50억 원 사이, 50억 원에서 300억 원 사이, 300억 원 이상 등 다섯 단계로 구분돼 각각 다른 형량이 선고되도록 했다. 이처럼 잘게 구분한 것은 수백억 원대 배임·횡령을 저지른 사건에 대해 소규모 배임·횡령과 마찬가지 형량을 선고하곤 했던 관행을 막기 위해서다.

14일 판결이 나온 삼성SDS BW 헐값 발행 사건은 이 가운데 네 번째 경우, 즉 배임·횡령 규모가 50억 원에서 300억 원 사이인 경우에 속한다. '대법원 양형기준안'에 따르면, 이 경우에는 기본 형량이 징역 4∼7년이고 여기서 감경되면 2년6월∼5년, 가중되면 5∼8년이 된다. 회사 이익을 위한 경우 등이 감경요소로, 근로자, 주주 등 다수의 피해자를 발생시킨 경우 등이 가중요소로 각각 작용하게 된다.

'대법원 양형 기준안' 따르면, 이건희 실형 선고는 불가피

이 전 회장이 해당하는 배임죄 양형 기준에는 집행 유예 선고 기준이 별도로 마련돼 있다. 비슷한 전과가 있으면 집행 유예 선고가 어렵지만, 업체가 실질적으로 1인 회사나 가족회사면 집행 유예 선고가 가능하다. 또, 실질적 손해 규모가 큰 경우, 지배권 강화나 기업 내 지위 보전의 목적이 있는 경우, 진지한 반성이 없는 경우 등에 대해서도 집행 유예 선고를 하지 않아야 할 경우로 분류된다.

그런데 이 전 회장은 주주와 직원 등 다수의 피해자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삼성SDS는 1인 회사나 가족회사가 아니다. 이 사건은 특히 '지배권 강화나 기업 내 지위 보전의 목적이 있는 경우'라는 조건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게다가 '대법원 양형기준안' 마련 실무를 담당했던 판사들 역시 "50억 원 이상의 배임죄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실형을 선고하도록 했고, 피고인이 사회에 끼친 공헌 등과 같은 요소는 되도록 배제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대법원 양형 기준안'을 적용하면, 이 전 회장에게 집행 유예를 선고하기는 힘들다.

사법 권위 스스로 떨어뜨린 서울고법…"피고인이 이건희라서?"

그렇다면, 이 전 회장은 왜 집행 유예를 선고받았을까. 일차적인 이유는 이 전 회장이 '대법원 양형 기준안' 시행일인 지난 7월 1일 이전에 기소됐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공식적으로 '대법원 양형 기준안'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애초 '대법원 양형 기준안' 자체가 강제 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대법원 양형 기준안' 시행일 이후에 이 전 회장이 기소됐더라도, 기준안을 적용하지 않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다.

대법원이 규범적 기준에 불과한 '양형 기준안'을 굳이 마련한 것은 뿌리 깊은 사법 불신을 씻기 위해서였다. 시민이 사법부를 믿지 않는 일차 원인이 횡령, 배임, 뇌물 등 범죄에 대한 '고무줄 판결' 때문이라고 봤던 까닭이다. 하지만, 서울고법의 14일 판결로 '신뢰받는 사법부'를 향한 법관들의 꿈이 녹아 있는 '대법원 양형 기준안'은 모양새가 우스워졌다. 피고인이 이건희 전 회장이 아니었더라도, 이런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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