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명의 철거민 희생자의 시신은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서울 순천향대병원의 냉동고에 있다. 유족, 철거민, 이들을 돕는 시민은 날마다 참사 현장 앞에서, 그리고 수시로 유관기관을 방문해 사과와 해결책 마련을 촉구하지만 정부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행세만 할 뿐이다.
이런 가운데서 용산의 재개발 조합과 시공사는 하루속히 공사를 진행하겠다는 태세다. 문정현 신부 등 참사 현장을 지키는 철거민과 시민들은 날마다 용역업체 직원의 시비를 상대해야 한다. 다섯 달 전과 비교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셈이다.
문화예술인이 이 같은 용산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연재를 시작한다. 6·9 작가선언 모임을 비롯해 작가, 미술가, 만화가, 사진가 등으로 구성된 '용산참사와 함께 하는 예술가들' 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용산 참사에 대한 자신의 에세이를 풀어낼 예정이다. <편집자>
1. 사람들은 나를 '남일당'이라 부른다. 간혹 '남일당 건물'이라 길게 부르는 이도 있다. 내 이름을 길게 부르는 이들이 줄여서 부르는 이들보다 더 친절하거나 하진 않다. 그건 그냥 성격일 뿐이다.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도선생'하고 약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악센트까지 넣어서 '뾰도오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키'라고 풀네임으로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는 법. 그와 비슷한 이치이다. 원래의 내 이름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지난 1월20일부터 '남일당'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내 몸의 1층에 있던 점포가 '남일당 금은방'이었는데, 그 이름이 고유명사화 되었기 때문이다. 하긴 죽어서 영혼만 떠도는 판에 그깟 이름에 얽매여 무얼 하겠는가. 나는 시커멓게 타들어간 숨구멍을 드러낸 채 버려진 내 시신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나를 잊지 않고'남일당'이라 불러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1985년 8월24일에 태어났다. 무더위가 한풀 꺾였던 그날, 사람들은 나의 탄생을 환영했다. 그로부터 23년 반이 지나 억울한 죽임을 당하던 2009년 1월20일 나는 한물간 구닥다리 건물로 홀대를 받았다. 그러나 태어나던 당시에는 실용적인 건물이라 나를 칭찬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중후하게 늙어가는 건물들이 많았다. 용산 4구역은 일제시대인 1920년대 무렵부터 시가지가 형성된 곳이다. 개 중엔 1945년 해방을 기억하는 할아버지 건물도 있었고, 자유당 독재와 4.19와 유신독재를 겪어낸 아저씨 건물도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나는 아는 것은 없고 외양만 번드르르한 애송이였다.
내가 태어난 직후부터 많은 사람들이 내 몸을 들락거렸다. 그것이 존재이유인 나는 당연히 기뻤다. 그러나 솔직히 재미는 없었다. 내 몸에 입주한 점포들이 대부분 사무실과 병원과 기원과 학원이었기 때문이다. 음식점과 탁구장이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신나게 탁구공을 때리는 학생들을 보거나 밥상머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세상사를 듣는 일은 흥미로웠다. 내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사람들의 표정은 대부분 어둡고 무거웠다. 간혹 국방색 군복을 입은 전투경찰들이 닭장차와 함께 거리를 장악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재채기를 하거나 마스크를 하고 지나갔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몇 명이 '파쇼타도'라는 제목의 전단을 골목에 살포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기원이 나간 자리에 호프집이 생겼는데, 그곳 손님들의 대화를 듣는 게 그것이었다. 호프집은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단골이었지만 간혹 대학생들도 왔다. 한번은 넥타이를 맨 직장인과 대학생이 말다툼 끝에 주먹다짐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그들은 독재가 어쩌니 민주화가 어쩌니 언성을 높이다가 다른 한 사람이 말려서 겨우 싸움을 중단했다. 말린 사람이 분위기를 누그러뜨린답시고 했던 농담이 이랬다.
"이심전심이 뭔지 알아? 이순자가 심심하니 전두환도 심심하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농담을 던져도 무겁게 받아들이는 게 당시의 세태였다.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준 것은 바로 마이클 잭슨이었다. 나는 마이클 잭슨의 곡을 그때 처음 만났다.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이 호프집 실내에 퍼지고 있었다. '빌리진, 낫 마이 러브' 그 가볍게 반복되는 리듬이 나는 흥겨웠다. 내가 인간이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신나게 엉덩이라도 흔들 텐데.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까지 들었다.
어느 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독재타도'를 외쳤다. 1987년 6월. 나는 사람들이 역사를 바꾸는 현장을 용산 4구역 큰길가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의 외침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나도 그들과 함께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건 그로부터 10여 년이나 지나서였다. 성에는 차지 않지만 "그래도 정권을 바꿨다"고 즐거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한때나마 사람들은 밝고 희망적으로 보였다. 그들이 다시 어둡고 절망적으로 보이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건물들의 세계는 평화로웠다. 호프집은 고기집으로 바뀌었고 고기집이 커피숍으로 바뀌었고 커피숍이 사무실과 술집과 요가학원으로 바뀌었다. 술집에 오는 사람들은 정치 얘기를 하며 여전히 싸움질을 했다. 그렇게 1980년대와 1990년대는 흘러갔다.
▲ 남일당 건물과 그 뒤편으로 보이는 명품 주상복합 아파트 ⓒ프레시안 |
2. 내가 레아와 말을 섞은 게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내 옆에, 그러니까 대로변에서 바라보면 내 뒤쪽에 세련된 포즈로 서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도 같고 내가 태어난 이후에 있었던 것도 같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은 죽기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만큼 우리 건물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인간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도 벅차기 때문이다.
레아의 몸에는 '퓨전호프&바 레아 용산점' 하나만 달랑 들어와 있었다. 나는 그게 심심해 보이는 한편으로 부러웠다. 당시 내 몸에 입주한 상점들은 무척 많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지하의 'J&B 프리미엄바'를 비롯해 '트레비소주방', '독도참치', '금력기공세계홍보원', '신용산치과', '세무사사무소', '흑생맥주전문점'. 물론 나는 부러움보다는 자부심을 훨씬 많이 느꼈다. 사람들이 내 몸을 빌려 생활을 영위하고 자식들을 교육시킨다면 나는 건물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다. 그것만큼 내 존재의 이유를 확고히 하는 것도 없을 터였다. 레아는 나와 달랐다. 그녀는 좀 댄디한 스타일이었다. 한 개의 술집에서 볼 수 있는 풍경만으로도 삶이 충만한 모양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고고한 독신주의자쯤 될까. 그렇게 도도하던 레아가 어느 날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알고 있어? 우리도 이제 파리 목숨이야."
그녀는'퓨전호프&바 레아' 술꾼들의 대화를 엿들은 눈치였다.
"무슨 말인데? 난 아직 쌩쌩한 걸. 최소한 앞으로 20년은 더 살 수 있어."
"넌 정말 깜깜이구나. 이 지역이 모두 재개발지역이 됐어. 벌써 철거가 시작됐다구."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철거라니. 그건 아직 수명이 다하지 않은 우리의 몸을 망치와 곡괭이, 포클레인과 불도저로 무자비하게 해체하는 일이 아닌가. 나는 그날 깨달았다. 결국 우리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을 운명임을. 조마조마 가슴을 졸이며 1년을 지냈다. 그리고 1월19일 아침, 내 머리끝으로 철거민들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고, 곧 그들의 딱한 처지에 깊이 공감했다. 그들 중엔 내 안에서 장사를 하던 이들도 있었다.
"넌 가게 감정가 얼마 나왔냐? 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얼만디요?"
"내가 지하하고 일층서 삼층까지 인테리어 하는데 일억이 들었다. 권리금은 몇 억이고. 근데 사천만 원 받고 나가란다."
"허, 날강도가 따로 없네요."
"말도 마세요. 저는 권리금 사천에 보증금 삼천이었는데, 천삼백만 원 준다대요. 조합 가서 그랬어요. 그 돈으로 용역이나 많이 사라고, 나는 투쟁이나 하겠다고."
두 남자의 대화에 사십대의 아주머니가 끼어들었다.
"저는 도서대여점하는데요, 한 번 둘러보더니 책들이니까 차에 실고 나르면 되겄네. 그 걸로 끝이에요. 철거용역들이 얼마나 협박을 해대는지 밤에 다니기도 무서워요. 지난 번에는 집에서 안 나간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도록 패는데 경찰들은 뻔히 보고만 있더라구요."
"우리 같은 세입자는 사람도 아닌께. 임시상가도 안 마련해주고 그 돈으로 어디 가서 장사를 하란 말이여?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순 없응께."
그들은 그렇게 내 머리 끝, 옥상에 올랐다. 그곳에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망루를 설치했다. 옥상에 망루를 설치한지 하루도 안 돼 경찰차와 철거용역들이 빙 둘러 포위했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나보다 내 몸을 들락거리던 그들, 내 머리 꼭대기에서 저항하는 그들이. 그들은 바로 내 몸에서 희망을 키우고 꿈을 키우던 이들이었다.
옆에 있던 레아는 나보다 더 분노했다. 그녀가 우리 건물들만의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건물만도 못한 인간들. 어떻게 무조건 내쫓고 안 나간다고 폭력을 휘두르고 협박하고 최소한 살게만 해달라는 요구를 뭉개버릴 수 있지?"
나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망루에서의 투쟁이 성공하길 바랐다. 간절한 바람과 이루어지지 않았다. 투쟁은 만 하루도 못 돼 진압되었다. 용역깡패들의 행동은 무식했고, 경찰특공대의 진압은 무자비했다. 내 몸뚱이는 물론이고 망루에 올랐던 다섯 사람의 몸 또한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였다. 여명이 차오르던 새벽, 불길 속에 죽어가던 내게 사람들의 절규와 비명이 들려왔다. 그건 내가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는 무섭고도 처절한 절규였다.
▲ ⓒ프레시안 |
3. 그 날 아침이 지나고 내 육체는 처참한 몰골로 지금껏 도로변에 방치돼 있다. 주검의 일층, 그러니까 '남일당 금은방'이 있던 곳엔 나와 함께 이승을 떠난 다섯 명 철거민들의 분향소가 차려져 있다. 이제 그들 다섯 명의 영혼은 모두 나와 친구가 되었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무생물이건 죽으면 모두 친구가 된다. 육체를 떠난 영혼은 서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해방된 영혼들은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 각자 한 개의 별이 된다.
그럼에도 내가 떠나지 못하듯 그들 다섯 명의 영혼 또한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그들은 언제나 이곳 용산 4구역 일대를 서성거리고 있다. 그들이 떠도는 허공 아래에 가족들, 동료들이 벌써 7개월째 분향소를 지키고 있다. 그 동안 신부님들이 "용산참사 해결하라"며 단식도 했고, 농성도 했고, 매일 미사도 드렸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뜻있는 사람들이 분향소를 찾았다. 간혹 내 주검을 사진기에 담아 가는 이도 있고, 타다 만 껍데기에 매직펜과 붓으로 뭔가를 적고 가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도도했던 레아. 그녀의 몸에는 시민활동가들이 드나들고 있다. 불과 1년 전, '퓨전호프&바 레아 용산점'이 있던 2층에는 용산참사 해결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의 사무실이 있다. 과거의 도도하던 그녀는 지금 없다. 그녀는 겸손하고 따뜻한 어머니와 같은 건물로 변신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1층 방에서 쉬고 2층 방에서 회의를 하고 3층 방에서 잠을 잔다. 미술가들이 와서 그녀의 1층에서 전시회를 열고 연극인들과 가수가 와서 그녀 앞에서 공연을 한다. 그들이 자신을 찾고 자신의 몸에 드나드는 걸 그녀 또한 좋아하는 것 같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작가라는 사람들이 내 주검과 가까운 술집에서 대작을 벌였다. 그 중 한 명이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근데 도심테러리스트가 당최 말이 되는 조어냐?"
"그러게. 도심테러리스트면 꼭 도심에서만 테러해야 하는 거여? 변두리에서 테러하면 테러리스트 자격 박탈이여?"
"그럼 농촌테러리스트나 어촌테러리스트나 두메산골테러리스트도 있겠네."
그들은 농담 따먹기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또 한 명이 경기라도 일으키듯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니까 할 거냐고 말 거냐고 응?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고 응?"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또 다른 작가들이 이번에는 술집이 아닌 용산 4구역 거리에 나타났다. 둘씩 짝을 지어 내 주검과 레아의 몸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용산참사 해결하라'는 피켓과 보드 등을 들고 한 달 가깝게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세상을 바꾸는 희망이다. ⓒ프레시안 |
4. "일당이 왔냐?"
"일당이가 누군디?"
"야가 일당이잖여. 성은 남, 이름은 일당."
나의 친구들이 왔다. 그날 나와 함께 억울하게 죽은 다섯 열사의 영혼. 고 이성수 님, 고 윤용헌 님, 고 이상림 님, 고 양회성 님, 고 한대성 님. 우리는 다 같이 내 주검과 레아와 무자비하게 헐리고 스러지는 용산4구역 위의 허공을 난다.
친구들은 자신들을 못 잊는 그들의 가족을 오히려 더 걱정한다. 그들에 대한 걱정과 원통함으로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저들 유가족들이 슬픔을 딛고 원통함과 분함을 씻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날, 그들은, 그리고 나는 비로소 우주 저편으로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무슨 소리인가. 어디선가 흥겨운 노래 가락이 들려온다. '빌리진, 낫 마이 러브'. 그렇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들었던 바로 그 노래. 틀림없는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이다. 내 주검 반대편에 있는 대형 옷가게에서 틀어놓았다. 사람들이 새삼 그의 노래를 감상하는 건 그가 얼마 전에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팝의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문득 나는 헷갈린다. 지금이 내가 죽고 난 2009년인지 내가 태어난 1985년인지 말이다. 그때 사람들은 '독재'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는데, 요즘 사람들도 그렇다. 그때 전경차와 경찰들이 거리를 메웠는데, 지금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때도 경찰들이 걸핏하면 시민들을 적으로 간주했는데, 지금도 그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또한 거리에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이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러나 나와 친구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는다. 실망하기엔 너무 이르다고 서로를 위로한다. 내 주검과 레아의 몸을 찾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는 한 나와 친구들은 외롭지 않다. 언젠가 반드시 우주 저편으로 날아갈 것을 우리는 믿는다. 언젠가 편안한 마음으로 그만 가족들을 돌려보낼 수 있음을. 마침내 우리가 한 개 별이 될 수 있음을.
지금 저기, 내 주검 맞은편 버스정류장에서 누군가 또 걸어오고 있다. '용산참사 해결하라'는 피켓과 전단을 든 평범한 시민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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