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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 그 후 30년…재판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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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 그 후 30년…재판은 시작됐다

[곽노현 칼럼]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과거청산, 과거와 현재 ①

킬링필드. 문자 그대로 학살의 현장이었던 섬뜩한 들판. 캄보디아 전역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500개를 훌쩍 넘는다. 영화 '킬링필드'의 제목도 그래서 'Killing Fields', 복수형이다. 내가 가본 곳은 프놈펜에서 가장 가까운 쳉학의 킬링필드. 프놈펜 서쪽 14㎞ 떨어진 이곳에선 높이 치솟은 흰색 위령탑과 제노사이드 기념관이 방문객을 맞이하며 아픈 과거사를 일깨운다.

시원한 스콜을 예고하는 마른 천둥소리도 들리지 않는 5월초 오후. 열대의 뜨거운 햇살은 주변의 풍경을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적인 그림처럼 축축 늘어뜨리며 순간정지 모드로 고정시켰다. 뚤 슬랭 수용소의 희생자들이 높은 장대에 거꾸로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하며 바라봤던 뒤집힌 세상도 다르지 않았을 터.

생지옥의 당시에도 무심한 초목들은 지금처럼 열대 특유의 진하고 화려한 꽃을 피웠으리라. 뚤 슬랭 수용소를 나와 죽음의 벌판으로 향하던 그날에도 오늘처럼 햇빛이 강렬하고 구름은 높았으리라. 세상과 서러운 작별인사를 나눈 뒤 문득 눈에 들어온 수용사동 담벼락의 순백 철쭉꽃은 그때에도 순간의 구원을 선사했으리라.

그날따라 킬링필드의 큰 구덩이들에는 유난히 나비가 많이 날았다. 수송트럭에서 내려 마지막 죽음의 행진을 하면서도 나비의 꿈을 내려놓지 않았던 30년 전의 원혼들이 환생하여 훨훨 날아다니는 것일까. 아니면, 부모와 함께 끌려와 죽은 아이들의 넋이 아름다운 날개를 달고 돌아온 것일까.

▲ 지난 5월 쳉학의 킬링필드 기념관에서 기도하며 울고 있는 캄보디아인. ⓒ로이터=뉴시스
진실로 인간의 악과 잔혹함에는 끝이 없으나…

프놈펜 시내의 중고등학교를 개조한 뚤 슬랭 수용소는 현재 인권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된다. 여기에 전시된 증명사진 속의 수천 명 피해자들은 저마다 4월의 햇살보다 더 뜨거운 눈빛으로 소리 없는 함성을 외치고 있었다. 저항의지가 얼굴 가득 드러난 용감한 투사들의 강렬한 시선과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천진한 아이들의 겁먹은 시선은 차마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다.

문득 피카소의 명화 '게르니카'가 떠올랐다.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왕당파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초토화된 작은 도시 게르니카. 소식을 접한 피카소가 마음의 눈으로 아비규환의 순간을 묘사한 대형화폭에는 소리 없는 비명과 절규가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득하다.

그림 속의 게르니카에서는 사람과 자연의 고통이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목을 비틀며 비명을 지르는 황소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현실속의 쳉학에서는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창자가 튀어나오며 머리통이 깨어졌을 터. 진실로 인간의 악과 잔혹함에는 끝이 없으나, 인간의 선과 사랑에도 끝이 없는 건 그 덕일 것이다.

시대착오적 이상주의자들, 크메르루주

크메르루주. 프랑스와 미국 등 제국주의적 외세에 항거한 크메르루주는 공산주의자에 앞서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과거 9세기에서 14세기까지 오늘날의 태국과 라오스 영토까지 지배하며 앙코르 와트의 영광을 구현했던 동남아 맹주, 크메르 제국의 후예를 자처했다. '크메르' 루주는 그래서 붙은 이름이다.

루주는 물론 빨간 색을 뜻하는 불어다. 폴 포트, 큐 삼판, 엥 사리 등 크메르루주의 최고지도자들은 대개 프랑스에 유학 중 공산주의를 학습하고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 식민지 조국에 돌아와서 캄푸치아 공산당을 조직한 열혈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크메르 '루주'로 불리는 이유다.

크메르루주의 지도자들은 마르크스의 비전과 정반대로 자급자족형 농경공산주의를 꿈꾼 시대착오적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의 손발이 돼 전국의 '뚤 슬랭'과 킬링필드에서 고문과 잔혹행위를 일삼던 간부와 병사들 역시 군사정권의 압제와 제국주의의 수탈에 눈 떴을 뿐 평범하고 순박한 농촌청년들이었다.

1975년 4월 중순에서 79년 1월 초까지 폴 포트의 4년 집권기간 중 캄보디아 전역은 창살 없는 수용소로 개조됐다. 국제사회와 철저하게 고립된 섬이었다. '수용소 군도'에서는 끔찍한 '살인기계'가 돌아갔다. 구체제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와 새 사회에 대한 단순무모한 구상이 공포와 죽음이 일상화된 무법천지를 불렀다.

"폴 포트는 중국 문화혁명보다 더 나갔다"

크메르루주 기간의 참혹상은 홍위병이 날뛴 문화혁명의 그것을 훨씬 능가했다. "폴 포트는 중국 문화혁명보다 더 나갔다. 문화혁명 4인방이 한 걸음 앞섰다면 폴 포트는 열 걸음 앞섰다." 지난 4월 29일 쳉학 킬링필드로 가는 정거장, 뚤 슬랭 감옥의 책임자 두치는 크메르루주 법정에서 양자의 관계를 이렇게 진술했다.

그랬다. 한 예로 크메르루주는 화폐경제와 결별을 선언하고 그 상징으로 중앙은행을 폭파했다. 방 안 가득 흩뿌려진 지폐더미를 군화발로 밟은 채 호탕하게 웃는 한 병사의 유명한 흑백사진이 당시를 말없이 증거한다. 크메르루주는 또한 불과 1주일 만에 인구 200만의 프놈펜을 인구 2만의 유령도시로 껍데기만 남긴다. 시골로 강제이주한 도시민 다수는 비참하게 생활하다 영양실조로 죽는다.

영(零)년(Year Zero). 크메르 루지는 외세의 영향에서 벗어나 캄보디아 사회를 역사의 원년, 즉 영년으로 되돌리려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세운 '민주캄푸치아'가 위대한 크메르인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영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구호에 담긴 집단적 광기는 온갖 야만을 불러냈다. 이 시절의 캄보디아는 문자 그대로 문명의 영년으로 돌아갔다. 물자도, 인력도, 전력도, 공장도, 점포도,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불과 4년의 크메르루주 치하에서 900만 캄보디아 인구는 700만으로 급격하게 줄었다. 이중에서 전국 각지의 킬링필드에서 무참하게 살육 당한 사람은 40~50만으로 추정된다. 100만 넘는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 굶주려 죽고 의약품이 없어 죽지 않을 병으로 죽었다. 이런 끔찍한 사정을 바깥세상은 새까많게 몰랐다. 이 시기 '민주캄푸치아'는 안팎의 빛이 모두 꺼진 공포의 암흑천지였다.

비명소리를 덮으려 라디오를 틀던 감옥

믿어지지 않겠지만 폴 포트의 4년 치하를 살아남은 의사는 모두 53명. 그나마 판검사, 변호사, 법학교수 등 법률가는 다 살해되고 고작 7명이 살아남았다. 흔히 말해서 안경 낀 사람들과 대학 나온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목숨을 잃었다. 사람 목숨이 깃털처럼 가벼웠으며, 도무지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뚤 슬랭 수용소에서는 1975년에 154명, 76년에 2250명, 77년에 2350명, 78년에 5765명의 수용자들이 살아서 들어와 죽어서 나갔다. 이 숫자에는 부모를 따라 들어와 죽어나간 어린이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정치범은 6~7개월, 이른바 잡범은 서너 달 만에 처형됐다.

뚤 슬랭 감옥에서 폴 포트 정권의 장차관 출신 등 거물 정치범은 가로 6m, 세로 4m 크기의 널찍한 1인 독방에 수감됐다. 조그만 철제침대와 오물처리용 네모철통이 비품의 전부였다. B급 정치범들은 가로 80cm, 세로 2m 크기의 아주 작은 1인용 벽돌사방에 수용됐다. 반면 일반 잡범들은 건물 위층의 큰 방에 40~50명씩 수용해 문자 그대로 겹겹이 칼잠을 재웠다.

뚤 슬랭 감옥과 쳉학 킬링필드에선 하루 종일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크메르루주들도 이런 작업 환경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큰 나무에 스피커를 매달아 하루 종일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작업'했다. 이런 내용의 안내판이 붙어있는 몇몇 나무 앞에 서면 지금도 그때의 뒤엉킨 소리들이 아스라이 들리는 듯하다.

참극 후 30년, 재판이 시작됐다

하지만 일찍이 김민기가 꼬집은 것처럼 "전쟁터엔 죄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난 겁쟁이라서 명령을 집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 그랬다." 인간백정으로 불리던 뚤 슬랭 수용자의 책임자 두치는 4월부터 시작한 첫 역사적 재판에서 자신의 잘못을 폴 포트 등 윗사람의 명령 탓으로 돌리며 발뺌하기 바빴다.

다행히 두치는 최근 법정진술에서 "결과적으로 모든 종류의 범죄, 특히 중범죄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다. 감옥의 존재도 몰랐다는 투로 모든 혐의를 딱 잡아떼던 두어 달 전에 비하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사실 두치는 뚤 슬랭 감옥의 책임자를 넘어 전국 각지의 수용소를 지휘, 감독한 S-21보안국의 책임자를 겸한 실력자였다.

▲ "유엔과 긴 줄다리기 끝에 간신히 두치를 크메르루주 재판소의 법정에 세운 건 다시 10년이 흐른 2009년. 그렇다면 폴 포트 정권이 무너진 1979년부터 지금까지 킬링필드의 주범들이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두치의 재판이 열리고 있는 크메르루주 법정. ⓒ로이터=뉴시스

무자비한 숙청작업의 현장책임자로서 폴 포트 정권의 악마적 얼굴의 대변자인 두치가 명백한 혐의조차 부정하고 책임전가를 일삼는 가장 큰 이유는 무려 3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간신히 국제사회의 크메르루주 재판이 시작한 데 기인한다. 두치 입장에서는 제1인자 폴 포트가 이미 죽어 없고 다른 동료들도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자신만 악마로 몰리는 건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태국 접경지역에서 개명과 개종을 통해 다른 사람으로 조용히 살던 두치를 캄보디아 정부가 잡아들인 건 1999년. 크메르루주가 다시 밀림으로 도망간 후 20년이 흘러서였다. 유엔과 긴 줄다리기 끝에 간신히 두치를 크메르루주 재판소의 법정에 세운 건 다시 10년이 흐른 2009년. 그렇다면 폴 포트 정권이 무너진 1979년부터 지금까지 킬링필드의 주범들이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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