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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명품 헌법, 이라크 신헌법을 주목하라"

[곽노현 칼럼] 한국이 참고할 만한 이라크 헌법 사항과 규정

비교헌법 연구를 할 때 헌법학계와 정치권에선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 헌법을 참고대상으로 삼게 마련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구가해온 선진국들은 새로운 시대의 헌법적 요구를 성문헌법 개정절차 대신 심층적인 헌법해석을 통해서 수용하기 때문에 헌법전 자체는 오히려 구닥다리 냄새가 나는 게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나라의 1987년 헌법이 오히려 훨씬 선진적이고 진취적이다. 헌법사항이 더 많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치한 헌법해석학과 풍부한 헌법법리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의 성문헌법 텍스트에선 참고할만한 내용이 거의 없다.

반면 오랜 기간 내전과 독재에 시달리다 정치적 격변기를 거쳐 마침내 체제전환기에 들어선 개도국들이 만들어낸 신헌법에는 참고할만한 내용이 적지 않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는 필리핀, 한국, 브라질 등 많은 나라에서 질풍노도와 같은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며 신헌법제정에 나선 시기였다. 이어서 1990년대에도 남아공의 인종분리체제 극복과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붕괴로 많은 신헌법이 등장했다. 한마디로 비교헌법의 풍경은 1990년을 전후해서 많이 변했다.

체제전환기 국가의 헌법과 국제인권조약

1980~90년대의 신헌법 중 남아공의 만델라 헌법은 국제인권법의 적극수용과 사회경제권의 적극인정으로 유명하다. 아시아에서는 필리핀이 민중의 힘(people's power)으로 마르코스 독재체제를 무너뜨린 후 1986년에 제정한 아키노 헌법이 참고가치가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최초로 헌법기관으로 만들어낸 게 좋은 보기다. 동구권의 신헌법들은 기존체제를 전면 부정하며 다소 좁은 이데올로기 지평 속에서 성급하게 만든 탓인지 눈에 띄는 내용이 빈약하다.

비교헌법적 참고가치로 볼 때 체제전환기의 최신 헌법들만큼 중요한 것이 1970년대 이후의 국제인권조약들이다. 1950년대에 제정된 전쟁범죄 관련 제네바조약들과 1919년 이래 계속해서 제정돼 온 노동기준관련 ILO협약들 외에 구속력을 가진 국제인권조약으로는 1966년에 성안되어 1976년에 발효한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 처음이다.

유엔은 그 후 인종차별, 고문방지, 여성차별, 아동인권, 이주노동자인권, 장애인권, 강제실종방지 등 특정 대상과 주제별 국제인권조약을 차례로 만들어내며 종전의 국민국가 헌법시대와 구별되는 국제인권법 시대를 개막한다. 유엔은 위에서 언급한 다자간조약형식의 국제인권조약 외에도 수용자, 정신장애인, 기업인권 등 다양한 집단과 주제에 대해 선언, 원칙, 규칙, 지침 등 다양한 형태로 국제인권규범을 선보인다. 현대의 비교헌법 연구에서는 세계헌법의 기본권편이라고 할 수 있는 유엔의 각종 국제인권규범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시대정신 담은 이라크의 신헌법

헌법개정 논의에서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건 국가의 최고법인 헌법의 형식과 권위로 규율해야 할 헌법사항을 정하는 일이다. 헌법사항은 국가공동체의 역사적 경험과 오늘날의 시대상황에 비춰볼 때 최고의 중요성을 가진 사안이어야 한다. 각 헌법사항에 대한 헌법규범 역시 역사의 교훈과 시대의 정신을 배경으로 범국민적 합의가 형성된, 최상의 법원칙이어야 한다. 요컨대 헌법사항으로 국가공동체 기본틀의 구성요소를 특정하고 그에 대한 헌법규범으로 국가공동체의 가치지향과 기본원칙을 특정한다.

최근 제정된 신생헌법에는 최근의 시대상황과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새로운 헌법사항과 헌법원칙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라크의 신헌법이 특히 그렇다. 이라크는 2005년 1월 30일 제헌의회를 구성하여 새 헌법초안을 마련한 후 2005년 10월 15일 국민투표로 확정했다. 2005년 신헌법에서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건 무려 11개의 독립위원회 설치를 직접 규정하고 나아가서 법률제정에 의한 독립위원회 추가신설을 허용하는 제4장(독립위원회)이다.

신헌법이 예정한 독립위원회 중에서는 전통적인 선거관리위원회 외에도 인권고등위원회(High Commission for Human Rights), 청렴위원회, 중앙은행, 감사원, 통신미디어위원회(Commission on Communications and Media)가 주목할 만하다. 독립위원회 각각에 대한 헌법규정은 비교적 단출하다. 인권위, 선관위, 청렴위에 대해서는 국회의 감시(monitoring)를 받는다고만 규정할 뿐 소속을 규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국가인권위처럼 무소속 독립위원회인 셈이다.

모든 독립위원회가 무소속인 건 아니다. 어떤 위원회는 국회 소속(attached)이고 어떤 위원회는 내각 소속이다. 한편, 중앙은행은 국회의 감시를 받는 대신 국회에 책임을 지는 무소속기관으로 상정돼 있다. 그러나 모든 독립위원회는 소속여하를 불문하고 직제와 재정의 독립성, 이른바 기능적 독립성을 보유한다. 독립위원회 각각의 구체적 모습은 별도의 법률로 정하도록 규정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라크 신헌법이 독립위원회들이 현대국가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로서 제4부를 구성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독립위원회 위헌론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라크 신헌법에서 눈을 잡아끄는 요소는 그밖에도 군대, 정보기관, 테러리즘,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인종청소, 인신매매, 생물종다양성, 주거복지, 복수국적, 시민단체 등을 헌법사항으로 삼은 점과 그 규정내용들이다. 예컨대, 정보기관에 대해서는 내각소속으로 하되 민간인을 수장으로 삼고 의회감독을 받아야 하며 그 활동이 인권원칙에 부합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정보기관의 임무는 물론 국가안보 위협활동에 관한 정보수집과 평가임무로 한정된다.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자국 영토가 테러리즘의 기지, 통로, 무대로 활용되는 것을 금지하며 핵무기와 생화학무기에 대해서는 개발, 생산, 수송, 사용을 금지하고 비확산정책을 지지한다.

▲ 2005년 10월 15일(현지시간) 바그다드 시내 사드르시티에서 이라크 헌법안 찬반 국민투표 투표함을 개봉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눈에 띄는 신헌법의 내용들

신헌법상 이라크는 대통령과 부통령을 두지만 100% 내각책임제로 운영되는 연방제국가다. 대통령은 의회가 선출하는 국가원수로서 별다른 실권이 없다. 대통령의 권한으로는 조약비준, 법률공포, 임시국회 소집, 대통령령 제정, 사형승인, 특별사면 등이 열거돼 있다. 행정부 수반의 지위와 군통수권자의 지위는 국무총리가 갖는다. 국무총리는 내각 지휘권과 회의주재권, 그리고 장관해임권을 갖는다. 그러나 실체적 행정권한은 국무총리가 아닌 내각에 속한다. 헌법은 집행권은 국무총리가 아닌 대통령과 내각에 있다고 못 박는다. 전형적인 내각책임제인 것이다.

조각권을 행사할 국무총리 내정자는 의회 제1당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지명한다. 조각명단은 국회의 신임투표를 거쳐 재적과반수의 찬성으로 확정된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재적 1/5은 국회에 국무총리 불신임을 요구할 수 있다. 국무총리 불신임이나 내각불신임이 재적과반수로 결의되면 내각 전체가 사임한 것으로 본다. 이 경우 30일 이내에서 다시 의회 제1당이 조각을 완료해야 한다. 이것이 안 되면 대통령이 개입한다.

의회의 인사동의권이 몹시 넓은 점도 눈에 띈다. 이라크 의회는 행정각부의 장관은 물론 차관, 독립위원회의 위원장, 정보기관장, 대사, 군 참모총장과 차장, 그리고 사단장급 이상, 연방고등법원장과 고등법원판사, 검찰총장, 사법감시위원장에 대해 임명동의권을 행사한다. 의회 다수당이 고위 정무직을 차지하는 내각책임제에서 의회의 인사통제가 이 정도라면 우리나라와 같은 대통령책임제에서는 더 강해도 무방할 것이다.

의원내각제에서 당연한 얘기지만 국회는 재적과반수의 찬성으로 행정각부의 장관을 불신임할 수 있다. 재적과반수의 찬성으로 독립위원장을 해임하는 것도 가능하다. 국회는 국무총리의 요구와 대통령의 동의가 있을 때 혹은 재적 1/3이상 국회의원의 요구가 있을 때 재적과반수의 찬성으로 해산가능하다. 이 경우 60일 이내에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

검찰의 중립성 확보 가능한 사법부 규정

사법부 관련규정에서도 참고할만한 것이 적지 않다. 연방사법권은 고등사법협의회(Higher Juridical Council), 연방대법원, 연방고등법원, 검찰청, 사법감시위원회, 그리고 법에 정한 다른 연방법원으로 구성된다. 사법부의 구성과 권한 중 먼저 눈길을 끄는 건 검찰청을 사법부의 일부로 규정하는 내용이다. 언뜻 보기에도 검찰권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는 데는 이 방법이 아주 유용할 듯하다. 검찰권은 형사사법권의 초입관문이라는 점에서 사법부의 일부로 봐도 무방하다. 우리나라 검찰도 사법부와 똑같은 각종 특권을 요구할 때는 스스로의 준사법기관적 성격을 몹시 강조한다. 검찰청의 사법부 소속의 전제와 조건,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심층적인 연구검토가 필요하다.

나아가서 한국 대법원장의 권한을 대부분 고등사법협의회라는 합의제기구에 부여한 것도 사법부 내의 균형과 견제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사법협의회는 의회승인을 요하는 연방고등법원장, 연방고등법원판사, 검찰총장, 사법감시위원장 후보를 지명할 권한, 사법부 예산안 작성권한 등 사법행정 지휘감독권한을 갖는다. 사법감시위원회를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한 것도 바람직하다. 사법감시위원장은 고등사법협의회의 추천과 의회의 승인이 요구된다. 유감스럽게도 고등사법협의회와 사법감시위원회에 대한 헌법규정은 이 정도에서 그친다. 나머지 구체적 내용은 관련입법을 검토해야 알 수 있다. 향후 본격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이라크 신헌법 규정에는 의회의 재적과반수 찬성으로 제정과 폐지가 가능한 독립위원회와 의회의 2/3 찬성으로 제정과 폐지가 가능한 독립위원회, 두 종류가 있다. 예컨대 사담 후세인의 구체제 과거청산을 수행하는 탈바트당위원회와 구체제에서 부당하게 빼앗긴 재산권을 되돌려 받는 재산권청구위원회는 활동종료 후 의회재적 2/3의 찬성이 있어야 법률로 해산가능하다. 헌법 제개정만큼이나 바꾸기 어렵게 만든 것은 그만큼 헌법적 의미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적 자부심과 과거청산 의지 담은 전문

끝으로 이라크 신헌법의 전문에 대해서도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2005년 헌법의 전문은 어떤 다른 나라의 헌법전문보다도 민족적 자부심과 과거청산의 의지로 넘쳐난다. 문체는 헌법 전문답게 장중하고 유려하다. 예컨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조국이자 고승대덕의 거처에서 우리 이라크인은 문명의 개척자, 문자의 창제자, 셈법의 창시자로서 아담의 자손(인류가족)을 영화롭게 하였도다" "우리 국토에서 인간의 손으로 만든 첫 번째 법전(함무라비 법전을 의미)이 제정되었으며 (…) 우리 국토에서 '위대한 예언자'(마호메트를 의미)의 도반들과 성인들이 기도하고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이론을 만들며 문인과 시인이 이름을 날렸도다." 충분히 감동적이고 멋지지 않은가.

사담 후세인 구체제의 폐단과 해악에 대한 과거청산의지는 더욱 강하고 구체적이다. 신헌법은 구체제에서 발생했던 쿠르드족 대학살 등 다양한 불의를 구체적으로 열거한 후, "그래서 이라크 국민은 손에 손을 잡고, 어께에 어깨를 걸고, 새로운 이라크, 즉 파당주의, 인종주의, 지역감정, 차별과 배제에서 자유로운 이라크의 미래를 추구하노라"고 선언한다. "우리 이라크 국민은 '불신자'라는 비난과 연이은 테러에도 불구하고 법치국가를 향한 행진을 멈추지 않았으며 당파주의와 인종주의에도 불구하고 국민통합을 향한 행진을 멈추지 않았노라"며 신국가건설의 자부심을 드러낸다.

헌법전문은 이어서 "이라크 국민은 넘어진 상태에서 막 다시 일어나, 공화주의, 연방주의, 민주주의, 다원주의 국가체제가 가져올 당당한 미래를 바라보며, 법의 규정을 존중하고 정의와 평등을 확립하며 침략정치를 내던지고 여성, 노인, 아동의 관심과 권리를 돌보며 다양성의 문화를 확산하고 테러주의를 근절할 것을 남녀노소의 결의를 모아 여기 다짐하노라"고 엄숙하게 선언한다. 끝으로 헌법전문은 "이 헌법에 대한 충성이 자유로운 연합으로서 이라크의 국민, 국토, 주권을 보존"한다며 국민 개개인과 국가 기관들의 헌법적 실천을 강조하며 대미를 장식한다.

명품헌법, 멀리 있지 않다

이상에서 거칠게 살펴보았듯이 이라크 신헌법에는 다른 나라의 헌법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헌법조항이 많이 들어있다. 우선 군대나 정보기관의 타락과 폐단을 경험한 이행기 국가답게 그것을 헌법사항으로 규정한 점이 인상적이다. 독립위원회에 대해 '필요시 설치가능' 규정까지 둔 점도 그렇다. 그밖에도 새로운 헌법사항이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내용과 마찬가지로 군사법원의 관할을 군인이 저지른 군사적 성격의 범죄로 한정한 점과 장애인 등에 대한 주거복지제공을 국가의 사회보장책임의 일부로 명시한 점이 특별히 언급할만하다.

어떤가? 이만하면 이라크 신헌법에, 한국 헌법학이 한번 관심을 갖고 연구할만한 21세기의 첫 명품헌법이라는 영광스런 호칭을 붙여도 무방하지 않은가. 이라크 국민들이 구체제의 고통스런 교훈과 현대헌법의 온갖 동향을 거울삼아 지혜롭게 마련한 이라크 신헌법이 새로운 민주공화정의 구심점으로 작동하며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를 기원한다. 눈을 둘러보면 구원은 도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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