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일본 입장에서 보면 '패전' 후, 한국 입장에서 보면 '해방' 후 이 땅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을 되짚어보면 일제시대 못지않게 억울하고 기가 막히는 일의 연속이다.
1998년 있었던 우토로 지역의 토지분쟁 관련 재판 판결문과 1997년 일본 '가모가와 출판'이 발행한 책 <우토로-내버려진 마을> 및 우토로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1945년 이후 도대체 우토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정리했다. <편집자>
6.25 계기로 부활한 전범기업
우토로 동포들이 '해방'의 기쁨을 느낀 것도 잠시. 1945년 9월 일본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군 시설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교토 비행장과 항공기 조립 공장 등의 소유주였던 '일본국제항공공업'도 마찬가지였다. 이 회사 사장 츠다는 '전쟁 협력' 혐의로 A급 전범용의자로 체포됐다. 그러나 소련을 견제하던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이 바뀌었고, 츠다는 1946년 석방됐다.
그리고 일본국제항공공업도 '일국공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부활을 시도했다. 또한 회사를 '신일국공업'과 '일국공업'으로 분리해 명목상의 회사인 일국공업에게는 전쟁 책임을 지게하고 신일국공업은 트럭, 버스 등을 생산하는 회사로 새롭게 태어났다.
일본의 첫 번째 과오는 여기서 시작된다. 당시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만 있었다면, 그리고 일국공업이 강제로 끌려온 우토로 주민들에 대한 보상의 의지가 최소한이나마 있었다면 우토로 주민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불하했어야 했다.
하지만 일국공업과 신일국공업 모두 이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그 사이 한반도에서는 6.25 전쟁이 발발한다. 한반도에, 재일동포들에게 이 전쟁은 끔찍한 비극이었지만, 신일국공업에게는 부흥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우리 동포들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항공기 조립공장은 미군용 자동차와 탄환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새롭게 태어났고, 신일국공업은 한국전쟁 특수로 큰돈을 벌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접수했던 비행장 터는 일본 정부가 사들여 육상자위대 주둔지가 됐다. 비행장의 사택들도 일본 정부가 사들여 일본인들에게 팔았다. 그러나 우토로는 일본정부의 매입-불하 대상에서 제외됐다.
다만 1961년 일국공업은 우토로 주민들에게 토지 일관매수를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일국공업은 토지대금으로 수억 엔을 요구했고 주민들은 거절했다.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낼 수 없을 정도의 거액을 요구했고, 무엇보다 주민들은 '전후보상' 차원에서 '토지를 무상 불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교섭은 결렬됐고 우토로 토지는 신일국공업의 후신인 닛산차체(닛산자동차)로 넘어갔다.
그리고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됐다. 이는 더 이상 일본정부가 재일동포들의 전후보상 요구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음모와 배신…히라야마 마스오…허창구
닛산차체 측은 우토로를 철저하게 방치했다. 일본 정부는 "땅의 소유주인 닛산차체가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토로에 상하수도는 물론 소화전이나 도로도 설치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땅의 소유권을 얻어야겠다고 판단한 우토로 주민들은 1970년 닛산차체에 토지 매각을 요청했다. 그러나 닛산차체는 주민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사실 닛산차체는 우토로 지역에 공장을 세울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1983년 주민들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닛산차체는 우토로 토지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우지시(市)에 중개요청을 했고, 우지시청의 담당자가 '우토로 자치회장'이라고 소개한 히라야마 마스오를 만나 토지매각 협상을 시작했다.
이 순간부터 우토로 토지분쟁의 롤러코스터가 시작된다.
문제의 인물 히라야마 마스오. 본명 허창구. 우토로 주민. 1998년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에는 허 씨를 '자치회장'이라고 표시하고 있지만, 우토로 주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한 우토로 주민은 "허창구는 우토로에서 대학을 나온 두 사람 중의 한 명으로, 그래도 지식이 있으니 닛산차체와의 협상을 맡긴 것일 뿐 어떤 의사결정권이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상당수 생존해 있던 재일동포 1세들은 여전히 일본 정부와 닛산차체의 전후보상 책임을 물어 '무상 불하'를 요구하고 있었다. 단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수십년이 넘도록 일본정부와 닛산차체는 우토로를 위해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7년 3월 9일, 기가막힌 날
판결문에서도 주민들이 토지 매입에 반대한 정황이 드러난다. 판결문에 따르면 주민 전체의 동의하에 우토로 토지를 살 수 없다고 판단한 허창구는 일단 토지를 매입한 뒤 토지매입을 원하는 주민들에게 차후에 토지를 파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허창구는 1987년 3월 9일 닛산차체와 토지매매계약을 체결했다. 매매 가격은 3억 엔.
여기서 1987년 3월 9일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 날이다. 그동안 상하수도 설치 요구 동의를 무시해오던 닛산차체가 우지시에 우토로 지역의 수도관 시설 설치 동의서를 제출한 것. 교토 지방재판소는 "닛산차체는 종래부터 우토로 주민들에 대해 불법점거자라고 인식해 왔고, 수도관 건설 동의는 우토로 지역 토지를 허창구에게 일괄매각할 예정 하에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주민들이 이런 매각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닛산차체의 동의서에 의해 수도가 설치된 1988년 1월, 주민들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보며 "수도가 깔렸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 이면에는 이런 엄청난 협상이 진행됐다는 것을 모른 채.
민단 인사의 개입
허 씨의 매각 배후에는 민단 유력인사가 개입돼 있었다. 판결문에 등장하는 가와무라 씨. 민단 교토지방본부장이었던 하병욱이다. 참고로 하병욱은 민단 중앙본부 고문 등을 역임하는 등 교토출신 민단 간부이긴 하지만 최근 총련과 화해 선언을 주도했다가 제명된 전 민단단장 하병옥과 혼동하기 쉬운데 전혀 다른 인물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닛산차체로부터 매입 제의를 받은 허창구는 자금 문제로 고민을 하게 되고, 하병욱에게 자문을 구한다. 이에 하병욱은 은행(오사카 쇼긴. 大阪商銀)으로부터 매입자금을 빌리기 위해 '서일본식산'이라는 부동산 회사를 설립하고 자신이 보증을 서 허창구에게 토지매입 자금을 빌려준다.
허창구는 결국 하병욱의 도움으로 닛산차체로부터 3억 엔에 우토로 토지를 매입했다. 그런데 허창구는 "닛산차체에서 4억 엔에 우토로 토지를 매입했다"며 하병욱에게 거짓말을 한 채, 토지매입 2개월 뒤인 1987년 5월 하병욱(서일본식산)에게 4억4500만 엔에 우토로 토지를 재매각했다. 허창구가 이 과정에서 1억4500만 엔을 벌어들인 것.
허창구 야반도주하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진 것은 1988년 3월. 부동산업자들이 매매물건을 본다며 우토로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우토로 토지가 허창구를 거쳐 하병욱의 서일본식산에 매각됐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주민들은 격분했다.
모든 일을 주도했던 허창구는 매입 사실이 들통나자 가족들과 함께 야반도주했다. 허창구가 살던 집은 여전히 우토로 마을 한 복판에 폐가로 남아 있다. 한 우토로 주민은 "얼마나 급하게 도망쳤던지 아이들 예방접종 의료카드도 놓고 갈 정도였다"고 말했다.
교토지방재판소도 주민들이 토지거래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우토로 주민은 88년 3월경 우토로 지역의 토지 소유 명의가 서일본식산으로 이전된 것을 처음으로 알았고, 허창구나 서일본식산에 대해 불신감을 갖게 됐다"고 인정했다.
주민들은 뒤늦게 그 해 7월에서야 주민회를 재건하고 토지문제에 대응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다름없었다.
미심쩍은 하병욱 씨의 행보
이 당시 하병욱의 역할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1998년 판결문은 "허창구가 불신을 받을 행동을 한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하나, 하병욱은 우토로 주민에게 토지를 분양하기 위해 분양 가격의 결정이나 융자에 있어서 가능한 노력을 다했던 것이 인정된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상 분양'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반대가 너무 심해 하병욱이 우토로에서 손을 털고 나갔다는 것. 하병욱은 1988년 9월 일본인 회사인 가나자와토건에 서일본식산을 넘겼다.
하지만 주민들은 하병욱에게도 의혹을 시선을 던지고 있다. 허창구가 주민들 몰래 닛산차체로부터 3억 엔에 우토로 땅을 사서 4억4500만 엔을 받고 하병욱에게 땅을 팔았다는 것인데, 허창구가 단독으로 사기를 친 것인지, 우토로 주민들이나 제3자에게 토지를 매각할 때 시세차익을 남길 목적으로 하병욱과 공모해 땅 값을 부풀렸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또 하병욱이 가나자와토건에 서일본식산을 팔 때 매각대금으로 얼마를 받았느냐는 것이다. 사실상 서일본식산은 우토로 토지거래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회사이기 때문에 다른 자산이 없는 회사이다. 하병욱이 서일본식산을 파는 과정에서 수억 엔의 시세차익을 남겼다는 소문도 있다.
이는 현재 서일본식산이 우토로 주민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토지 가격에서도 드러난다. 현재 우토로 지역 토지의 시세는 7억 엔. 그런데 서일본식산은 10억 엔 이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번의 매매 과정을 거치며 땅 값이 시세보다 더 높아졌다. 게다가 우토로 주변 지역에 대한 개발계획 등이 발표되며 땅 값은 더 오르고 있다.
부동산 투기 복마전에 신음하는 우토로
그리고 우토로 주민들의 토지문제를 해결했다고 나선 하병욱이 너무나 손쉽게 일본인 회사에 땅을 팔고 물러섰다는 점이 앞서의 소문을 그저 소문으로 넘길 수 없게한다. 우토로 토지를 매입할 때 빌린 돈 때문에 은행으로부터 상환 압박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하병욱의 자금 융통력을 감안하면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은행의 상환 압박 정도는 큰 부담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에 우토로 주변에서는 "하병욱이 개입돼 있어 민단이 우토로 문제에 지나치게 소극적인 것 아니냐"고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 민단은 우토로 문제의 최근 소식에 대해 "일본 신문을 보고 안다"고 말할 정도로 무관심하다.
하여튼 하병욱이 빠진 서일본식산이 1989년부터 우토로 주민들에게 철거 통고를 하는 등 강제철거 위기가 일어나게 된다. 주민들은 법정에서 재일조선인이 이주하게 된 역사성과 마을 형성의 배경 등에 대해 항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모두 주민들의 패소.
당시 교토지방재판소는 "소유권이 닛산차체에서 서일본식산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전후보상 책임을 서일본식산에 물을 수 없다"는 취지로 주민들의 주장을 기각했다.
그런데 또 다른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2004년 재일조선인 3세인 이노우에 마사미라는 자가 등장해 우토로 토지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 이노우에는 서일본식산의 공동대표였던 이나모토 야소와치로부터 서일본식산을 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나모토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다른 대표인 가나자와 도쿠와키는 "매각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해 소송이 벌어졌다.
이노우에는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05년 5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 정부가 우토로 땅을 5억5000만 엔에 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2006년 결국 재판에서 가나자와토건에 졌고, 우토로 토지의 소유권은 가나자와토건의 서일본식산으로 확정됐다.
20년의 투쟁, 또 다시 찾아온 위기
1988년 7월 허창구의 농간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토로 주민회. 20년의 세월동안 수많은 일을 겪었다. 닛산차체 앞에 몰려가 "전후보상 책임지라"고 시위도 했고, 재판소를 들락거리며 소송과 증언도 했다. 일본 시민사회에 호소도 했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07년 7월. 우토로 주민회는 또 다시 분주하다. 토지 소유권자인 서일본식산이 "7월말까지 땅을 살 것인지 말 것인지 확답해달라"고 최후통첩했기 때문이다. 서일본식산의 모회사인 가나자와토건은 지난 4월 도산했다. 가진 거라고는 우토로 토지밖에 없는 서일본식산도 청산절차를 거치고 있다. 서일본식산 오하타 고이치 대표는 "우토로 토지를 매입하고자 하는 제3자가 나타났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20여 년 동안 우토로의 많은 재일동포 1세들이 세상을 떴다. 닛산차체 앞에서 구호를 외치던 50~60대 2세들도 이제 하나 둘 친구들을 저세상에 보내고 있다. 김군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토로에 일본인들이 한 명이라도 살았으면 저들(토지 소유주)이 저러겠어? 만약 우리 조국이 미국이었으면 저들(일본정부)이 저러겠어?"
식민지지배, 전쟁, 민족차별…일본정부, 교토부, 우지시, 부동산투기회사 우토로에서 우토로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일본인을 만날 수 있었다. '우토로를 널리 알리는 모임'의 미즈타이 교이치(78) 사무국장이다. 미즈타니 사무국장은 40여년 간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교사 출신으로 반전평화 운동을 하다 1989년 우토로 문제를 알게 된 뒤, 지금까지 줄곧 우토로 문제를 일본 사회에 널리 알리는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는 우토로 문제의 책임을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책임', '전후보상 외면과 민족차별의 문제', '부동산 투기세력과 이를 묵인하는 일본 정부'라고 규정했다. 그는 특히 "일본사회의 평화의식은 '피해의식'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식민지지배나 침략전쟁 등의 역사적 가해 사실이 망각된 평화의식은 온전하지 않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이 우토로에 가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것은 일본사회에 만연된 피해자적 평화의식을 수정하는 일"이라고 자신이 우토로 운동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우토로 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1941년 중학교에 다닐 때 동급생 150명 중 조선인이 한 명 있었다. 이 친구와 친하게 지냈는데, 1~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아주 잘하던 친구였다. 그런데 이 친구가 육군사관학교 전 단계인 육군유년학교에 진학하려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 모두가 이 친구는 붙을거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모두들 그 친구가 떨어진 이유는 '조센징'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친구에게 위로의 말 한 마디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내 인생에 계속 남아 있었다. '교토평화모임 사무국장'을 하고 있는데, 1989년 우토로 재판을 통해 우토로 문제를 알게 됐다. 그리고 <버려진 마을-우토로>라는 책을 읽고 우토로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그래서 1999년 우토로 주민회 부회장을 초청해 평화모임에서 강연을 들었고, 교토에서 열리는 '평화를 위한 전쟁전'에 우토로 관련 전시물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집회도 열고 있다. -우토로 문제의 책임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우토로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역사적 가해(加害)에 관한 문제이다. 일본은 계속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 사실을 숨기고 있다. 내가 40여년 간 교사로 일했기 때문에 교과서가 이런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일본사회는 기본적으로 피해의식을 전제로 한 평화의식을 갖고 있는데, 식민지지배나 침략전쟁 등의 역사적 가해 사실이 망각된 평화의식은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이 우토로에 가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것은 일본 사회에 만연된 피해자적 평화의식을 수정하는 일이다. 우토로 문제의 책임은 분명하다. 일본정부, 닛산차체, 교토부, 우지시, 서일본식산, 그리고 부동산투기업자들이다. 일본정부가 본질적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사이에 부동산업자들이 우토로에 장난질을 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동산업자들에게도 우토로에서 돈을 벌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강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우토로 문제를 해결하는 바람직한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전후보상'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일본의 중앙정부나 교토부, 우지시 등 지자체가 우토로 토지매입에 나서야 하고, 부동산업자도 가능한 싸게 땅을 팔아야 한다. 사실 우토로 문제는 교토부와 우지시 등이 해결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비교적 간단한 문제이다. 우토로와 비슷한 문제를 겪은 곳들이 있는데 모두 일본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문제를 해결했다. 한국정부도 나름대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노무현 대통령은 친일 등의 과거사 청산에 대해 적극적인 정책을 펴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우토로 토지를 매입하는데 재정적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으로 아는데 이 역시 고맙게 생각한다. 한 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일본 정부에게 우토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압력을 넣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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