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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시간으로 책임을 덮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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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시간으로 책임을 덮을 수 없습니다"

[기자의 눈] 노동자들의 죽음, 정부의 침묵

지난 16일 오전, 한국에서는 몇십 년 전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서울 경찰청 앞에서는 집회에 참가했다가 숨진 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고, 경기도 안성의 한 병원에서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면서까지 한미 FTA를 반대했던 또 다른 노동자가 한줌 재로 변하고 있었다.

"아직도 분신하고, 집회 나갔다가 죽는 사람이 있어?"

20대 중반인 기자의 지인들 중에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적은 이들이 많다. 기자 생활을 하며 접한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주면 지인들은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있냐'고 묻는다.

지난해 7월 파업 농성 도중 경찰의 방패에 맞아 숨진 포항건설노조 조합원 고 하중근 씨, 그리고 지난 1일 한미 FTA 막판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 앞에서 분신한 고 허세욱 씨.

많은 이들은 "아직도 사회 문제에 반대하면서 분신을 하거나 집회에 참가했다가 맞아 죽는 사람이 있느냐"며 마치 70~80년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라고 낯설어한다.

그러나 더 소설같은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펼쳐진다. 사건 발생 1년이 다 되어가도록 하중근 씨가 숨진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국 50여개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포항건설노조 파업의 올바른 해결과 건설노동자의 노동권보장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1월부터 매월 16일(하중근 씨가 집회 도중 쓰러졌던 날) 전국 160여 군데가 넘는 시군구 경찰서에서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1인 시위 및 기자회견을 벌이고 있지만 경찰 측은 묵묵부답이다.

허세욱 씨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몸에 불이 붙은 충격적인 사진이 공개됐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분신에 대해 정부와 언론은 철저히 외면했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한미 FTA를 멈추라'고 외쳤던 그의 절규에도 정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다음날인 2일 한미 FTA는 타결됐고, 이날 밤 노무현 대통령은 더 많이 개방되지 못했다고 카메라 앞에서, 관료들 앞에서 짜증을 냈을 뿐이다.
▲ 한미 FTA를 반대하며 분신한 고 허세욱 씨(오른쪽)와 파업 집회에서 경찰과의 대치 도중 숨진 고 하중근 씨(왼쪽). 정부는 이들의 죽음에 대해 침묵할 뿐이다.

침묵은 책임을 대변한다

이처럼 두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정부의 침묵은 역설적으로 이들 죽음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대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포항건설노조 집회 당시 현장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방패를 수평으로 세워 공격하고, 소화기를 던지는 등 과잉 진압을 벌인 사실을 인정했다. 또 사고의 책임자인 포항남부경찰서장 등에 대한 징계 조치를 이택순 경찰청장에 권고했다.

그러나 애초 하중근 씨의 죽음에 대해 자체 조사를 벌이겠다고 나섰던 경찰은 '조사 중'이라는 문패만 내걸고 여론의 관심이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경찰청장은 지난 3월 윤시영 경북청장을 대구청장으로 발령내는 등 책임자 추궁은 유야무야 '없던 일'로 넘어가려는 듯 하다.

2005년 시위 도중 사망한 고 전용철, 홍덕표 두 농민에 대해서도 경찰은 '책임 추궁'을 약속했지만 지금껏 여전히 한번의 수사과정에 대한 발표도 없다.

한발 더 나아가 경찰은 지난해부터 한미 FTA 집회에 과다 인력을 투입해 취재진 및 집회 참가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등 과잉 진압을 강화하는 태세다.

정부의 묵비권 행사는 허세욱 씨의 죽음 앞에서도 이어진다. 지난 16일 한나라당도 "주장의 찬반을 떠나서 삼가 조의를 표한다"며 애도의 뜻을 밝혔지만, 청와대로부터는 아직 침묵하고 있다. 책임을 추궁하려는 '여론적 시효'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2004년 노 대통령 탄핵 당시 탄핵 반대 집회에 참여해 촛불을 들었던 허세욱 씨가 이 같은 현실을 안다면 어떤 심정일까.

죽음 외면하면서 '민주주의' 외치는 정부가 더 '악질' 아닌가

지난 15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허세욱 당원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명백한 정치적 타살이다. 단 한번도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지 않고 주관적인 독단으로 반민중적 협상을 밀어붙인 노무현 정부에 의한 타살"이라고 주장했다.

87년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정부는 벌써부터 요란하다.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민주정권'이라고 자부하고 싶은 걸까?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가 독단과 폭력을 휘두르는 지금의 정부는 훗날 군부독재 정권보다 죄질이 더 나쁜 정부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어도 무엇 하나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정부는 '그때 그 시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한미 FTA 체결로 희생당하는 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불사르든, 농민들이 썩은 배추를 집어던지며 오열하든 상관않겠다는 정부의 태도는 군부의 독재를 능가하기까지 한다. 시민들에게 겨눴던 총이 방패를 든 경찰로 바뀐 점이 그나마 발견할 수 있는 '변화'랄까.

그래서 '아직도'라는 말의 화살은 죽임을 당한 노동자가 아니라 책임을 외면하는 정부에게 돌아가야 한다. 인권을 외치다, 민주주의를 외치다 죽은 이들에게 '그런 일이 있었냐'면서 여전히 사과는커녕 아는 체조차 하지 않는 정부에게 돌아가야 한다. 아직도 뻔뻔한 노무현 정부에게로. 시간은 책임을 덮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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