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8〜9일에 평양에서 열린 조중(북중) 정상회담은 미국 단극 체제가 저물고 다극화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 자리였다. 미국은 5월 중순에 열린 미중정상회담에서 "북한 비핵화" 원칙을 재확인했다고 했지만, 중국은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었다.
그리고 조중 정상회담에선 비핵화 문제가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대신 조중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하고 경제와 군사를 비롯한 각 분야의 교류협력을 대폭 강화키로 한 합의가 나왔다. 그 목표는 "세계의 다극화"이다.
2020년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은 한반도 문제의 중재자 역할을 했었다. 6자회담 의장국을 맡았기도 했었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는 '쌍궤병행'을 제시하기도 했었다. 조선이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에도 찬성하기도 했었다. 다양한 사유가 있겠지만, 중국이 가장 중시하는 미국과의 관계를 의식한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러한 중국에 익숙했던 탓인지, 미국은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공유해주길 바랐다. 한국 내 일각에서도 중국이 남북·조미 대화 재개를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과거의 중국'을 상대로 한 기대였다.
다극화는 '반미'가 아니다
오히려 작년 9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중에 이어 이번 평양 정상회담에서도 조중 관계가 "세계의 다극화"를 위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 구축으로 확실히 방향이 이동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세계의 다극화는 최근 들어 조선·중국·러시아 등이 추구하는 공동의 전략 목표에 해당한다.
중국과 러시아는 2000년대 초반부터 다극화를 주창했었지만,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중시했던 조선은 이와 거리를 뒀었다. 하지만 2021년 8차 당대회 이후 조선도 다극화를 핵심적인 전략 목표로 내세워왔다. 조선이 안보의 축을 대미 관계 개선에서 핵무력으로, 경제 발전 전략을 제재 해결에서 자력갱생 및 자급자족으로, 외교의 축을 한미일과의 관계 개선에서 중국과 러시아 중심으로 이동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반미'의 관점에서 해석하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중국은 5월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건설적·전략적 안정 관계'를 추구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미중 간엔 여전히 이견과 갈등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합의가 품고 있는 함의를 주목할 필요는 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미소 냉전 종식 이후 유지해왔던 단극 체제를 여전히 고수하고 중국이 세계의 다극화를 앞세워 이에 맞서면 양국 관계의 대결은 불가피해진다. 2010년 이래 미중간의 전략 경쟁이 첨예했던 지정학적 사유도 여기에 있었다. 미국과 중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질 것이라는 경고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었다.
하지만 2기 트럼프 행정부는 단극 체제 유지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적 셈법의 변화는 중국이 주창해온 다극화와 접점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미국은 중국이 추구해온 다극화를 반드시 저지해야 할 목표로 보지 않고 있고, 중국은 미국과의 '건설적·전략적 안정 관계'와 조선 및 러시아 등과 함께 추구하는 '세계의 다극화'가 조화롭게 병진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극화는 반미'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번 조중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일 대 조중러'의 신냉전이 고착화되고 있다는 식의 진단에도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우선 최상위 행위자에 해당하는 미중 관계가 안정화되고 있다. 또 중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지만, 한국과 미국이 일본의 대중 강경 입장에 적극 동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북핵'과 '대만' 문제를 둘러싼 갈등도 완화되고 있어
동아시아의 양대 현안으로 거론되어온 '북핵'과 '대만' 문제를 둘러싼 갈등도 그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일단 한미일은 비핵화를 원칙적인 목표로 유지하고 있고 조선의 핵무장에 대해 러시아는 '인정', 중국은 '묵인'하기로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불일치가 한미일 대 조중러의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조선의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 추구에도 불구하고 한미일의 대북 강경책이 과거에 비해 많이 누그러진 상태이다. 오히려 한미일이 조선에 대화를 꾸준히 제의하고 있는 상태이다. 또 한국과 미국은 조선의 핵무장에 대한 중국의 입장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꾸준히 추구하고 있다. 중일 관계가 악화된 사유도 북핵 문제를 둘러싼 인식 차이가 아니라 대만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2027년 중국의 대만 침공설'이 나올 정도였던 대만 문제도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양안 갈등은 여전하지만 중국의 대만 포위 훈련과 같은 무력시위는 올해 들어 수그러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국에서 '통일'이라는 단어 사용의 빈도수가 크게 줄고 있다. 대만이 분리·독립을 추구하거나 외부 세력이 이를 부추기는 행태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무리하게 통일을 추구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렇듯 최근 동북아 정세의 변화는 우리에게 불리하거나 불안하게만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중 전략 경쟁과 대결이 완화되면서 '우리 편에 서달라'는 미국의 요구와 '중립을 지켜달라'는 중국의 요구 사이에서 우리가 겪었던 딜레마도 완화되고 있다. 또 한국은 조선을 제외하곤 모든 동북아 국가들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외교적 위상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불가피한 추세가 되고 있는 국제 질서의 다극화 속에서 우리의 안전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발휘할 때이다. 미국과 중국이 합의한 '건설적·전략적 안정 관계'가 안착될 수 있도록 우리의 역할을 찾는 게 중요하다.
혹시라도 전략적 안정에 깨져 미중 충돌이 벌어지더라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는 '전략적 자율성'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큰 틀에선 다극 체제의 한축을 이루게 될 동아시아의 미래가 공동안보와 공동번영에 기초할 수 있도록 전략적 그림을 지금부터 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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