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의 한 음식점에는 오랫동안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휘호가 걸려 있었다. 지난 1989년 그곳을 들렀던 노무현 대통령이 즉석에서 써 준 것이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노 대통령은 청문회 스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노 대통령
'사람 사는 세상'은 노 대통령이 유독 좋아하는 표현이었다. 1988년 13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 선거 구호로 쓰기도 했다. '사람 사는 세상'은 민중가요 '어머니'의 가사 첫 소절이기도 하다. 2002년 대선 당시 노 후보는 직접 기타를 잡고 민중가요 '어머니'를 불렀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
모순 덩어리 억압과 착취 저 붉은 태양에 녹아버리네(…)"
공개석상에서 민중가요를 부른 대가는 컸다. 보수언론의 색깔 공세가 이어졌다. 하지만 노무현 후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 기타를 치며 민중가요를 부르던 노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 많은 이들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노 대통령은 취임 후에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문구를 잊지 않았다. 지난해 서울 청계천에 전태일 거리를 조성할 무렵, 바닥의 동판에 노 대통령이 새겨 넣은 문구도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올해 4·19 혁명 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원로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노 대통령은 "우리 아이들이 '사람 사는 세상'을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집회 참가 위해 목숨 걸어야 하는 세상은 지나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표현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드물다. 무엇 때문일까. 지난 27일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앞에서 만난 민주노총 조합원 이 모씨는 "노무현 정권 아래에서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다"며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이야기했다.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는 이들 앞에서 대통령이 즐겨 쓰던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표현을 떠올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 했다.
이 씨가 이날 인권위를 찾은 이유는 고(故) 하중근 씨 사건 때문이다. 지난 7월 포항건설노조 지지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해 하 씨를 죽음으로 몰아간 경찰에 대해 인권위가 권고안을 내도록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이 씨가 인권위를 찾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인권위의 권고안이 계속 늦어졌기 때문이다. 인권위는 하 씨가 숨진 지 118일 째인 이날 저녁에서야 권고안을 냈다. 지난 7월 하 씨가 부상당한 집회에서 경찰이 과잉진압을 했다는 것, 하 씨의 사망이 경찰의 진압 때문일 개연성이 높다는 것, 경찰청장이 당시 포항 집회의 진압 책임을 맡은 경찰 간부를 징계해야 한다는 것이 권고안의 내용이었다.
지난해 전용철, 홍덕표 씨 사망 당시와 크게 다른 반응
인권위는 지난해에도 비슷한 권고안을 낸 적이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고(故) 전용철, 홍덕표 씨의 경우에 대해서다. 당시 인권위는 불과 28일 만에 경찰의 징계를 요구하는 권고안을 냈다. 하중근 씨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단지 권고안이 나오는 속도가 좀 느렸을 뿐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차이는 인권위의 권고안이 나온 뒤 우리 사회의 반응에 있다. 지난해 전용철, 홍덕표 씨의 경우와 달리 인권위의 이번 권고안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싸늘했다.
최근의 '과격 시위' 논란 때문이다. 지난 22일 열린 한미FTA저지 집회에 나선 시위대의 분노는 뜨거웠다. 일부 시위대는 거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다음날 주요 언론은 시위대의 폭력성을 집중적으로 성토했다. 하지만 당시 집회에 참석한 이들이 왜 그토록 분노했던가를 설명한 기사는 드물었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하 씨 사망에 관한 권고안이 나온 27일, 인권위 주위에서는 "왜 하필 이런 시기에…"라는 탄식이 새나왔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차이는 정부, 특히 대통령의 반응에 있다. 지난해 전용철, 홍덕표 씨 사건에 대한 인권위 권고안의 반향은 컸다. 허준영 당시 경찰청장이 사표를 냈고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올해 하중근 씨 사망에 무관심한 정부…대통령 진정성은 어디에?
하지만 하 씨 사망에 대한 인권위의 권고안이 나온 다음날인 28일, 노 대통령이 한 말은 "임기를 마치지 않은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임기 말 권력 누수만이 대통령의 관심사인 듯 했다. 하중근 씨 사망에 대한 질문을 꺼내는 것이 아예 어색한 분위기다.
지난해 12월 노 대통령이 전용철, 홍덕표 씨 사망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한 날로부터 채 일 년이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일어난 변화다. 물론 노 대통령에게도 여러가지 안타깝고 복잡한 사정이 있을 테지만, 그의 진정성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느냐는 탄식이 나올 법하다. 노 대통령이 즐겨 쓰던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제 민망한 일이 됐다.
경기도 남양주의 음식점에 걸려 있던 노 대통령의 휘호는 어떻게 됐을까? 지난 2004년 음식점 주인이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내놨다. 경매 낙찰가는 501만 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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