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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끈 짧다고 시대의 진실 모를까"

[한미FTA 뜯어보기 450 : 허세욱 씨의 삶] "시장주의에 휘둘린 노무현이 오히려 '꼭두각시'"

"민노당이 선동해서 순진한 사람 하나 잡았네…."

지난 1일 한미FTA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서울 하얏트 호텔 근처에서 분신한 허세욱 씨의 소식이 전해진 직후, 협상을 취재하던 모 신문 기자가 중얼거린 말이다. 물론 이런 반응이 다음날 지면에 그대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문 지면과 달리 누리꾼들의 생각이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나는 온라인 공간에서는 좀 더 노골적인 언어가 쏟아졌다. 각종 포탈 사이트에 실린 허 씨의 분신 사실을 알리는 기사 아래에는 온갖 '악성 댓글'이 가득하다. "중학교를 중퇴한 허 씨가 한미FTA에 대해 무엇을 알고 극단적인 행동을 했겠느냐"거나, "허 씨가 좀 '이상한 사람'이 아니냐"는 반응 등이다.

이처럼 익명성의 그늘에 숨어 '악성 댓글'을 다는 경우와 달리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온 말에서 비슷한 인식이 드러난 경우도 있다.

지식인은 장교, 노동자는 사병?

허 씨가 분신한 다음날인 2일, 한나라당 전여옥 최고위원은 갑자기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꺼냈다. 이날 전 최고위원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영국군 장교들은 인간의 목숨이 최고로 중요한 것을 알아서 전선 맨 앞에 섰기 때문에 영국군 장교의 전사율이 가장 높았다"며 "(좌파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미FTA 반대 운동을 주도한 이들을 '장교'에 빗댄 것이다. 이런 비유대로라면 분신한 허 씨는 '장교 대신 몸을 던진 사병'이 된다.

이런 발언들에서 허 씨는 '자신의 머리로 한미FTA의 문제점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사람', '진보 지식인들의 발언에 휩쓸려 충동적인 행동을 저지른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앞서의 '악성 댓글'들에 대해 분노하는 이들 가운데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몸을 불사르며 쏟아낸 발언의 진정성을 훼손한 태도, 허 씨의 인간적 존엄성을 무시한 발언 등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가방 끈 짧은 사람'은 그저 불쌍한 사람 정도로 취급하는 경우다.

하지만 허 씨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대해서도 불편해한다. 허 씨가 정규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 했지만, 남의 말에 휘둘리는 꼭두각시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삶에서 부딪힌 문제에서 출발해 사회에 대한 보다 깊은 인식으로 나아간 경우라는 게다.

허 씨와 함께 참여연대 활동을 한 김 모 씨는 "시장만능주의를 외치는 지식인들에게 무비판적으로 휘둘린 노무현 대통령이 오히려 꼭두각시와 닮았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그는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하는 허세욱 씨를 보며,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을 떠올리곤 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람시가 이야기한 '유기적 지식인'은 노동자 계급 속에서 형성된 실천적 지식인을 뜻한다.

"김대중만 되면"하던 철거민이 활동가가 되기까지

실제로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 하고 서울에 올라온 허 씨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지난 1994년, 마흔 살의 그는 삶의 분기점을 맞는다. 서울 봉천6동 철거민으로 지내던 시절이다.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좀 좋아지겠지"라는 막연한 생각 외에는 딱히 정치의식이랄 게 없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강제철거에 맞서고, 철거지역에 살던 세입자 대책을 행정당국에 요구하는 주민운동 활동가들을 만나며, 새로운 배움에 눈을 떴다.

그냥 이리 저리 떠밀려 살아서는 삶이 던지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풀어가려면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는 것. 또 힘든 상황에서도 이런 원칙을 지키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의 배움은 이런 깨달음에서 시작됐다. 그때부터 그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95년 결성된 관악주민연대에 가입했다. 강제 철거에 맞서 싸우던 종래의 '철거투쟁'을 넘어 주민 자치능력을 키우는 활동을 위한 단체다.

이어 그는 참여연대에, 또 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자신이 겪은 강제철거의 배경에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다. 그리고 이런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단체에도 가입했다.

이런 다양한 사회단체에서 그는 그저 이름만 올려놓은 회원이 아니었다. 120만 원에 조금 못 미치는 월급을 떼어 꼬박꼬박 회비를 냈고, 단체의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신문과 책을 읽으며 세상에 대해 공부했다. 그렇게 13년을 보냈다. 그래서 서울 관악구 일대의 사회단체 활동가들 사이에서 그는 유명 인사다.

봉천동 철거촌에서 '선생님'을 만나다

관악주민연대 활동가 이명애 씨는 "(허세욱 씨가) 봉천3동, 6동에서 '철거투쟁'을 하며 만난 활동가들에게는 아무리 젊어도 꼭 '선생님'이라고 부르곤 했다"고 말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우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를 찾아나섰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관악구 봉천3동, 6동 일대는 1994년만 해도 거대한 빈민지역이었다. 1994년 당시 그곳에서 허 씨에게 깊은 인상을 준 활동가 중 한 명이 강인남 씨다. 당시 철거 지역 세입자 대책위원회에서 주민교육 등을 담당했던 강 씨는 이듬해 관악주민연대 결성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명애 씨는 "당시 봉천동에 좋은 주민활동가가 참 많았다. 강인남 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들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모습이 허 씨를 감동하게 했다. 허 씨는 자신보다 어린 강 씨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 부르며, (원칙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 준 것에 대해) 무척 고마워했다"고 술회했다.

허 씨가 강인남 '선생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참여연대에서 발행하는 월간 〈참여사회〉올해 2월호에 실린 '회원 인터뷰'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당시 <참여사회>가 참여연대 열성 회원인 허 씨를 인터뷰한 내용 일부다.

"참 부끄러운 기억이 있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려요. 1995년 봉천6동 철거촌에 살 때였죠. 그때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살 때라 그날이 그날 같았죠. 빈민운동을 하던 강인남이라는 여자 간사가 있었는데 용역깡패들에게 얻어맞는 일이 벌어졌는데 나는 그냥 구경만 했었죠. 그 뒤 많은 걸 깨달았죠."

국밥이 식어가도 개의치 않고 그 시절을 즐겁게 회상해갔다. 많이 배우고, 젊고 예쁜 선생님들이 어떻게 우리 편에 서서 우리의 입장을 세상에 알리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는지,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지금도 고마울 따름이라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용역깡패들이란 사람이 아니예요. 갈 곳이 없어 못 떠나는 혼자 사는 할머니집 지붕에 구멍을 2군데나 내고 담을 헐고, 장마철에 그랬으니 가재도구가 어떻겠어요? 이불이 다 물에 젖고, 할머니는 울고 있고,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았죠.


떠나지 못한 50여 세대가 똘똘 뭉쳐 새로운 가족이 되었죠. 그 중심에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죠. 빈 집에 간사들이 '철거민들이 갖추어야 할 행동'이라는 게시물을 보고 또 감동을 받았죠. '내부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내부에서 소란하지 않습니다.' 등등 일상적인 내용이었는데도 그때는 그 가르침이 가슴을 파고들었죠."

강인남 씨는 주민운동을 연구하기 위해 현재 필리핀에 머물고 있다. 허 씨의 분신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강 씨는 최근 이명애 씨에게 메일을 보냈다. 평소 "나는 나를 버린 적이 없다"고 종종 이야기해 왔던 허 씨에 대한 부끄러움과 책임감이 담긴 내용이었다.

생각이 다르면, 그저 유인물 한 부 놓고 가던 사람

국내에 없는 강 씨 대신 1994년 봉천6동에서 허 씨가 만났던 다른 활동가를 만났다. 현재 민주노동당 민생특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신장식 씨다. 신 씨는 1990년대 초부터 서울 관악구에서 빈민운동을 해 왔다. 1994년 허 씨를 처음 만났을 당시의 기억에 대해 물었다. "눈에 띄는 분이 아니었다. 참 조용한 분이었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신 씨를 기자에게 소개한 인권단체 활동가는 신 씨에 대해 "허세욱 씨가 민주노동당에 가입하도록 권했다"고 설명했었다. 하지만 신 씨는 "그렇지 않다. 허세욱 씨는 민주노동당 창당 직후 스스로의 뜻에 따라 가입한 당원이다"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창당 전부터 진보정당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해 왔다는 것이다.

이어 신 씨는 허 씨의 별명 중 하나가 '달리는 민주노동당'이라고 말했다. 택시를 몰며, 승객들과 끊임없이 진보적 의제에 대해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 씨가 진보적 의제를 낯설어 하는 이들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드는 태도를 취했다는 뜻은 아니다.

신 씨는 "(허 씨가) 워낙 겸손한 분이었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항상 존대를 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허 씨의 지인들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말이기도 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는 넌지시 뜻을 전하는 게 전부였다는 것.

"얼마 전 한미FTA반대 집회에서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원을 지지하는 이들이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허 씨가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부위원장에게 다가와 '저런 사람들은 끝까지 가기 힘들텐데요. 저런 사람들이 앞에 나서는 것은 좀 위험해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정도면 허 씨가 꽤 세게 뜻을 전한 것이다. 허 씨는 자신이 속한 단체의 방향이 자신의 생각과 좀 다르다 싶으면, 단체 사무실에 자신의 생각과 가까운 내용의 유인물을 살짝 놓고 나오는 분이다. 그게 허 씨의 의사전달 방법이었다." 신 씨의 말이다.

빨랫줄 잘못 매서 두들겨 맞았던 어린 시절, '배달의 기수'로 지낸 젊은 시절

허 씨의 이런 면모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활동가들이 입을 모았다. "조용하고, 겸손하며, 진지했다"는 것. 그런데 일상적인 모습은 어땠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별 대답이 없었다. 평소 개인적인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을 하지 않아서 함께 지내는 가족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활동가들과 나이 차가 컸던 탓이기도 했다.

그래서 허 씨의 회사 동료를 만났다. 한독운수 노동조합 황규금 위원장이다. 황 위원장은 지난 1999년 이 회사에 입사했다. 허 씨는 이보다 앞서 지난 1991년 입사했다.

황 위원장은 "처음에는 허 씨를 잘 몰랐다"고 말했다. 8만 원이 넘는 사납금을 채우려면 "택시 밑바닥 먼지를 털 틈도 없이 달려야" 했던 시절이어서다. "교대자가 교대시간보다 십분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화내고 싸우던 시절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조용한 성격의 허 씨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라는 게 황 위원장의 말이다.

황 위원장과 허 씨가 가까워진 것은 2002년 초부터다. 이전까지 한독운수 노동조합은 한국노총 소속이었다. 그런데 2002년부터 민주노총 소속으로 바뀌었다. 사납금 인상을 놓고 회사와 노조가 갈등하던 중, 노조 위원장이 잠적한 게 계기였다. 한독운수 노조는 민주노총 소속으로 바뀐 2002년 5월, 긴 파업 투쟁을 통해 조합원들의 불만이 컸던 사납금 제도를 없애고 월급제를 끌어냈다.

"허 씨가 사실 '스피커'가 안 되지. 그래서 앞에 잘 나서지는 않았지만, 원칙에 대해서는 아주 꼿꼿했어" 황 위원장이 전하는 허 씨의 인생 역정은 좀 더 구체적이다.

"허 씨 고향이 경기도 안성이었다지. 9남매 중 다섯째인데…. 중학교 때 집에서 빨래줄 잘못 맸다고 큰 형님한테 작대기로 맞았대. 그래서 서울로 도망왔다나봐. 서울에서 안 해본 일이 없다더군. 주로 배달을 했지. 막걸리 배달, 꽃 배달, 박카스 배달. 그래서 내가 이렇게 불렀어. '배달의 기수'라고. '온갖 배달을 다 하더니, 결국 '사람 배달'까지 하는구나' 그랬었지." 황 위원장의 술회다.

'노 대통령 탄핵 반대' 외치며 촛불 들었는데….

허 씨가 분신하기 하루 전인 3월 31일의 기억도 떠올렸다.

"분신하기 전날이지. 나를 좀 보자고 하더라고. 그러더니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죽 하는 거야. '내가 그때 서울로 도망오지만 않았더라도, 집에서 농사지으면서 잘 살았을텐데….'하고 말이지.

아 그리고 허 씨가 노조에서 정치통일부장을 맡고 있거든. 그런데 갑자기 정치통일부차장을 한 명 뽑아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는 거야. 그래서 '아니 다른 부서도 다 차장이 없는데 왜 거기만 차장을 뽑느냐'하고 말았지.

그때는 잘 몰랐어. '이 양반이 왜 이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게 다 (분신을 결심했다는) 신호였는데…."

이 대목에서 황 위원장은 말을 멈췄다.
▲ 한미FTA 반대 1인 시위를 하는 허세욱 씨 ⓒ그날이오면

그런데 내성적인 성격의 허 씨는 왜 갑자기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결심을 하게 됐을까. 허 씨가 스스로 말을 꺼내기 전에는 알기 힘들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주위 사람들 역시 말을 아꼈다. 하지만 최근 허 씨가 느꼈을 절망감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는 흔했다.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허 씨가 찾아와서 '이럴 수가 있느냐. 혼자서라도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고 싶다'며 답답해했다.

지난 2002년 미선, 효순 양 사건 당시 촛불집회에 모였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갔냐는 게다. '불과 일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미선이, 효순이를 너무 금세 잊어버렸다'며 허탈해 하던 허 씨의 표정이 떠오른다" 허 씨의 이웃 집에 사는 이동영 관악구의원(민주노동당) 소속 관악구의원의 회상이다.

'관성적인 집회, 바뀌지 않는 현실'이라는 조합에 대해 허 씨는 그 무렵에도 답답함을 느꼈던 듯 하다.

허 씨의 답답함은 노 정권 임기가 진행될 수록 더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이동영 의원은 "지난 2004년 노 대통령이 탄핵 당했을 당시, 허 씨는 탄핵 반대 촛불 집회에도 적극적이었다"고 전했다. 허 씨는 민주노동당 당원이지만, 당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주도한 대통령 탄핵은 부당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불과 2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노 대통령은 한미FTA 체결을 추진했다. 허 씨는 왜 정부가 무리를 무릅쓰고 한미FTA 체결을 밀어붙이는지 이해하지 못 했다. 노 대통령 탄핵에 반대했던 허 씨가 느꼈을 절망감을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다.

가난한 활동가를 걱정하는 가난한 허세욱, "밥은 먹고 다니니?"

"허 씨는 평소 옳다고 믿어 왔던 원칙이 훼손될 때면 무척 속상해했다"는 게 허 씨 지인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원칙이 흔들리면 "목숨을 던져서라도 바로잡겠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그때마다 주위에서 "어떤 운동도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운동은 긴 전망을 갖고 해야한다"고 만류했다고 지인들은 전했다.

"항상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분이다. 그런데 정부의 한미FTA 체결 과정이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게 진행되는 것을 보며 (허 씨는) 평소 무척 답답해했었다. 아마 이런 답답함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뿐'이라 여기고 (분신을) 결심한 것 같다" 신장식 씨의 말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라는 허 씨의 고민이 꼭 과격한 행동으로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이런 고민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철원군 농민회 회원들이 집회를 하다 경찰서에 잡혀갔던 적이 있다. 그때 허 씨가 택시를 몰고 경찰서 앞에 가서 기다렸다. 그리고 회원들이 풀려나니까 그들을 역까지 태워줬다" 신장식 씨의 말이다.

하지만 활동가들 사이에서 가장 자주 나온 이야기는 가난한 활동가들에게 '먹을거리'를 챙겨줬던 기억이다. 참여연대 간사 최인숙 씨는 "허세욱 씨는 사무실에 들를 때마다 간사들에게 '밥은 잘 먹고 다니느냐'고 챙겼다. 손에 과일 한 봉지씩 들고 나타나는 날도 많았다"고 말했다.

관악주민연대 활동가 이명애 씨도 비슷한 기억을 전했다. "봉천동 언덕길을 터벅터벅 내려가던 날이었지. 그런데 갑자기 택시가 내 앞에 서는 거야. 허세욱 씨더라고. 그러더니 같이 갈 곳이 있다며 타라는 거야. 그래서 탔더니 가까운 곳에 있는 회사의 노동조합 행사장에 내려주더군. 거기 행사에 쓰기 위한 떡이 좀 있는데, 그걸 좀 챙겨가라는 거야. (내가) 음식을 제대로 못 챙겨먹는 것 같아서 안쓰럽다면서 말야."

가난한 활동가들의 먹을거리는 부지런히 챙기는 허 씨였지만, 정작 자신은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았다. 택시 교대 시간에 맞추려면 식사 시간을 놓치기 일쑤였던 탓도 있지만 애당초 100만 원에서 120만 원 사이를 오가는 월급에서 각종 사회단체 회비로 8만 원 가량을 떼고, 활동가들에게 밥과 술을 먹이고 나면 남는 게 없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집세를 내고 각종 책과 신문 등을 샀다.

신영복 강의 들으며, '석과불식'을 되새기다

그런데 취재 중 만난 한 민주노동당 당원은 기자에게 "허 씨가 최근 기자와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줬다.

지난해 12월 1일 저녁, 서울대 법학교육100주년기념관 강당에서 만났던 것. 당시 기자는 서울대 앞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회과학 서점인 '그날이 오면' 후원 행사로 마련된 강연장에 있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강연이었다.

그때 취재 중이던 기자의 바로 옆에 앉아 강연 내용을 꼼꼼히 받아 적던 초로의 사내. 신 교수가 〈프레시안〉에 연재한 내용을 묶어낸 책인 〈강의〉를 옆에 펼쳐 놓고, 강연 내용과 비교하던 그가 바로 허세욱 씨였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 신영복 "진보의 열매 거두려면 씨앗부터 지켜야")

실제로 허 씨는 사회과학 서점 '그날이 오면'을 후원하는 모임 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후원 모임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했을 뿐 아니라 각종 진보적 행사와 집회 포스터를 서점에 날랐던 사람이었다. 허 씨가 나른 포스터들이 '그날이 오면'을 사회과학 서점답게 만들었다.

'그날이 오면' 서점 김동운 대표는 "허 씨가 최근 '그날이 오면' 상품권을 20만 원 어치나 샀다. 올해 대학에 입학하는 조카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다. 허 씨는 '조카가 '그날이 오면'의 진보적 지향에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또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이 살아나야 한다는 말도 자주 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몸을 불사르기 직전까지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의 생존을 걱정하던 허세욱 씨. 주변 사람들은 허 씨의 분신 소식을 듣고, 지난해 말 허 씨가 들었던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다시 떠올렸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신 교수는 '석과불식'(碩果不食, 씨가 있는 과실은 먹지 않는다)이라는 한자성어를 소개했다. '보다 나은 사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는 열매를 기대한다면, 진보의 씨앗을 잘 지켜야한다는 뜻이다. 같은 자리에서 신 교수는 '엽낙분본(葉落糞本, 떨어진 낙엽이 뿌리를 거름한다)'이라는 화두도 꺼냈다. "가을이 되면 나무는 낙엽을 떨어뜨린다"는 뜻. 나무의 근본인 뿌리를 위해 거름을 마련하는 행위다. 이런 한자성어들을 소개하며 신 교수는 미래를 이끌어갈 학생들이 진보적인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인 사회과학 서점을 진보의 씨앗, 혹은 뿌리에 비유했다.

"노동 속에서 다듬어진 진보의 꿈….이대로 그를 쓰러지게 할 수 없다"

그 자리에서 강의를 받아적던 허 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허 씨를 알고 지내던 이들 사이에서 이미 허 씨는 '진보의 씨앗이자 뿌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

취재 중 만난 허 씨의 지인들은 한결같이 "(허세욱 씨는) 대학 시절, 읽은 책 몇 권을 들먹이며 진보를 이야기하는 지식인들과 다르다. 중학교를 관두고 서울에 올라와, 힘든 노동 속에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다듬어 갔던 그를 이대로 쓰러지게 한다면, 무슨 낯으로 진보의 미래를 말하겠느냐"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불사른 '진보의 씨앗'은 지금 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지난 4일 큰 수술을 무사히 치렀지만, 쾌유까지 가야할 길은 멀다. 더 큰 어려움은 3억 원을 훌쩍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막대한 치료비.

치료비가 모자라 '진보의 씨앗'이 재로 변하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다면 온라인 공간에서 '힘내세요, 허세욱님' 카페(http://cafe.daum.net/taxidriver53)를 찾아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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