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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 없는 눈에서도 눈물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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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 없는 눈에서도 눈물은 흐른다"

'피스앤그린보트'에서 만난 사람<6ㆍ끝>우츠미 아이코

1963년 일본 도쿄.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한 무리의 남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한쪽 다리가 없어 목발을 짚은 사람, 한쪽 팔이 없어 의족을 한 사람, 짙은 검은색 안경을 낀 사람…. 이들은 강제징집 등으로 전쟁에 참여했다가 다친 재일 한국인 상이군인들이었다.

<감각의 제국> 감독이라는 점 때문에 한국 대중들에게는 포르노 영화감독 정도로 알려졌지만 전후의 일본 영화 지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잊혀진 황군>(1963)은 1943년 강제징병을 당한 뒤 전쟁에서 팔 하나와 양쪽 눈을 잃고 얼굴이 일그러져 입도 다물어지지 않는 한국인 남자가 주인공이다. 일본은 1952년 '전상병사원호법'을 제정해 상이군인들을 보상해줬지만 한국, 대만 등 과거 식민지 출신 병사들은 제외됐다. 다친 몸으로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한국인 상이군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일본에 남아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기약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뿐이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거리에 나서 아무런 성과 없는 집회와 시위를 벌이고 돌아온 주인공 남자는 동료들과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난동을 피웠다. 난동을 피우면서 검은색안경과 웃옷을 벗어던지자 그의 잘린 팔과 눈동자 없는 눈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자 뺨을 타고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동자 없는 그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 <잊혀진 황군>의 한 장면. ⓒ프레시안

일본 평화학회 회장인 우츠미 아이코(65) 케이센조가쿠엔대학(惠泉女學園大學) 교수는 2006 '피스앤그린보트'에서 이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면서 전후보상 문제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 정책순풍에 돛 단 듯

전후보상을 포함한 전후 처리 문제. 60년 전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후체제 청산'을 공약으로 내건 아베 총리가 집권하고 있는 일본에서 '현재'의 문제다. 전후보상을 화두로 30년이 넘게 운동하고 있는 우츠미 교수에게도 이 문제는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핵심 키워드다.

지난해 집권한 아베 총리는 일본의 전후 우익정치인의 대표주자다. 일본에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 남아 있는 전쟁의 기억은 '피해자'로서의 경험이 우선한다. 전쟁을 일으킨 위 세대들이 전쟁 가해국으로서 저지른 일들은 가리고 패전국으로서의 피해의 경험만 교육시켰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집권 공약으로 "전후체제로부터 탈피해 '보통국가' 일본을 만들겠다"는 것을 내건 것도 이런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다.

아베 정권이 내세운 '전후체제 탈피'는 착착 진행되고 있다.

작년 12월 15일 애국심 교육을 권장하는 내용을 포함한 교육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1947년에 만들어진 이 법은 평화헌법과 함께 평화체제 유지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또 같은 날 방위청설치법이 개정됐다. 이에 따라 방위청이 방위성(省)으로 승격됐고 자위대의 해외활동을 한층 강화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1954년 만들어진 방위청설치법은 전쟁을 주도한 군부의 독주를 반성하는 취지의 법이었다.
▲ 우츠미 교수 ⓒ프레시안

다음 수순은 국제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본의 무력행사를 영구히 금지하고 군대를 보유할 수 없으며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내용의 제9조를 핵심으로 하는 평화헌법의 개정.

민주당이 9조 개정에 대해 반대하고 있어 개헌 성사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지만 아베 총리는 지난 1일 신년사에서 "전후 체제에서 벗어나 새 시대에 맞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면서 올 한해 개헌을 의제로 삼을 것이라고 밝혔다.

우츠미 교수는 이처럼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우경화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라도 전후 처리 방식에 대해 문제제기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쿄전범재판에서 연합군이 처벌한 것과 처벌하지 않은 것, 이것이 그 이후 일본 사회의 방향을 가로막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을 일으킨 국가 지도자로서 전쟁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천황은 미국과 러시아 등 승전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범 대상에서 제외됐다. 미국은 간접적으로 일본을 지배하는 데 있어 천황제의 유지가 더 유리하다고 보았고, 러시아는 천황제가 있어야 일본이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하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본군의 침략으로 피해를 경험한 호주만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쇼와 천황은 전쟁 책임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리고 그 이후 도쿄재판에서 처벌된 전쟁 범죄자들의 권리도 단계적으로 회복돼 최종적으로는 1975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게 됐다. 최근 한국·중국과 일본의 외교적 분쟁 거리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이런 배경 하에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전후 처리 문제를 바로 잡지 않는다면 일본 우익 정치세력의 재군국주의화 시도는 언제든지 다시 불거질 수 있다."
"인도네시아 독립영웅 양칠성을 아는가"

"인도네시아 역사교과서에도 수록된 독립영웅 양칠성 씨를 아는가? 전라도 출신인 그는 1942년 일본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1945년까지 자바섬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했다. 그는 전쟁이 끝났으나, 징용된 한국인들이 B·C급 전범으로 몰리는 상황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고 인도네시아에 남았다."

우츠미 교수는 전후보상 문제로 운동을 하게 된 이유를 묻자 '양칠성'이라는 인물을 소개했다. 양 씨는 인도네시아를 재식민지화 하려는 네덜란드에 맞서 게릴라부대를 이끌고 싸워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으나, 네덜란드 군에 체포돼 1949년 공개 총살당했다.

우츠미 교수는 1975년 인도네시아를 찾았다가 양 씨의 존재를 알게 됐다. 창씨개명된 야나카와 시치세이(梁川七星)로 동료들에게 알려졌던 그는 1995년이 돼서야 자신의 본명을 찾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1975년 일본 대사관에 양 씨와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을 하다가 전사한 일본인들의 존재를 알려 유족 등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일본 정부는 다른 일본인 2명은 유족을 찾아줬지만 한국인인 양 씨를 위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우츠미 교수는 일본에 강제 징용돼 전쟁에 참여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B·C급 전범으로 몰린 식민지 출신 병사들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강제 동원된 한국인 유골 2300여 구를 후생성 지하창고에 장기간 방치하다가 1100여 구는 유족들에게 돌려줬고, 나머지 1200여 구는 도쿄의 우천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 우츠미 교수가 밝혔다.

이뿐 아니라 홋카이도에도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시신이 묻혀 있다. 지난해 8월 '강제 징용, 강제 연행 희생자 유골 발굴을 위한 한일 대학생 공동 워크샵'에 참가한 양국 대학생과 연구자 120여 명이 유해 발굴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해 한일 양국 정부는 일제에 의해 강제연행된 옛 조선인 유골반환을 위한 일본 내 현지 조사를 합의했으나 북한 핵실험으로 인한 일본 내 여론 악화로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피스앤그린보트'에서 내리면서

"이 배에 북한 사람이 탔다면 아마 하루도 못 견디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25세까지 '조선적'을 유지하면서 조선인학교 교사를 지냈던 한 재일교포 3세의 말이다.

한국과 일본이 어떻게 한 배를 타게 됐는가. 한국의 경제 성장이 아마 가장 큰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환경과 평화'를 얘기한다는 '피스앤그린보트'지만 이 배에 필리핀, 태국, 북한 사람들이 같이 탈 수 있을까? 설령 같이 탄다고 해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평화와 환경에 대해 논의하는 게 가능할까?

첫 기항지인 일본과 두 번째 기항지인 홍콩에서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피해국으로 위치지어 졌지만, 그 이후 기항지인 베트남과 필리핀에선 사정이 달랐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노동 착취, 또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노동 착취와 인권 유린을 경험한 수많은 동남아시아 사람들…. 아시아에서 2번째로 경제규모가 큰 한국은 이들 국가에선 일본과 마찬가지로 '가해국'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일본과 한 배에 탔다는 것은 모순이면서 동시에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빠른 경제성장에 기반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이유로 전쟁 피해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일본과 섣불리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자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걸핏하면 외교 갈등으로 역사 인식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아직도 양국 사이에 해결되지 못한 역사적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다. 또 피해자로서의 고통의 기억을 잊는 것은 한국이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가해국'이라는 새로운 위치를 반성 없이 받아들이게 했다.

가해자로서의 반성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경제대국 일본이 전후 60년 만에 과거의 기억을 다 벗어던지고 빠르게 우경화되고 있는 모습은 한국이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이 배에 북한 사람이 타기는 힘들 것이다. 신자유주의 질서 내에서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피스앤그린보트'가 선진국 일본과 한국 시민사회의 자족적인 운동 수준을 뛰어 넘어 '동아시아의 평화와 환경'을 얘기하기 위해 헤쳐 나가야 할 '파도'는 여전히 높고 험한 것 같았다. '피스앤그린보트'에 내리면서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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