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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인들의 애국심과 투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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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인들의 애국심과 투쟁하고 있다"

'피스앤그린보트'에서 만난 사람들<5> 재일코리안(2)

"일본에서는 지난 15일 어린이들에게 애국심 교육을 장려하는 내용을 담은 교육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나는 지금 일본 사회에서 애국심과 투쟁하고 있다."

재일교포 3세 피아니스트 최선애(46) 씨는 지난 24일 '2006 피스앤그린보트'에서 열린 피아노 콘서트에서 폴란드 출신 작곡가 쇼팽의 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시를 낭송했다. 조국을 떠나면서 가져온 한줌의 흙을 평생 간직했던 쇼팽과 타국의 감옥에서 쓸쓸히 죽어간 윤동주를 거론하면서 최 씨는 "조국을 잃어버린 사람의 애국심과 타인의 조국을 빼앗은 사람의 애국심은 다르다"고 강조했다.

최 씨는 3년 간의 미국유학 생활을 통해 쇼팽의 음악을 새롭게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지문날인을 거부한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1986년 재입국허가를 받지 못한 채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그는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난민으로 생활하고 있고 재일교포와 똑같은 문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최선애 씨는 24일 '피스앤그린보트' 콘서트에서 쇼팽의 '혁명', '이별의 노래' 등을 연주했다. ⓒ 프레시안

지문날인 제도란?

1955년부터 '외국인등록법'에 따라 재일 외국인은 만 14세가 되면 3년마다 외국인 등록을 하면서 지문을 날인해야만 했다. 이를 거부하는 자에겐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만 엔 이하의 벌금'을 과하도록 규정돼 있다. 재일한국(조선)인들의 저항으로 이 제도는 일본 국내에서 문제가 됐을 뿐 아니라 한일 간 외교문제로 대두됐다. 이 제도는 △외국인 등록연령을 14세에서 16세로, 등록 갱신기간은 3년에서 5년으로 연장(1982년) △'검은 잉크'를 '무색투명'으로, '회전지문'을 '평면지문'으로 변경(1985년) △지문날인을 일생에 한 번만 하도록 변경(1987년) △영주자에 한해 지문날인 폐지(1992년) 등의 개정 과정을 거쳐 1999년 완전 폐지가 결정됐다.

"최? 사이라고 불러도 되겠네"

"중학교 때 교감선생님이 내 이름을 보고 어떻게 읽어야 하냐고 물어봤다. '최'라고 했지만 그 선생님은 '일본식으로 '사이'라고 불러도 되겠네'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내 이름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었는데 이름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처음으로 이 이름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부모님의 아픔을 이해하게 됐다."
▲ 최선애 씨. ⓒ 프레시안

일본 사회의 차별과의 싸움은 그에겐 대를 이은 투쟁이었다. 그의 아버지 최창화 씨는 '재일 대한기독교회' 목사로 평생을 재일교포 인권운동을 해왔다. 최창화 목사는 1975년 재일교포의 참정권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문제제기했고, 유엔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제기했다. 최 목사는 또 NHK 뉴스에서 자신의 이름을 '사이 쇼까'라고 발음한 것에 대해 "인격권 침해에 해당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재판은 1988년 대법원에서 기각돼 패소했지만, 이 재판을 전후로 재일교포를 포함한 한국인의 이름이 한글 읽기로 바뀌었다.

최선애 씨는 23일 선상 강연에서 "내가 이 차별을 달게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자식들에게 더 깊은 상처를 안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1981년 지문날인을 거부한 이유를 밝혔다.

그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1985년 1심에서 패소했다. "외국인의 본인 확인을 위해서는 지문이 가장 훌륭한 과학적 자료이며 지문날인제도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게 일본 법원의 판단이었다. 1986년 2심의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부터 지문날인 거부자가 늘어나자 일본 정부는 1982년 법무대신의 자유재량으로 지문날인 거부자의 재입국 신청을 불허하는 대응에 나섰다. 이는 지문날인 거부자가 외국에 나갔다가 일본으로 돌아올 경우 영주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1982년부터 1988년까지 107명의 지문날인 거부자에 대해 재입국 허가를 해주지 않았으며, 최 씨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최 씨는 1986년 재입국 허가가 나지 않은 채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으로 떠나면서 그는 재입국 불허 조치와 관련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3년 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그에게 일본 정부는 180일 동안만의 체류를 허가해줬다. 그는 180일마다 체류기간을 연장하면서 일본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는 재입국 불허 조치와 관련해 1993년 고등법원에서 승소했지만, 1998년 4월 최고법원에서 패소했다. 그가 영주권을 되찾을 길이 없어진 것이다.

"나는 재일교포 1세들이 전쟁에서 받은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하고 일본이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소원하면서 재판에 임했다. 하지만 나의 소원도, 영주권도 재판정 앞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처럼 간단히 날아가 버렸다. 법원의 판결문에는 일본에서 40년을 살아온 나의 인격은 없고, 외국인이란 인격만이 있었다."

그러나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 일본 방문을 앞두고 일본 정부는 지문날인 제도의 완전 폐지 입장을 밝혔다. 이듬해 일본 국회는 외국인 등록법 개정을 심의하면서 최 씨에게 참고인 증언을 요청했다. 그의 증언이 끝나자 진나이 당시 법무대신은 "최선애 씨에게 정말 죄송한 짓을 했다"고 사과했다. 2000년 4월 특별영주권을 회복하면서 그의 20년 간의 길고 긴 투쟁이 일단락됐다.

"내가 일본국적 취득을 신청하지 않는 이유는 부정(不定)당한 사람으로서의 고집 같은 것이었다. 일본의 국가와 사람들은 이질의 사람이 동질의 사람으로 돼 줄 것을 바란다. 일본 국적은 이같은 동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는 둘 이상의 조국을 가진 사람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처사다."

그의 싸움은 지문날인제도 자체가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한 일본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라는 점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조선 사람한테 돌을 던지면 안 된다?"
▲ 김창행 씨의 저글링 공연. 그는 독학으로 1000가지가 넘는 저글링 기술을 연마했다고 한다. ⓒ 프레시안

'세계 엔터테이너 선수권 대회'를 2연패한 세계 저글링 챔피언 김창행(21) 씨. 일제시대 강제징용당한 조선인 후손들의 집단 거주지역인 교토 우토로 출신인 그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피스앤그린보트'를 탔다.

최선애 씨와 달리 그는 지문날인 등 제도적 차별은 경험하지 않은 세대이지만 재일교포에 대한 편견과 차별적 인식은 그에게도 똑같았다.

그의 어머니는 '일본사회에서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차별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를 일본인 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학교에서 그는 '오카모토 마사유키'란 일본식 이름을 썼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재일조선인의 인권 문제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다. 그때 선생님이 '조선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면서 '맞지, 오카모토?'라고 물어봤다. 그것이야말로 차별이라고 생각했다. 그 일을 계기로 친구들에게 재일조선인이란 게 다 알려졌다. 또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친구가 나한테 돌을 던졌다. 선생님은 그 친구에게 '조선 사람한테 돌을 던지면 안 된다'고 야단쳤다. '사람에게 돌을 던지면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증조할머니와 어머니는 그에게 늘 무엇을 하든 '1등'을 하라고 가르쳤다. 일본사회에서 차별을 극복하고 '1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열다섯 살의 나이에 세계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했을 때조차도 일본 사회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회 직후 언론사의 취재 요청이 많이 들어왔으나 인터뷰 중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밝혔더니 결국 기사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겪은 한국도 재일교포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였다. 그는 지난해 한 춤 공연에 초대 받았으나 공연도 제대로 못하고 무대를 내려온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일본말을 하는 그를 보고 일부 관객이 야유를 보냈기 때문이다.

"국적, 정체성 등의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애매한 설명 밖에 나오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주는 단어는 이런 것들이 아닌 것 같다. 꿈, 열정, 노력, 성취 등으로 나를 확실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내 바람이다."

김 씨는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저글링 비디오를 보고 아무런 편견 없이 무대의 공연으로 평가 받는 저글링의 세계에 감동을 받아 저글링을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지금도 하루 18시간 연습을 한다는 그의 손은 연습 때 생긴 상처로 만신창이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우토로와 비슷한 전 세계 빈민가를 돌면서 자선공연을 하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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