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03##-2000000. 일본 도쿄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엄영이 씨의 주민등록번호다. 엄 씨의 남편과 아들도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은 한국인이 아닌 '조선적'이다. 또 엄 씨의 배다른 형제들과 외가 쪽 친척들은 북한에 살고 있다. 한편 엄 씨의 아버지 쪽 친지들은 모두 남한에 살고 있다.
'조선적'(朝鮮籍)이란? 일본 정부는 1947년 구 식민지 출신 사람들은 더 이상 일본 사람이 아니라 외국인으로 등록해야 한다는 '외국인등록령'을 발표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남한과 북한에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으므로 '조선적'으로 등록했다. 이것이 현 '조선적'의 연원이다. 연합군사령부(GHQ) 시대가 끝나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외국인등록법'이 생겨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들은 관청에 등록을 해야만 했다. 당시 한반도는 전쟁 중이었다. 한편 전쟁을 거쳐 본국이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서면서 재일조선인 사회도 남쪽을 지지하는 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과 북쪽을 지지하는 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으로 서서히 양분되기 시작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한국 국적을 원하는 재일조선인들은 한국 국적을 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상당수의 재일조선인들이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 대해 문제제기하면서 '조선적'으로 남아 현재까지도 일종의 무국적 상태인 '조선적'인 재일교포는 약 15만 명에 이른다. 재일교포?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재일코리안?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60만 명에 달하는 한국계 일본 거주자들을 칭하는 용어도 알고 보면 정치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다. 총련 쪽에선 재일조선인이란 용어를, 민단 쪽에서 재일한국인이란 용어를 많이 쓴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기 위해 '재일'이라고만 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최근 들어 '재일코리안'도 동포사회 내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한 용어로 쓰이고 있다. 교포란 용어는 임시로 거주한다는 뜻이라서 일본에서 나고 자란 2, 3세들에게는 다소 부적절한 말일 수 있다. 동포도 지나치게 핏줄 중심적 용어라는 점에서 적합한 용어는 아니다. |
한 가족이 남한, 북한, 일본에 뿔뿔이 흩어져 서로 다른 '국적'을 갖고 살면서 만나고 싶어도 만나기 힘든 현실. 전쟁과 남북 분단으로 인한 아픔은 31살 엄 씨에겐 과거사가 아니다. 순간순간 직면해야만 하는 현실의 문제다. 이런 문제들은 현재 20~30대 한국 젊은이들에겐 이미 내 문제가 아닌 부모님 세대, 아니 그 이전 세대의 문제가 돼 버렸지만,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를 벗어나면 엄 씨와 같은 '한국인' 젊은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엄 씨와 부모님의 국적이 다른 이유는?
엄 씨도 2000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 '조선적'이었다. 아버지가 총련의 지역 간부였던 그는 교육도 대학까지 전부 '민족교육'을 받았다.
조선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아시아나 항공의 일본 지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조선적'이라서 한국 기업에 취직하는 것 자체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취직한 이후에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더 힘들었다. '조선적'은 한국 방문이 원칙적으로 한번 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또 '조선적'은 무국적 상태이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는 것도 여러 모로 불편하다. 이런 이유로 업무상 한국을 자주 들락날락해야 했던 엄 씨는 부모님을 설득해 한국 국적을 따게 됐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고향이 남쪽인데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한국 국적으로 바꾸면 북한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엄 씨의 어머니와 재혼한 아버지는 전처 소생의 아들과 딸을 '재일교포 북송사업' 당시 북한에 보냈다.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도 북한으로 건너갔다. 북한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재일조선인을 대상으로 이주사업을 벌였고, 일본 사회 내에서의 차별로 먹고살기 힘들었던 재일조선인이 대거 북한으로 건너갔다. 북송사업으로 건너간 재일조선인은 10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 중 상당수는 엄 씨의 부모처럼 가족이 북한에 있는 이들이다.
한일관계, 남북관계의 변화는 엄 씨의 가족사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그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재일교포가 아닌 한국인 남편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남북 간 화해무드 덕분이었다.
올해 엄 씨 가족들은 처음으로 모두 함께 남한을 방문했다. 그의 아버지는 남북 간 대치가 한창이던 시절엔 총련 간부라는 이유로 서로 연락조차 하기 힘들었던 고향 친지들과 함께 팔순 잔치를 치렀다고 한다.
반면 2002년 9일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한 것을 계기로 급속히 퍼진 반북 정서 때문에 엄 씨 아버지는 북한에 살고 있는 자식들은 6년째 만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일본이 지난 7월 북한의 만경봉호 입항을 금지해, 북한에 가족이 있는 많은 재일교포들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고 엄 씨가 전했다.
"고정관념과 편견 없이 재일동포들의 역사도 또 하나의 민족의 역사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엄 씨는 선뜻 털어놓기 쉽지 않은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공개하면서 한국인들이 재일교포의 문제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당부했다.
"한국은 재일교포에게 해준 게 없다" "돌이켜 보면 한국 정부는 재일교포들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는 것 아닌가." 피스앤그린보트에서 지난 20일 열린 '재일교포 토론회'에서 재일교포들이 차마 그동안 입밖에 꺼내놓지 못한 '진실'을 한국인 김영환 씨가 끄집어냈다. 그는 지난 5년 간 일본에서 평화운동을 해온 이다. 북한은 민족교육 사업을 통해 재일교포들이 언어와 역사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지만 남한은 이들을 내팽겨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은 재일교포들에게 매우 엄격한 '민족적 잣대'를 들이댄다.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재일교포에 대해서는 일본인과 동일시하고 비난한다. 반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재일교포에 대해서는 한국인으로 간주하면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피스보트'의 스탭인 재일교포 3세 조미수 씨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봤을 때 머뭇거리게 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한국인, 일본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에게 되묻고 싶다. 당신은 무슨 근거로 한국인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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