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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때, 진짜 싸움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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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때, 진짜 싸움은 시작된다"

[해외시각] 이집트 독재의 역사적ㆍ구조적 기반 넓고도 깊어

30년간 권좌를 지켜 온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이 물러났다. 이집트 시민들과 민주주의를 바라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기뻐하면서 축제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이집트의 상황이 어떻게 진전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여전히 불안하다. 무바라크는 물러나면서 대통령의 권한을 군에 넘겼는데, 이집트 군은 국민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는 집단이지만 한편으로는 무바라크 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이기도 했다.

인도 출신 소설가이자 언론인 판카즈 미시라 영국 런던칼리지대(UCL) 객원연구원은 12일(현지시간)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단지 무바라크 하나가 쫓겨 나갔다고 해서 바로 민주화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미시라 연구원은 "이집트의 민주화 시위대는 무바라크와 그를 지지하는 외세의 권위를 무너뜨렸지만 독재의 뿌리는 깊다"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집트의 독재 체제의 근원을 알기 위해서는 좀더 심층적인 경제적·역사적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에서부터 이집트 독재의 기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미시라 연구원의 주장이다. 또 그는 비록 지금은 승리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지만 시위대와 민주화 세력들은 스스로를 단련해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시련에 대비해야 하며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다음은 이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
원문 보기) <편집자>

▲ 13일 오전 '이집트 민주화의 성지' 타흐리르 광장에서 민주화 시위대와 이집트 군(붉은 모자)이 함께 아침 햇살을 맞고 있다. 과연 군은 민주적인 새 시대를 앞장서서 열어 나가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로이터=뉴시스

폭군은 물러났다. 이제 이집트의 진짜 투쟁이 시작된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지난 2주 동안 텔레비전 방송과 인터넷 뉴스에 달라붙어 마침내 폭군이 용감한 시민들에게 항복하는 상황, 즉 지난 11일 밤과 같은 상황이 오기를 바랐다. 이집트 민중은 역사를 만들어냈고 모두 이를 축하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다음 상황은?"이라는 질문을 하는 게 너무 이른 것이 아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권력을 이양받은) 소위 '최고 군사 위원회'는 우리에게 확신을 주기 어렵다. 또다른 군사 독재자가 구(舊) 정권의 그늘에 숨어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바라크와의 친밀한 관계로 비난을 받고 체면을 구겼던 서방 국가의 지도자들이 시위대가 긴장을 늦추는 순간 변화를 거슬러 '안정'을 강조하면서 태도를 바꾸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집트의 과거 투쟁사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는 한 관찰자의 말을 떠올리면 사태는 좀 더 걱정스럽게 보인다. 그는 "거대한 독재의 성이 무너지는 것은, 그 체제를 대변하는 이들을 지목해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독재의 기반을 파괴하려는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19세기 후반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집트, 터키 등 아랍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정치운동 및 언론·저술 활동을 했던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1838~97)가 임종을 앞두고 남긴 권유이자 경고다. 알-아프가니는 이 지방을 여행하면서 '독재의 기반'이 얼마나 견고해지고 있는지를 목격했다. 그러므로 많은 '개별적인 대변자들'이 제거되고 축출되는데도 불구하고 다음 세기에 독재 체제가 오히려 강화된 것도 알-아프가니에게는 놀랄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이집트가 중요한 시기를 맞은 1871~79년 사이 이집트에 머물렀다. 이때 이집트는 명목상 주권국가였지만 서방 국가들과의 (제국주의적) 관계 때문에 비틀거리고 있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한 이래 이집트는 서구 국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따라잡으려고 시도한 첫 번째 비서구 국가였다. 그러나 근대적 정부와 군대를 만드는 데는 돈이 들었고, 이집트의 지배자들은 이 돈을 마련하려고 유럽에서 높은 값을 쳐 주는 면화를 재배하기 위해 재식 농업(플랜테이션)을 대규모로 벌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짧은 기간 안에 많은 돈을 벌긴 했지만, 이전의 자급자족적 경제는 단일작물만을 재배하는 농업 구조로 바뀌었다. 여기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가 겹쳐 이집트는 1870년대 후반부터 유럽 은행가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됐다, 스스로 충분한 자본을 모으지 못하자 이집트는 유럽의 은행에서 높은 이자를 주고 빌리는 돈에 점점 더 의지하게 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은행가들에게 이집트의 국부(國富)는 마치 '제비뽑기 경품'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데이비드 S. 랜즈 미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말한다. 초기 단계에 있던 이집트의 제조업은 자유 무역을 주장하는 영국이 좌지우지하는 국제 경제체제 하에서 다른 (선진)국가들과 경쟁하기엔 상대도 안 됐다. 한편 이집트의 이른 근대화는, 이렇게 외세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는 독재정부에 비판적인 사회정치적 시각을 가진 새로운 계급들을 출현시켰다.

1870년대 후반에서 1880년대 초의 시기에 이집트인들의 분노는 마침내 분출했다. 이는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 식민지 권력에 대항하는 첫 번째 민족주의 봉기였다. 예측했던 대로 1882년 영국은 이집트를 침공해 점령했다. 이는 영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이익은 영국에서 인도로 가는 해상 통로인 수에즈 운하였다.

알-아프가니는 오스만 터키 제국에서도 해군력으로 뒷받침되는 서구 국가들의 경제적·전략적 이익이 실현되는 유사한 모습을 관측했다. 그는 자신의 모국인 페르시아에서는 국토와 자원을 유럽 사업가들에게 팔아치우는 왕에게 항의하는 거대한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알-아프가니는 전통적인 동방의 농경국가들을 겨누고 있는 유럽의 현대화되고 산업화된 국민국가의 위협은 단지 영토적 확장을 노리는 것보다 훨씬 교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예를 들어 국내적 근대화가 긴급하다는 주장이나 '자유 무역'을 받아들이라는 조건을 아시아 사회에 퍼뜨리면서, 유럽 사업가와 외교관들은 현지 엘리트들이 자기들의 말을 고분고분 듣도록 만든다. 지역 엘리트들은 서구의 기술로 자기들의 군대를 현대화하고 효율적인 경찰과 정보기구를 세워 자신들의 독재를 강화하면서 매우 기뻐한다.

이것이 1890년대 후반 알-아프가니가, 이슬람 교도들이 처음에는 서구의 지원을 받고 그들에 의해 양육되다시피 한 현지 엘리트들을 경멸하다가 이후엔 서구 그 자체를 경멸하게 됐다고 설명한 이유다. 알 아프가니는 또한 현재에는 어디에나 있는 이분법적 사고의 확장을 목격했다.

그 이분법이란 서구식 자유주의냐 종교적 광신주의냐, 또는 안정화냐 이슬람화냐 하는 것이다. 이분법은 유럽인들이 잔인한 폭군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했다. 알-아프가니는 1891년 영국 언론들을 비판했는데, 이는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이란 왕에 대한 항의 운동을 벌인 이란 시위대를 영국 언론들이 종교적 광신주의라고 호도했기 때문이다.

알-아프가니는 국가의 주권과 선거에 의한 민주주의 역시 물질적으로나 지적으로 풍족한 서구의 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어책이 아니라는 것에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세속적(이슬람주의자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 옮긴이) 민족주의자들인 와프드(Wafd) 당은 1924년 이집트의 첫 선거에서 승리했고 1930년대까지도 계속 우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영국은 당시 이집트 왕과 힘을 합쳐 와프드당이 어떤 힘도 행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이집트 국민은 민주정치 제도에 대해 폭넓은 좌절감을 갖게 됐고, 이슬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오히려 커졌다. 무슬림형제단은 바로 1928년에 창설됐다.

인도의 반제국주의 운동의 지도자 자와할랄 네루는 영국 감옥에서 이집트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서서히 목졸려 죽어가는 것을 보고 1935년 "동방 국가들의 민주주의란 제국주의 지배 권력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 단 하나만을 의미한다"라고 신랄하게 말했다.

아랍인들은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를 대신해 중동에서 최고 실력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 이 음울한 진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제 이 지역에서의 '서방의 이익' 리스트에는 이스라엘과 원유 공급을 안정화하는 것이 추가됐다.

이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은 알-아프가니에게나 우리에게나 친숙한 것이다. 가말 압델 나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은 짧은 기간 동안 놀라울 만큼의 자유를 이집트에서 실현했지만, 사회주의적인 그의 개혁도 이집트가 세계 경제에서 계속 몰락하는 것을 구하지는 못했다.

나세르의 계승자인 군부의 실력자들은 독재의 기반을 강화했다. 그들은 서방과 군사 동맹을 맺었고, 이집트 경제를 외국 투자자들에게 개방했으며,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작지만 강력한 지방 엘리트 정권을 창조했다. 완벽히 현대화된 경찰은 점점 가난해져 가는 다수 대중을 수동적인 상태로 머무르게 하는 데 전념했다.

거대한 독재의 성은 즉각적인 소통이 가능한 시점에서 무너진다. 알-아프가니는 죽기 전 당시 이슬람 독재자들을 저주하면서 "내가 뿌린 씨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받아들여진다면 좋으련만"이라며 매우 비통해 했다.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와 인터넷은 알-아프가니가 꿈꿨던 것들을 (이집트 민중들이) 성취하도록 도왔다. 정치화된 대중들을 일깨우고, 더 대담하게 만들고, 전통적인 엘리트들끼리의 합의를 산산조각내 버리는 것 말이다.

시위는 매일매일 커지고 있고 새로운 사회계급들과 구체제의 수혜자들, 희생자들이 시위를 더욱 키우고 있다. 심지어 정부의 충실한 선전꾼 노릇을 했던 국영 TV도 자신들 내면의 목소리를 찾았다.

카이로 시내 카스르 알-닐 다리에서 시위대들이 물대포 공격을 받는 중에도 굴하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이 찍힌 영상이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를 통해 퍼졌다. 이것은 미디어의 도움을 받지 못한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시위보다 더 많은 도덕적·영적 힘을 축적시켰다. 놀랍게도 2주도 안 되는 이 짧은 기간에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들은 독재자 무바라크 대통령과 도덕적·지적 권위를 가진 그의 외국 지지자들을 완전히 발가벗겼다.

또 혁명에는 '마음의 혁명'이 필수적인데, 이 또한 이미 이뤄졌다. 정치·경제적 구조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 됐다. 하지만 실제로 (급진적 변화를) 달성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튀니지의 사례가 이를 보여 주며, 이집트인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봐도 그런 경고를 읽을 수 있다. 독재의 기반은 깊고도 또 넓다는 것 말이다.

우리는 이제 이집트에 대한 서방 언론들의 관심이 사라진 후에도 오랫동안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네오콘과 '자유주의적' 강경파들이 다시 나타나 '이슬람주의'의 유령을 다시 언급하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지금 승리가 눈에 보이는 것 같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단련해야만 한다. 이집트에서 민중의 자기결정권을 쟁취하기 위해선 오랜 싸움이 예상되며 어떤 시련이 닥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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