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사교계의 여인,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밤마다 동백꽃을 들고 다녔다. 한 달 중 25일은 흰 동백,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을 들고 극장이나 사교계에 나타나 동백꽃(카멜리아) 여인으로 불렸다.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의 소설 <춘희>에 나오는 이야기다. 붉게 타오르는 겨울의 심장. 정념의 상징인 동백은 겨울에 피어야 동백이다. 따뜻한 봄에 피는 동백은 동백이 아니다. 춘백이다. 가을에 피는 것은 추백이다. 한겨울 추위를 뚫고 피어나는 동백이야말로 진짜 동백이다. 한겨울에는 많은 동백꽃을 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단 한 송이일지라도 한파를 뚫고 피어오른 동백을 봐야 진짜 동백을 봤다 할 수 있다. 눈보라 속에 피어나는 설중매야말로 진짜 매화인 것처럼. 통영 충렬사에서는 한겨울 한파를 뚫고 피는 진짜 동백을 볼 수가 있다.
▲ 가을에 피면 추백, 봄에 피면 춘백, 겨울에 피어야 동백이다. ⓒ강제윤 |
나그네는 충렬사에 오면 무엇보다 백석 시인의 시가 먼저 생각난다. 연모하는 통영 소녀 난을 만나러 왔다가 헛걸음하고 충렬사 난간에 하염없이 기대앉아 시를 썼던 백석. 그 백석 시인의 시비가 충렬사 건너편 정자 옆에 서 있다. 실연의 아픔을 시와 술로 달랬던 백석도 충렬사 동백을 보고 가슴 뜨거웠으리라.
사당이나 향교 같은 건축물을 둘러보는 것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그네 또한 그랬었다. 무언가 지나치게 의미가 부여된 건축물들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그런 오래된 건축물들을 일부러 찾아다닌다. 굳이 의미를 따지지 않고 소요하러 가는 것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야 친숙해질 수 있다. 고건축물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정갈한 정원과 수백 년 묵은 고목들. 고건축에는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휴식과 안식,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공원을 나들이하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찾다 보면 고건축물들이 참으로 편안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통영의 충렬사도 그런 곳이다. 이순신 장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란 생각만으로 참배를 간다면 얼마나 무겁고 경건해야 하겠는가. 이제는 그런 무거움에서 탈피해야 한다. 참배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가능하다. 산책하기 좋은 공원 같은 사당, 그곳이 나그네에게는 충렬사다.
▲ 흰 동백, 소복의 여인처럼 처연한 저 흰빛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강제윤 |
나그네가 충렬사를 자주 찾는 이유는 사당의 고건축물이 주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동백나무 고목들 때문이다. 충렬사 경내에 들어서면 500년이나 된 아름드리 동백나무 고목 네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동백나무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거목들이다. 동백나무는 성장 속도가 워낙 느려서 수령이 많아도 잘 크지 않는다. 그 대신 도끼날도 잘 안 들어갈 정도로 단단하다. 옛날 충렬사 부근 마을 처녀들은 충렬사 입구 '명정샘'으로 물을 길으러 다녔다. 겨울 새벽이면 처녀들은 물을 긷기 전에 충렬사 경내로 들어가 이 오래된 동백나무에서 동백꽃 한두 송이를 땄다. 샘에서 물을 길은 뒤 처녀들은 물동이 위에 동백꽃을 띄웠다. 처녀들은 어째서 물동이에 그 붉은 동백꽃을 띄웠던 것일까. 처녀들이 물동이에 띄운 것이 정말 동백꽃이었을까. 혹시 그녀들 속에서 타오르는 붉디붉은 정념은 아니었을까.
김구·이승만·여운형까지 참배했던 사당
▲ 눈 속에서 피어난 충렬사의 겨울 동백. ⓒ이상희 |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제7대 이운룡 통제사가 선조 39년(1606년) 왕명에 따라 지었다. 봄과 가을, 음력 2월과 8월 그달의 두 번째 정일(丁日)인 중정일(中丁日)에 춘추 향사(제사)를 봉행한다. 또 양력 4월 28일에는 탄신제를 지낸다. 충렬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을 때도 이 충무공 사당으로는 유일하게 존속된 사당이다. 1895년 삼도수군통제영이 폐지된 이후에는 통영의 유지들이 충렬사 보존회를 설립해서 제사를 받들어왔다.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문에 그려진 태극 문양에 덧칠하여 일장기로 바꾸고 또 위패를 모신 정당에 못질까지 해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었다. 8.15 해방 직후에는 김구, 여운형, 송진우, 신익희, 이승만 같은 인사들이 환국하여 가장 먼저 참배했던 성지였다. 마치 현재의 국립 현충원 같은 위상이었다. 지금은 더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게 됐지만, 통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세병관과 함께 정신의 본향 같은 곳이다.
▲ 충렬사 유물전시관에 전시중인 팔사품. ⓒ강제윤 |
충렬사 사당을 둘러보고 강한루 밑을 빠져나와 오른쪽 유물 전시실로 향한다. 유물 전시실에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명나라 신종 황제에게 보고하자, 신종이 장군에게 보내온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독인(都督印), 호두령패, 귀도, 참도, 독전기, 남소령기, 곡나팔 등의 팔사품(보물 440호)이 그것이다. 모두 여덟 종류의 하사품 15개다. 처음에는 삼도수군통제영에 보관되다가 충렬사로 가져와 오늘에 이르렀다. 유물들은 한때 아산 현충사로 옮겨지기도 했지만 통영시민의 요구로 되돌아왔다. 도독인은 동으로 만든 도장인데 도장을 넣은 함에는 황조어사인(皇朝御賜印)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황제가 직접 보내온 도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충렬사 외삼문 곁 비각 충렬묘비에는 백사 이항복이 지은 이순신 장군의 치적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진린 도독이 장군을 경외했던 이야기가 적혀 있다. 진린 도독은 "공의 전술을 기이하게 여겨 반드시 이야(李爺), 즉 어르신이라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장군은 조선 백성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장군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이순신 장군을 시기·질시했던 건 오로지 무능한 조선의 왕과 권력자들뿐이었다.
통영의 생명수, '명정샘'
▲ 일정, 월정 두 개의 우물을 합해서 명정이라 한다. ⓒ강제윤 |
충렬사를 나오면 건널목 건너에 '명정샘'이 있다. '쌍우물'이라고도 부르는 명정샘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통영 사람들의 생명수였다. 이순신 장군이 팠다는 전설이 있지만, 이 샘은 1670년 제51대 김경 통제사 때 판 것으로 전해진다. 명정샘 입구에는 박경리 선생의 소설 한 대목이 새겨진 석조물이 놓여 있다.
"충렬사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 감도는 봄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음력 이월 풍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명정샘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같은 자리에 굳이 샘을 두 개나 판 것은 무슨 연유일까. 처음 샘 하나를 파고 보니 물이 탁하고 곧 말라버렸다. 그래서 옆에다 우물을 하나 더 파봤다. 그랬더니 두 우물 다 맑은 물이 나오고 수량도 풍부했다. 위쪽에 있는 샘을 일정(日井), 아래쪽에 있는 샘을 월정(月井)이라 한다. 합치면 일월. 두 우물을 합해서 명정(明井)이라 부른다. 평상시에는 두 우물 모두 마을 공동 우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 향사 때가 되면 일정은 충렬사 전용으로만 사용되는 신성한 우물이었다.
신성한 우물이었던 만큼 샘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시체나 상여가 이 우물 근처를 지나가면 물이 흐려지는 이변이 생겼다. 또 한때 두 우물을 합해 팔각정으로 개축한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돌림병이 발생하는 등 재앙이 일어나 명정으로 복원했다. 명정샘은 햇빛을 받지 못하면 물이 흐려지는 까닭에 지붕도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참으로 기이한 샘이다.
이 작은 샘에 그토록 많은 전설과 금기 따위가 덧붙어 있는 것은 왜일까. 이순신 장군에 대한 통영 사람들의 마음이 그만큼 지극했다는 뜻일까. 장군의 제사에 올리는 물이니 여느 우물물과는 다른 신비한 물일 거란 믿음이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혹시 아닐까. 상수도가 보급된 뒤부터 명정 샘물은 더는 사용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상수도가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상수도 때문에 수백 년 된 우물을 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물 또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수백 년을 솟아나온 샘물, 통영의 상징인 이순신 장군 샘이 아닌가. 수질 관리를 잘해서 길손들도 마실 수 있게만 해준다면 이보다 큰 관광자원이 어디 있을까.
충렬사 마을 동동주 할머니를 찾아서
명정샘을 나온 나그네는 문득 충렬사 아랫마을에서 막걸리를 담가 판다는 할머니가 궁금해졌다. 나그네는 양조장 막걸리가 아니라 집에서 담근 막걸리가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천 리를 마다치 않고 찾아가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막걸리 광이다. 그런데 통영에 그런 막걸리를 오랫동안 담가온 할머니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할머니가 충렬사 아랫마을에 산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명정샘 부근 작은 슈퍼마켓 주인에게 물으니 집을 알려주신다. 그 골목에 가서 동동주 할머니라면 다 알 거란다. 미로처럼 좁은 골목길을 헤맨 끝에 할머니 집을 찾았다. 충렬사 아래서 서포루 쪽으로 한참을 올라갔다. 충렬사 아래가 아니라 서포루 아래라 해야 더 찾기 쉽겠다.
비탈진 언덕에 위태롭게 들어앉은 오두막집. 계단을 올라 할머니 집에 들어서자 마당은 온통 누룩 바구니와 물을 가득 담아놓은 물통으로 빽빽하다. 발 들여놓을 틈이 없다. "할머니 계세요?"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방안에선 텔레비전 소리가 나는데 어딜 가신 걸까. 이 늦은 저녁에. 골목에 나와 앉아 계신 동네 할머니에게 물으니 좀 전까지 있었는데 잠깐 어디 간 것 같다고 하신다. 위쪽에 사는 딸네 집에 갔는지 모르니 기다리면 금방 오실 거란다. 나그네는 할머니 집 계단에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기다린다. 할머니는 대체 언제나 오시려나. 나그네가 할머니를 기다리는 것은 막걸리 한잔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그네가 기다리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올 수 있는 기다림일까? 인기척은 들리지 않고 사위는 점점 어둠에 잠겨간다.
□ 인문학습원 <통영학교>가 오는 2월 23일부터 24일까지 통영 답사를 떠납니다. 자세한 답사 정보는 바로 가기를 클릭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답사 정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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