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이 사람을 보라')
가차 없는 탈영병 처형
이순신은 도망치다 잡혀온 수군들을 처형한다. 군율을 엄하게 하는 것은 병사들을 전장에 붙들어두기 위한 고육책이다. 병사들을 전장에 머물게 하는 것은 애국심이 아니다. 공포다. 적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난중일기에 적의 수급을 베어낸 기록만큼이나 탈영병의 목을 베었다는 언급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전장의 안과 밖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
무능하고 물정 모르는 임금은 그저 '급히 적들의 돌아갈 길목으로 나가서 물길을 끊고 도망치는 적을 몰살하라.' '부산으로 가서 돌아가는 적들을 무찌르라.'는 뜬구름 같은 교서만 내릴 뿐 군사나 무기를 보내주지 않는다. 제 한 목숨 보전에도 급급한 왕에게 전장에 보낼 지원군이나 무기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전쟁 시작 20일도 못 되어 도성을 왜적에게 빼앗기고 도주한 무능한 조정. 전쟁의 와중에서도 부패한 관리들의 욕망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명나라 고관 송응창이 보낸 불화살 15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 독차지하려 하고' 남해 부사 기효근은 '배 안에 어린 색시를 싣고 다니며 남이 알까 두려워한다.'고 이순신은 탄식한다.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고 놀기까지 하니 그 사람됨은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고 한심스런 지경이다.'
이순신 혼자서 아무리 군율을 엄하게 한들 이탈해 가는 민심을 막을 도리가 없다.
'옥과의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수군을 잡아서 보내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아서 도피자의 수가 거의 100여명이다.'
징집된 백성이 무능한 나라의 군대를 피해 달아나는 것은 살기 위함이다. 죽음을 무릅쓴 탈주. 죽음의 공포보다 강한 것이 생에 대한 애착이다. 전란이 일어나자 임금과 관리들은 제 살길을 찾아가 버리고 백성들만 사지(死地) 내모는 나라. 백성들이 그런 나라에 목숨을 내놓지 않으려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전쟁 중에는 탈영병만이 아니라 포로가 되어 왜군에게 협조한 백성들도 많았다. 백성이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니다. 나라가 백성의 보호자가 아니라 수탈자였으니 그런 것이다. 나라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고마운 대상이 아니었으니 그런 것이다. 나라는 왕과 양반의 나라였지 백성의 나라는 아니었다. 힘 는 백성들에게는 나라나 왜적이나 다 같은 약탈자였다.
백성들이 의병에 가담해 왜적과 맞서 싸운 것 또한 왕조와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왜적의 만행이 너무도 가혹해서였다. 나라는, 임금은, 조정은, 양반 지배세력은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결코 그런 백성의 뜻을 알지 못했다. 전란 뒤 백성들은 더 이상 임금과 조정과, 양반들을 두려워하지도 신뢰하지도 않게 됐다. 그러므로 후일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과 조정이 남한산성에 갇히게 됐을 때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수수방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기까지 한' 전쟁
1592년(선조 25년) 7월 7일, 전라우수사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의 부대와 합류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의 배 70여척을 격파하고 불태우는 대승을 거둔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1593년 수군의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다.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오니 나그네 생각이 어지럽다. 홀로 배 뜸 밑에 앉았노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전에 비치고 정신도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덧 닭이 울었다.'(1593.7.15)
'원 수사의 음흉하고 간흉함이 대단했다.'(1593.7.28)
1592년 4월 시작된 왜군의 침략으로 조선 반도는 7년간 고통이 극에 달한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1592년(선조 25년) 1월 1일부터 정유재란이 끝나가던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기록이다. 마지막 일기를 쓴 이틀 후에 이순신은 절명한다.
옥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해전. 해전에서는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이순신이었지만 육상의 패전 소식에는 속수무책이었다. 1593년 6월 29일 10만의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른바 2차 진주성 싸움. 1592년 10월의 1차 진주성 싸움 때는 3800여 조선군과 성민들이 왜군 3만과 싸워서 승리했다. 하지만 2차 진주성 싸움의 결과는 참혹했다. 성이 무너지자 왜군들은 성안에 남아 있던 6만여 명의 조선 백성들을 창고에 몰아넣고 불태워 죽였다.
전쟁이란 그토록 무참한 것이다. 평화의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모두가 시대의 행운아들이다. 그 행운의 고마움을 모르고 전쟁을 마치 아이들 공놀이나 되는 양 떠드는 자들이 이 나라에는 아직도 있다. 악마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악마다.
임진왜란은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고 총에 맞아 죽고, 불태워져 죽고, 굶어 죽고, 죽고, 죽고.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는' 전쟁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사람은 없다. 전쟁은 사람이 아니라 '병사'들이 하는 것이다. 전쟁에는 이쪽 사람도 저쪽 사람도 없다. 오로지 적군과 아군만 실재한다. 적을 이롭게 하면 아군도 적이 된다.
'훈도를 처형했다.'
'도망병을 처형했다.'
처형하고 또 처형해도 처형당할 자들은 넘쳤다. 전쟁터에 사람이 설자리는 없다. 대체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경계란 무엇인가. 이순신 또한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뇌했다. 적과 탈영병을 가차 없이 처형하고서는 어머니와 자식들 걱정에 날을 새고 또 병사들의 고통에 눈물 흘렸다. 전장은 죽음과 삶의 경계였다.
'미역 60동을 따왔다. 군관 정사립이 왜인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왔다.'(1594.3.23)
'송한령이 대구 10마리를 잡아 왔다.'(1594.11.5)
'견내량의 군사 방어선을 넘어서 고기잡이를 한 어부 24명을 잡아다 곤장을 때렸다.'(1594.11.12)
'이날 청어 40두릅을 곡식과 바꾸어 사려고 이종호가 받아 갔다.'(1595.11.21)
바다는 죽음의 바다이면서 삶의 바다이기도 했다. 둥둥 떠다니는 적군과 아군의 시체가 물고기와 조개의 먹이가 되는 바다. 그 바다에서 병사들은 동료들의 살을 먹고 자란 조개와 전복을 따고 물고기를 잡아다 굽고 국을 끓였다.
'머리는 가려웠고 심사는 외로웠다'
이순신은 불안한 자신의 앞날과 어지러운 심사를 점술에 기대기도 했다.
'장님 임춘경이 와서 내 운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1597.5.11)
'선홍수가 와서 원균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水雷) 둔(屯)데 천풍(天風) 구(女后) 변했으니 본체를 이기는 것이라 크게 흉하다고 했다.'(1597.5.12)
감지 못한 머리는 늘 가려웠다.
'다락에 기대어 저녁나절을 보냈는데 심회가 언짢았다. 머리를 꽤 오랫동안 빗었다." (1596.3.25)
'닭이 운 뒤 머리가 가려워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을 불러 긁게 했다.'(1594.8.5)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부하 군관들에 대한 증오를 자주 토로하기도 하고 첩의 부정을 꿈에 보기도 했다. 이순에게는 정실부인 상주 방씨 외에도 해주 오씨와 부안 댁 두 사람의 첩이 더 있었다.
이순신은 '초 1일 한 밤 중에 꿈을 꾸었는데, 나의 첩(부안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로 따져 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다. 꿈이지만 내쫓아 버렸다.' 현실의 불안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순신 또한 사랑을 잃을까 노심초사 하고 질투심에 몸을 떠는 외로운 사내였다. '나라가 위급함에 처해 있는데 남해 부사 기효근이 어린 색시를 싣고 다니며 논다'고 분노하던 이순신 또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술을 마시고 시를 읊고 수시로 여인들을 품었다.
'이날 밤, 으스름 달빛이 다락을 비치는데 잠을 들지 못하고 시를 읊으며 밤을 지새웠다.'(1595.8.15)
'이날 달빛은 대낮 같고 바람 한 점 없는데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심란했다. 잠을 이루지 못해 신홍수를 불러 퉁소를 듣다가 밤 10시경에 잠들었다.'(1596.1.3)
'개(介)와 함께 잤다.'(1596.3.9)
'국화 떨기 속에 들어가서 술 두어 잔을 마셨다. '여진(女眞)과 잤다.'(1596.8.8)
'광주 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술에 취했다. 최철견의 딸 귀지(貴之)가 와서 잤다.'(1596.8.19)
기적은 없다
이순신은 누구보다 원칙에 충실한 관리였다. 훈련원 봉사로 재직할 당시 자신의 상관인 병조정랑 서익의 인사 청탁을 거절했다가 후일 서익의 보복을 받았다. 고흥의 발포 만호로 재직 중 이순신은 서익의 모함으로 파면 당했다. 먼 친척이었던 율곡이 한번 찾아오라는 제의도 거절했다. 1691년 2월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 좌수사로 부임 한 뒤에도 원칙에 따라 모든 일을 처결했다.
이순신이 전투마다 승리를 거둔 것은 운이나 기적이 아니라 원칙의 승리였다. 왜군의 침략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으나 무능한 조정과 부패한 관리들은 임무에 태만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병사들에게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시키고 총포 등 무기를 확충하고, 전함을 새로 만들거나 수리 하고 거북선을 건조했다. 이러한 일들은 전쟁을 앞둔 군 지휘관이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이순신은 해야 일들을 마땅히 했으나 다른 관리와 지휘관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전쟁에서의 승패를 갈랐다. 평상이든 전장이든 기적은 없다. 준비가 기적을 만든다. 하지만 전란을 겪고서도 조정과 관리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송사가 진행 중인데 술과 첩, 심지어 자신의 딸까지 상납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관리도 있었다. 그에 대해 이순신은 단호했다.
'이른 아침 조계종(趙繼宗)이 현풍 수군 손풍련에게 소송을 당한 결과 마주 대면하고 공술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가 갔다.'(1596.2.20)
'날이 어두워질 무렵 영등 조계종이 소실을 데리고 술을 들고 와서 마시기를 권했다.' (1596.2.20)
'밤 9시가 지나서 영등 조계종이 그의 딸을 데리고 술병을 들고 왔다고 하는데 만나지 않았다. 11시가 넘어서 돌아갔다.'(1596.3.23)
전란 중에도 조정은 여전히 부패한 자들의 잔치판이었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다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 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둘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 (1597.5.21)
제승당, 역사의 패러독스
조선은 멸망했고 조선 수군의 본영도 폐지 된 지 오래지만 이순신 장군의 수군 사령부 제승당만은 여전히 한산도에 건재하다. 한때 제승당은 성지였다. 제승당을 성역화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조선을 점령한 일본군 장교 출신 대통령이었다. 쿠데타로 민주정부를 전복시킨 독재자는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장군을 적극 이용했다. 독재자는 장군을 성웅으로 추앙하며 자신을 장군과 동일시하도록 선전했고 제승당을 체제유지의 학습장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왜군 출신 독재자는 끝내 성웅이 될 수 없었다. 장군은 왜적의 총탄에 전사했으나 독재자는 부하의 총탄에 쓰러졌다.
군인들의 시대는 가고 이제 더 이상 장군을 성인으로 우상화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이제 사람들은 '구국의 영웅'인 장군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사랑과 미움, 분노와 슬픔을 간직하고 표출한 진정한 인간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이제 제승당은 성지가 아니라 한려 수도의 관광코스 중 하나다. 제승당을 찾아온 '관광객'들의 표정에도 비장함은 없다. 실상 장군이 온갖 모함과 좌절과 고통을 겪고 다시 일어선 인간이 아니라 타고난 성인이었다면 그가 살았던 삶은 대체 어떤 감동과 의미를 줄 수 있겠는가. 성인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삶을 산 것일 테니 말이다. 오늘도 고해(苦海)를 건너는 중생들에게 장군이 성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안이고 희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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