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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섬, 이적도(伊賊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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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섬, 이적도(伊賊島)

강제윤의 '섬을 걷다' <13>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옛 해적의 근거지, 소이작도 휘청골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에는 두 개의 이작도가 있다.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자월도에서 배를 타고 소이작도로 건너왔다. 이작도(伊作島)의 옛 이름은 이적도(伊賊島)였다. 후일 이작도로 바뀌었다. 자월면 사무소가 발행한 안내서는 이적도란 이름이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전쟁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섬에 숨어 살며 해적질을 한 데서 유래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적들의 집터와 무덤이 섬의 북쪽 휘청골에 남아 있다고 전한다.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휘청골로 간다. 휘청골 해변은 작고 옹색하다. 큰 무리의 해적이 숨어 살기는 좁아 보인다. 해적들의 집터였을까. 숲속에는 돌무더기들만 더러 남았다. 숲에는 또 무덤 몇 기가 있지만 관리 상태로 보아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해적의 무덤은 아닐 것이다. 숲 속을 뒤져봐도 해적의 무덤은 찾을 길이 없다. 오랜 세월 돌보지 않았다면 해적들의 무덤은 비바람에 흩어져 다시 숲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 해적들의 소굴이었다고 전해지는 소이작도 휘청골 해변.ⓒ강제윤

서남해의 여러 섬처럼 이 섬 또한 해적 섬이 되기 이전에는 왜구의 거점이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고려 공민왕 13년(1364년)에 현물세를 운반하던 배가 이 섬 근처에서 왜구에 의해 자주 습격을 받자 무장과 전선 80여척을 동원해 수송케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 동북아에서 가장 위협적인 해적은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였지만 왜구가 아니라도 조선시대에는 해도에 숨어 살던 소규모의 해적집단이 있었다. 이들 해적을 포작이라 했다. 이들은 원래 양민들이었으나 관청의 수탈을 피해 섬에 숨어 살며 불법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가끔씩 왜구들과 결탁을 해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나라가 키운 도적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해상 지리에 밝은 포작들을 왜군과의 전투에 활용하기도 했다. 임란 이후에는 일부 포작들이 양민으로 환원 됐다. 이작도의 해적은 전란이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까지 해적질을 했던 것일까. 그들은 끝내 양민이 되지 못하고 해적으로 이 섬에서 생을 마감한 것일까.

해양 왕국의 역사는 해적의 역사

해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하지만 인류의 해양사에서 해적과 비 해적의 구분은 무의미 하다. 강한 군사 집단이 이웃 나라를 침략하여 노략질을 하고 땅을 빼앗고 백성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해적질과 무엇이 다를까. 역사가들은 이를 정복이란 이름으로 미화하기도 하지만 해양왕국의 역사가 바로 해적의 역사다. 먼저 세력을 키워 나라를 세운 해적 두목은 왕이 되고 뒤에 나타난 세력은 해적으로 이름이 남겨졌을 뿐이다.

중세 유럽의 가장 악명 높은 해적은 바이킹들이었다. 이들은 잉글랜드 섬과 러시아를 침략해 노르만 왕조와 키에프 공국을 세웠다. 16세기 대항해 시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의 악명 높은 해적이자 노예 상인 호킨스나 드레이크 등은 국가의 공인을 받은 해적이었다. 해군제독이 된 해적 두목 드레이크는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영 제국의 세계 지배에 일등 공신이 되었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 조선시대까지 한반도에 가장 큰 위협은 일본의 해적 집단인 왜구였다. 왜구는 단순한 도적이 아니었다. 지방 호족인 사무라이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통솔된 수군 집단이었다. 왜구들은 중국 해안을 비롯해 한반도 연안의 각 고을을 노략질하고 강간과 납치, 방화와 살인을 일삼으며 조정의 세곡선을 약탈해 갔다.

조선시대에도 포도청 종사관과 포졸을 사칭하고 해적질을 한 자들이 있었지만 그 세력은 중국이나 일본 해적들에 비해 미미했다. 중국에서는 '관리가 되려면 먼저 도적의 수령이 되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였다. 그 격언은 여전히 이 시대 이 땅에서까지 통용된다. 어떻게든 '정치를 하려거든 먼저 돈을 벌어라.' 티켓 다방으로, 건설, 토목업으로 재물을 모은 폭력배들이 지방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이 되고 국회의원을 꿈꾸는 것이 이 나라 현실이다. 이 땅의 정치인들이 나라를 거덜 내는 도적질만을 일삼는 것은 그들의 뿌리가 도적의 뿌리와 같기 때문이다.

손가락 바위, 손가락 법문

소이작도에서 대이작도는 코앞이다. 뱃길로 5분. 하지만 두 섬 사이를 연결하는 배는 불과 하루 세 차례. 여행자는 대이작도로 건너가는 막배를 기다리며 콩돌 해변을 걷는다. 해변의 끝에 '손가락 바위'가 있다. 주먹을 쥐고 검지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든 모습이 마치 거인의 손가락과도 같다. 거인은 무슨 까닭으로 내내 손가락 하나만을 들고 있는 것일까?

구지선사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이었다. 선사는 누구든 불법에 대해 물으면 한결같이 손가락 하나만을 세워 보일 뿐 일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선사를 시봉하는 동자승은 그 모습을 늘 옆에서 지켜봤다. 하루는 구지선사가 출타 중인데 어떤 스님이 법을 물으러 왔다. 객승은 동자승에게 물었다.
▲ 관음보살의 손가락 법문일까. 소이작도 손가락 바위는 반대 편에서 보면 해수 관음상이다.ⓒ강제윤

"선사께서는 법이 무엇이라 생각 하는가?"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객승은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구지 선사가 돌아오자 동자승은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구지 선사가 물었다.

"그 스님에게 했듯이 나에게도 대답 해 보거라. 불법이 무엇이냐?"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구지선사는 칼을 꺼내 동자승의 손가락을 싹둑 잘라 버렸다. 동자승은 비명을 지르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선사가 동자승을 불러 세우고 다시 물었다.

"그래 불법이 무엇이냐?"

동자승은 순간적으로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아차, 그런데 손가락은 이미 잘리고 없지 않은가? 그 순간 동자승은 퍼뜩 깨쳤다.

벽암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동자승은 대체 무엇을 깨쳤던 것일까. '무아(無我)'를 깨쳤던 것일까. 나를 내려놓을 때, 나의 주장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나는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나그네는 소이작도 손가락 바위 화상의 법문을 듣고도 쉽게 깨치지 못한다. 나그네는 여전히 스스로를 내려놓을 수 없다.

무정하게도 막 배는 소이작도에 닿지 않고 대이작도로 곧장 가버렸다. 손님이 없는 비수기에는 흔한 일이다. 주민들이야 자기 배로 건널 수 있지만 나그네는 불과 200미터 거리의 바다도 건너뛰지 못하고 갇혔다. 저 작은 바다도 건너 뛸 수 없는 몸이 생사의 바다를 건너는 초월의 꿈을 꾸고 있단 말인가!

대이작도, '섬마을 선생님'

우편선을 얻어 타고 대이작도로 건너왔다. 크고 작음은 상대적이다. 대이작도는 이름처럼 큰 섬이 아니다. 큰 대자가 붙은 것은 소이작도에 비해 크다는 뜻일 뿐, 섬은 면적 2.57㎢, 해안선둘레 18km에 불과하다.
▲ 우편 배달부는 우편선을 타고 소이작도와 대이작도 사이를 오간다.ⓒ강제윤

대이작도의 선착장에는 '영화의 섬'이라는 빛바랜 글귀가 눈에 띈다. 대이작도는 이미자의 노래 '섬마을 선생님'을 영화화한 '섬마을 선생님'(1967년 김기덕 감독 작품)의 배경이 됐던 섬이다. 나그네는 선착장을 지나 큰말 부근에서 대이작도의 주산인 부아산에 오른다.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159m에 불과한 부아산. 산정에는 70m의 구름다리가 놓여 있다. 정상에 오르니 대이작도 주변의 섬들이 발아래 인 듯 가깝다. 동쪽은 옹진군의 승봉도, 서북쪽은 자월도, 소야도, 덕적도, 서쪽은 문갑도, 굴업도, 각흘도, 남서쪽은 선갑도, 백아도, 울도. 동남쪽으로는 풍도, 육도, 대란지도 등 충남의 섬들도 지척이다.
▲ 대이작도 이작분교 아이들이 그린 벽화ⓒ강제윤

이제는 섬 마을의 많은 학교들이 사라지고 없다. 영화의 배경이 됐던 대이작도의 계남분교도 폐교된 지 오래다. 더 이상 순정을 다 바쳐서 총각 선생님을 사랑할 섬 처녀는 없다. 처녀들, 총각들, 모든 젊은 사람들이 떠나가 버린 섬마을은 적막하다. 섬도 늙었고 사람도 늙었다. 순정을 빼앗고 훌쩍 떠나버렸던 총각 선생님은 지금쯤 교감이나 교장이 되어 늙어갈 것이다. 그때 그 순정한 처녀는 어디로 갔을까. 뭍으로 나가 식모살이를 하거나 공장으로 갔겠지. 더러는 술집으로도 갔겠지. 그녀도 이제는 늙었거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더 이상 청춘도 없고 비애도 없는 섬은 쓸쓸하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부아산 정상, 정자에 앉아 '섬마을 선생님'을 흥얼거린다. 구성진 가락에 애틋한 가사. 그 시절뿐일까. 순정을 다 바친 이들에게 돌아오는 보답이란 기껏 비극적 결말뿐인 것이. 하지만 노래의 힘은 비애를 넘어 선다.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된다.

풀등, 바다의 오아시스

대이작도의 진짜 보물은 섬 안에 없다. 큰 풀안 해변 건너 바다 속에 있다. 밀물 때는 몸을 숨겼다 썰물 때면 모습을 보이는 모래섬. 사승봉도에서 자월도 서남단까지 펼쳐진 모래밭을 이곳 사람들은 풀등이라 부른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풀등으로 간다. 고기잡이가 없는 여름철에는 피서객을 태운 어선들이 자주 운항하지만 요즈음 같은 봄철에는 풀등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다. 민박집 주인에게 부탁해서 어렵게 낚시 배를 얻어 탔다. 10분 남짓 가니 망망하던 바다 위로 장대한 모래섬이 솟아 있다. 오늘은 '조금'이라 모래섬의 일부만 보이지만 '사리' 때면 동서 2.5km, 남북 1km의 모래 평원이 본 모습을 다 드러낸다. 모래섬은 마치 바다의 신기루 같다.

풀등에 발을 내리자 곱고 부드러운 모래땅이 나그네의 지친 몸을 받아 준다. 풀등은 신기루가 아니라 바다의 오아시스다. 예전에는 썰물 때면 풀등의 웅덩이에 갇힌 꽃게, 새우, 광어 등을 거저 주어 담을 수 있었다 한다. 서해 바다에 물고기들이 넘치던 때 이야기다. 오늘 풀등은 바다의 사막처럼 황량하다. 겨울 동안 풀등을 떠나 있던 거주자들 대부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수온이 높아지는 5,6 월이면 그들이 다시 몰려 올 것이다. 그 때는 깊은 바다 속에서 추위를 피하던 골뱅이도 풀등으로 올라와 몸을 숨기고 방게들도 무리지어 다닐 것이다.

풀등 유역 바다의 광대한 모래밭은 옹진군이나 토건업자들이 탐낼 만큼 질이 좋다. 토건업자들에게는 건축 자재일 뿐인 모래가 바다생물들에게는 산란과 생존을 위한 생명의 터전이다. 오랜 세월 이 바다 모래밭에서 나고 자란 갯것들이 섬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20여 년 간 인천 앞바다에서 사라진 모래는 무려 2억㎢에 달한다. 풀등도 그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다. 원래 50만 평에 달하던 거대한 풀등이 지금은 30여 만 평만 남았다. 옹진군이 10년 넘게 풀등 인근의 모래 채취를 허가해준 탓이다.

'생태계 보전 지역' 지정 그러나 계속되는 탐욕

토목 건설공화국인 이 나라는 농어촌 섬 지역까지도 땅을 파헤치고 모래를 채취하고 산을 뭉개는 기계음으로 조용할 날이 없다. 지방자치 단체장과 지방의원, 지역 토건업자들은 이 나라 자연을 파괴 하는 또 다른 주역들이다. 이들은 지역의 절대 권력자다. 지방분권이 과거에는 경제 권력만 쥐고 있던 토호들에게 정치권력까지 넘겨주고 말았다. 권력을 장악한 많은 토호들이 토건업자다. 이들은 의원이나 단체장이 되면 '바지' 사장을 세워두고 여전히 토건업체를 운영한다. 세비를 받아가며 지역 주민이 아니라 자기 사업체를 위해 일한다.

옹진군의 토호들도 인천 앞바다와 풀등의 모래 유실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부는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압력에 자극 받아 뒤늦게 풀등의 경관과 생태적 가치를 깨닫고 2004년, 풀등을 '생태계 보전 지역'으로 지정 고시했다. 풀등은 생태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 희소성 때문에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도 크다. 하지만 정부는 애초에 주민들과 약속한 74㎢가 아니라 55㎢만을 생태계 보전 지역으로 지정했다. 모래 채취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자치단체와 지역 토호들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생태계 보전 지역'에서 제외된 19㎢의 모래밭은 언제든지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는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바다의 모래 채취가 재개되면 '생태계 보전 지역'으로 지정된 풀등 또한 무사할 수 없다. 24시간 바다 속에 유압 호스를 넣어 모래를 빨아들이면 허가 지역뿐만 아니라 물길을 따라 인근의 풀등이나 해수욕장의 모래 또한 유출될 것은 자명하다. 최근에도 옹진군은 모래 채취 허가를 내주려다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그나마 주민들이 풀등의 관광자원으로서 가치를 깨달아 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굴을 깨는 마지막 세대

부아산을 내려와 작은 풀안 해변을 걷는다. '조금' 때라 물은 조금밖에 빠지지 않았으나 오늘도 할머니들은 굴을 깨러 나온다. 할머니 두 분이 조새가 담긴 대바구니를 매고 등에는 배낭을 지고,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모래밭을 걸어 해안가 바위로 간다. 바다가 굴을 살리고 굴은 사람을 살린다. 이 할머니들이 떠나고 나면 누가 굴을 깨러 갈까. 할머니들은 바다에서 굴을 깰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 대이작도 부아산정에서 본 풀등.ⓒ강제윤

할머니 한분은 굴 밭으로 가기도 전에 힘에 겨워 주저앉는다. 대체 몇 십 년을 바닥에 엎드려 굴을 깬 것일까. 더 이상 펴지지 않는 허리. 할머니의 굽은 등은 굴 깨는 조새처럼 휘어졌다. 또 한 분의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해변을 걸어간다. 할머니는 팔십은 족히 넘어 보인다.

"할머니, 굴 깨러 가세요?"
"그래요."
"많이 힘드시죠?."
"힘들지, 힘들어요."
"그럼 좀, 쉬지 않으시구요."
"쉴 수가 있나. 굴이라도 안 깨면 십 원 한 장 안 나오는데. 그걸로 쌀도 사고 그래야 먹고 살지"
"그래 지난 겨울에는 굴 깨서 돈 좀 모으셨어요."
"네 사리나 했어도 100만원도 못 했수."
▲ 썰물 때만 드러나는 모래섬, 풀등.ⓒ강제윤

한 달에 두 사리가 있으니 네 사리면 두 달이다. 물의 들고 남에 따라 굴을 깨는 시간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다. 찬바람 맞으며 한 달 내내 굴을 깨도 50만원 수입이 안 되는 것이다. 노인들은 한철 굴을 깨서 번 수입으로 일 년을 산다. 자식들은 다들 뭍으로 나가 다시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제 가족 부양 하느라 노부모 건사할 여력이 없다. 세상의 모든 자식은 죄인이다.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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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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