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는 연화도와 지척이지만 정기선이 없다. 민박집 배를 빌려 타고 우도로 건너왔다. 자는가 싶던 바람이 다시 거세진다. 파랑이 일고 먼 바다에 나갔던 작은 어선들은 서둘러 포구로 돌아온다. 우도를 둘러보고 두미도로 갈 생각인데 바람 골 터지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배가 뜰 수 있을까. 폭풍주의보는 내리지 않았지만 바람 부는 날 바다는 예측불허다.
바다처럼 섬살이도 늘 예측불허. 우도의 주민들은 대부분 고개 넘어 움푹 파인 분지 안에 둥지를 틀고 산다. 뱃머리 선창가에는 몇 채의 집들만 다닥다닥 붙어 있을 뿐. 초입의 컨테이너 박스는 여름철 상점으로나 사용하는지 문이 잠겨 있다. 공동 우물은 뚜껑이 덮여 있다. 들머리 첫 집은 민박을 하고 낚시 배도 부린다. 뒷집은 대문이 잠겨 있다. 겨울 한철 출타 중인 모양이다. 겨울에 일거리가 없는 노인들은 섬을 떠나 자식들 집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돼서야 돌아오기도 한다.
고갯길을 넘으면 우도의 큰 마을이다. 이 섬에서도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은 당산나무들이다. 우도의 당산나무는 생달나무와 후박나무다. 생달나무 세 그루는 외가지로 곧게 뻗어 잔가지를 쳤고 후박나무 한 그루는 네 개의 큰 가지로 갈라져 자랐으나 그중 작은 가지 하나는 바람에 쓰러져 고사했다. 나무는 모두 거목이다. 나무는 네그루이면서 동시에 한그루이기도 하다. 좁은 땅에 뿌리내린 나무들은 이미 오래전에 하나로 뒤엉켜 양분을 공유할 것이다. 당산나무는 5백 년 동안이나 마을을 지켜준 공로를 인정받았다. 천연기념물 344호, 보호수가 됐다.
구멍섬(穴島)을 찾아 간다. 구멍 섬이 있는 해안에는 한 채의 집만 외롭다. 이 집 또한 섬을 떠나 출타 중이신가. 문이 잠겨 있다. 작은 마당은 금잔디가 깔려 정갈하다. 화단에는 굵은 회양목 한 그루. 마루에 놓인 전기밥솥과 냉장고가 사람살이의 흔적이다. 삼 칸 집. 부엌과 툇마루 사이에 작은 문을 뚫어 음식이 드나들게 했다. 안방 출입문 위 상인방에는 두 개의 액자가 걸려 있다. 할머니 초상화에는 스냅 사진이 세장이나 끼워져 있다. 할머니의 독사진은 어느 식물원 앞인 듯하고 두 장은 자녀들과 찍은 사진이다. 왼쪽의 액자는 손자의 돌 사진이다. 현대스튜디오에서 촬영됐다.
벽에 걸린 2002년 월드컵 기념 시계는 오후 1시25분을 지나고 있다. 내려진 전기 차단기는 집 주인이 장기출타중임을 알려준다. 행랑채 출입문은 비닐 창호였으나 지금은 찢겨져 있다. 사랑채 벽에는 그물이 걸렸고 뒤 안 헛간에는 어구며 농기구들이 가득하다. 집은 나무와 돌과 흙과 물, 바람과 햇볕으로 빚어졌다. 바닷가 쪽은 시누대를 심어 바람막이를 했다. 집주인은 봄이 되면 돌아올까.
해변의 고구마 밭을 지나 구멍섬으로 간다. 구멍 섬은 작은 무인도다. 섬의 앞뒤로 구멍이 뻥 뚫려 있다. 그래서 구멍섬이다. 섬에 구멍을 뚫은 것은 파도일 것이다. 문득 지난 겨울 태백에서 본 자개문(子開門)이 생각난다. 구문소의 자개문 또한 물이 바위를 뚫어 생긴 구멍이다. 옛날 사람들은 매일 자시에만 열리는 자개문을 지나면 사철 꽃이 피는 오복동(五福洞)이란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물이 큰 바위를 뚫는 일은 희유한 일이니 그 문을 지난다면 이상향엔들 어찌 못 가랴. 저 구멍섬을 지나도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을까. 이어도로 이어지던 문도 저런 문이었을까. 구멍섬 옆에서는 늙은 해녀가 세찬 물결 가르며 물질한다. 문이 열려 있어도 그녀는 이어도에 도달 할 수 없는 것일까.
바다랑호 항로의 끝, 두미도
우도 뱃머리로 바다랑호가 입항한다. 이 항로에서도 우도와 오곡도 같은 작은 섬에는 손님이 없으면 배가 서지 않는다. 이장 집에서 선장에게 미리 연락해 배를 세웠다. 바다랑호는 통영 항에서 출항해 오곡도를 거처 우도까지 왔다. 선실 안은 제법 많은 승객들로 웅성거린다. 우도를 떠난 배가 탄항, 하노대, 상노대, 산등, 두미 남구를 지나 종착지인 두미 북구에 도착한다. 배는 여객을 태우고 통영으로 회항한다. 가는 길은 직항이다. 작고 외진 섬들만을 다니는 보조 항로. 이 외딴 섬들을 다니는 뱃길에는 승객이 많지 않아 선사에서 수지를 맞추기 어렵다. 그래서 국가에서 선원들의 월급과 기름 값을 '보조'해 준다. 낙도 주민들은 이런 '보조 항로' 덕분에 육지와 소통 할 수 있다.
두미도 북구 포구에서 내린 사람은 도합 여섯. 주민 두 사람과 나그네, 사내 아이 하나를 데려온 부모는 낚시 가방을 맸다. 뱃머리 어느 집 앞, 줄에 널려 말라가는 도다리를 구경하는데 노인 한분이 말을 건다.
"어디서 오셨소?"
"멀리서 왔습니다."
"혼자서 오셨소?"
"예."
서해안의 섬들에서는 좀처럼 먼저 말을 걸어오는 주민들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말을 붙여도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관광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섬들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만 외지인이 드문 낙도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남해안은 외딴 섬이라도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더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아무래도 분단 상황에 기인한 바가 큰 듯하다. 특히나 서해 북단의 섬들은 오랜 세월 극도의 군사적 긴장 상태에 있었으니 그 피해의식이 클 것이다.
두미도는 해안 선 11km의 작은 섬이지만 섬의 산은 높다. 섬 중앙의 천왕산(467m) 기슭에 마을들이 위태롭게 들어 서 있다. 두미 북구 마을도 급경사에 집들이 층계마다 서 있는 형국이다. 마을을 오르는 길이 곧 등산로다. 몇 그루 밀감나무에서는 거두지 않은 밀감들이 그대로 말라 간다. 노지 밀감은 신맛이 강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손도 대지 않고 버려둔 것이다. 신 것을 좋아하는 나그네는 밀감을 따서 허겁지겁 배를 채운다. 마을의 산 중턱 쯤에 붉은 벽돌 건물 한 채가 언뜻 보인다. 마을의 당집이라도 되는 걸까. 풀숲을 헤치고 건물에 들어서 보니 옛날 디젤 발전소 건물이다. 해저케이블로 전기가 들어오면서 발전소는 폐쇄됐다.
통영의 섬이지만 생활권은 삼천포로 이어지고
두미도에는 60여 호의 주민들이 산다. 남구와 북구에 각각 반씩 나뉘어 살지만 마을은 북구가 약간 더 크다. 고기잡이가 주업이다. 파도를 막아줄 지형이 없어 양식업은 불가능하다. 주민의 80% 이상이 노인들이니 농사를 짓기 어렵다. 비탈 밭에 경운기가 들어갈 수 없어 섬에 두 마리 뿐인 소로 밭을 갈기도 하지만 그도 여의치 않으면 괭이로 직접 일궈야 한다. 농사의 고통이 심하니 겨우 마늘이나 고구마를 심어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정도다.
두미도는 통영시에 속한 섬이지만 주변의 욕지도나 노대도 사람들과 달리 섬사람들의 생활권은 삼천포다. 통영보다 삼천포가 더 가까워서가 아니다. 100여 년 전, 남해 출신 사람들이 처음 두미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남해 사람들은 또 대처인 삼천포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두미 섬사람들도 자연히 삼천포로 핏줄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오일장도 삼천포 장을 보러 가고 수산물도 삼천포에 가서 판매한다. 삼천포는 4, 9장. 오일장 날에는 통영에서 오는 바다랑 호가 삼천포까지 항로를 이어준다. 결혼식도 남해나 삼천포에서 한다. 아이들 교육도 삼천포에서 시킨다.
통일 신라 때 금동불상이 발견된 섬
지금은 섬에 절이 없지만 마을 주민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불교 신자다. 교회가 있어도 신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욕지도나 노대도 주민 80% 이상이 기독교 신자인 것과는 정 반대다. 민박집 주인은 돌아가신 어른들에게 두미도가 본래 둔미(屯彌)섬이었다고 들었다 한다. 미륵이 머물다간 섬. "연화세계를 알려거든 세존께 물어보라"(欲知蓮華藏頭尾問世尊) 경전 속의 두미(頭尾)든 둔미(屯彌)든 두미도는 연화도 등과 함께 남방 불교의 자장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섬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1937년 두미도의 감로봉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 입상이 발견되었다. 불상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회수돼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남해 금산에서 세존도, 두미도, 욕지, 연화도를 거쳐 미륵도까지 남해의 섬들은 이미 신라 때부터 불국토를 지향했던 것이다.
4일, 삼천포 오일장이 있는 날이라 섬은 아침부터 부산하다. 통영에서 들어온 배가 섬사람들을 삼천포장까지 실어다 주고 장을 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실어올 것이다. 민박집 안주인도 객의 아침 밥상을 차려 놓고 장을 보러 갔다. 바깥주인은 고기잡이 나갔다. 이번 겨울 두미도에서는 도다리와 물메기(곰치)가 많이 잡힌다.
마을 회관 앞에는 두미 개척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다. 1996년에 세워졌으니 그로부터 또 12년이 지났다. 오랫동안 비워졌던 섬에 다시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세월이 그리 길지 않다. 여러 섬들을 다녀보니 유행처럼 섬마다 선호하는 비석들이 다르다. 어떤 섬은 유난히 선정비나 공덕비가 많고 어떤 섬은 열녀비가 많다. 또 어떤 섬은 효자비가 많다. 비석은 그 섬이 중요시 하는 가치의 표현이거나 권력 관계의 지표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을 건너자 길옆에 두미 개척 60주년 비가 낡아간다. 욕지도에도 개척 기념비가 있었다. 이 근방 섬사람들의 중심 가치는 개척 정신인 듯하다.
작년에 칠십, 올해 육십, 할머니는 나이를 거꾸로 드시고
하천 옆 양지 녘에 할머니 한 분이 칼을 들고 그물 손질을 한다. 할머니는 로프에 붙은 그물을 긁어낸다. 찢겨진 그물을 뜯어낸 뒤 로프를 재활용하기 위해서다.
"어디서 왔소?"
"아주 멀리서 왔습니다."
"구경하러 왔습니까? 친척집에 왔습니까?"
"그냥 구경삼아 왔어요. 할머니."
"우리 집에도 오라고 하고 싶지만 메느리도 있고 아들도 있으니 내 맘대로 못합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여기는 뭐 바닷가하고 산이니 구경할 데가 별로 없어요. 밥은 사자셨소?"
"예, 할머니. 할머니는 여기가 고향이세요?"
"등 너머. 대판이라고, 여서 멉니다. 산 넘어야지. 옛날에 이 마을로 시집 왔습니다. 전엔 거기도 많이들 살았는데 지금은 안 삽니다. 여도 이젠 빈집이 많아. 좋은 학교도 있었는데 다 뿌사져 빌고."
이 외진 섬에서 할머니는 또 어떤 세월을 살아오셨던 것일까.
"밭 일 하고, 옛날에는 밭 메고, 베 짜고, 삼 삼고, 모시 삼고, 배 짜. 옛날에는 옷을 호빡 길쌈 해가 안 해 입었습니까. 보리 갈아 도구탱이 찍어가 밥 해먹고, 밀 심어서 국시 해먹고 개떡 해먹고. 요새 젊은 사람들은 힘들다고 농사일 안 하재. 바다 배 타고 다니면서 고기나 잡어 폴고."
할머니는 섬에서는 큰 아들 며느리랑 함께 산다. 아들 둘, 딸 둘은 부산에 산다.
"부산에는 자주 가세요?"
"젊어서는 자주 갔는데 요즈음은 잘 못가요. 거기 가면 돈 많이 들어."
"할머니 연세는 어찌 되세요?"
"육십입니다."
"에이 할머니도 참."
"작년에 칠십이었으니께."
"그럼 재작년에는 팔십이셨겠네요?"
"예."
"해마다 나이가 줄어드시는군요?"
"그래도 서른 될라먼 아직 멀었습니다."
할머니는 나이를 거꾸로 드신다. 마침내 0살이 되면 할머니는 이승을 하직하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더 이상 따지 않는 고향의 감나무들
폐교된 초등학교를 지나 두미 남구로 간다. 북구에서 남구로 가는 길은 산길이다. 남쪽 섬의 가을이나 겨울 산길을 갈 때는 도시락이 없어도 좋다. 운이 나쁘지만 않다면 산열매나 과일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어선이나 여객선을 이용하니 굳이 몇 개의 고개를 넘어 산길을 다니는 주민은 없다. 옛 길은 뭍에서 온 여행자들이나 다니는 잊혀진 길이 되었다. 산길의 중간에 있는 마을은 마을 전체가 폐가다. 폐촌이 된 것이다. 섬을 떠나 뭍으로 간 사람들, 이승을 아주 떠나간 사람들. 그들에게 이제 더 이상 고향은 없다.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감나무에 감이 익어도 더 이상 감을 딸 사람이 없다는 뜻일까. 옛 집터 감나무에는 홍시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나그네는 감을 따 점심 공양을 한다. 산에 먹을 것이 풍성한지 새들도 잘 익은 홍시만 더러 파먹었을 뿐 나머지는 입도 대지 않았다. 맛난 것부터 찾는 성정은 사람이나 새가 다르지 않다. 단 열매들이 사라지고 나면 저 감들도 새들의 요긴한 식량이 될 것이다. 옛 마을의 집들은 허물어지고 사람은 떠났어도 오늘도 마을 앞 바다로 배들은 무시로 오고 간다.
두미도 자생 겹동백을 만난 행운
세 개의 고개를 지나서야 두미 남구마을이다. 남구 마을도 절벽에 매달린 꿀 벌집처럼 온통 비탈진 언덕에 집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의 초입부터 동백이 지천이다. 보기 드문 백동백도 꽃이 피었다. 변종인 백동백은 씨앗을 심으면 다시 붉은 꽃이 핀다. 꺾꽂이를 해야만 흰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여기서 자생 겹동백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개량종 겹동백은 꽃이 풍성하긴 하되 동백이라 이름 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격이 떨어진다. 동백 특유의 절조와 단아함이 없다. 그런 까닭에 겹동백이 보이면 서둘러 눈을 돌리고는 했었다. 하지만 오늘 두미도의 자생 겹동백은 겹동백에 대한 편견을 일시에 날려버린다. 홑동백에 뒤지지 않는 기품과 결기가 느껴진다. 마을 사람들이 산에 자생하는 고목 동백나무 가지를 꺾어다 심었다. 나그네는 자생 겹동백의 자태에 반해 쉬이 발길을 돌릴 수가 없다. 두미 남구 마을은 동백나무 고목들이 방풍림을 이루어 마을의 안녕을 지킨다.
방파제 안 부두에서는 어장을 보고 온 내외가 배 위에서 생선을 분류 중이다. 부부는 삼천포에 살면서 어장 철에만 여자의 친정이 있는 두미도에 들어와 고기를 잡는다. 광어나 도다리, 간재미 따위 생선은 배의 바닥에 넣어 살리고 물메기는 배를 따서 손질 한다. 선창가는 온통 줄에 걸려 말라가는 물메기 천지다. 물메기는 말린 것이 더 맛있다고 여자가 알려준다.
광주리에 담긴 물메기 한 마리, 아직 숨이 붙어 있는지 눈을 꿈뻑거린다. 여자는 꿈틀거리는 물메기의 머리에 칼을 꽂아 숨통을 아주 끊어버린다. 등줄기를 따라 칼집을 넣고 내장을 파낸다. 물메기 손질이 끝나자 내외는 활어를 싣고 삼천포로 떠난다. 호위병처럼 갈매기들이 뒤 따른다. 늙은 친정어미는 홀로 남아 할복한 물메기들을 널어 말릴 것이다. 그렇게 또 한 세월이 간다.
블로그 http://bogilnara.tistory.com
누리집 http://www.pogildo.pe.kr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