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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이름도 없이 '아무것이네' 하고 부르고

강제윤의 '섬을 걷다' <5> 연화도

뱃머리

연화도 뱃머리가 기계음으로 요란하다. 절단기에 잘게 토막 난 생선들이 차곡차곡 박스에 쌓인다. 가두리 양식장으로 갈 사료들이다. 냉동 청어, 갈치, 정어리 등은 통영 항으로 수입 돼 각지의 양식장으로 흘러든다. 작업 중인 사내는 2만 마리의 우럭을 키운다. 그의 양식장에는 이십 삼사 킬로들이 생선 사료 박스가 하루에 30개 정도 투입된다. 자연산 물고기들은 자연산 먹거리를 먹지만 양식장의 물고기들은 중국산 냉동물고기를 먹는다. 몸은 먹은 대로 간다. 생선의 맛이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연화도와 우도 사이 가두리 양식장에서 길러지는 어종은 대부분이 우럭이다. 도미는 연화도에서 단 두 가구만 키운다. 도시의 횟집에서는 도미의 가격이 비싸지만 산지에서는 우럭보다 더 싸다. 현재 연화도에서 출하되는 우럭은 500g에 6500 원 선이고 도미는 1kg에 8000 원 남짓이다. 쌀 때는 우럭이 500g에 4000 원까지 떨어진 적도 있었다. 그때는 사료 값도 안 나왔다. 값이 올라도 8000 원을 넘어서지 않는다. 요즈음의 가격은 현상유지 수준이다. 횟집에서 큰 것을 선호하지 않는 까닭에 양식 생선은 크다고 가격을 더 받는 것이 아니다. 연화도에서는 36가구가 가두리 양식업에 종사 중이다.
▲연화도 뱃머리. 우럭 양식장의 사료로 쓰일 냉동 생선들.ⓒ강제윤

뱃머리에 식품차가 들어왔다. 대파, 숙주나물, 브로콜리, 계란, 해남 배추도 싣고 왔다.
"오늘은 우유도 없네."
"대리점이 문을 안 열었는데 내보고 어찌라고."

대파 값이 비싸다. 한단에 5000원.
"김은 없나?"
"김은 다 나갔어요."

두부는 한모에 1000원.
"오늘 다 시무식 한다고 판장도 문을 여나. 그라이 물건이 없제."

장돌뱅이 사내는 삼천포에 살며 트럭에 물건을 싣고 욕지도와 연화도를 넘나든다. 욕지도는는 일주일에 다섯 번, 연화도에는 한번씩 들른다.
"배추 다섯 단 가 온나."
"모레 아침에 나오소."

섬에 들어오지 않는 날은 주문을 받아 배에 실어 보내주기도 한다.

결핍에 시달리다

연화도(蓮花島). '연화세계를 알고자 하거든 그 처음과 끝을 세존에게 물어보라'(欲知蓮華藏頭尾問世尊). 세존께서 알려준 연화세계가 이 섬이었던가. 옛 사람들이 꿈꾸던 유토피아, 연화세계란 대체 무엇일까? 헐벗고 굶주림이 없는 세계. 그것이 옛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던 이상향이고 무릉도원이며, 산해경 속의 남류향이며, 지리산의 청학동이고, 태백산의 오복동(五福洞)이고, 비로자나불이 계신다는 연화세계가 아니겠는가.

오늘의 나는 어떤가? 나는 더 이상 밥 굶거나 헐벗지 않고, 추위에 떨지도 않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연화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또 어디서 연화세계를 찾자고 길 떠나 헤매는 것일까. 옛 사람들이 꿈에도 열망하던 그 세계에 살면서도 어째서 나는, 우리는 늘 결핍에 시달리는가. 진정으로 연화세계에 이르는 길은 무엇일까. 스스로 만족함을 아는 것일까. 하지만 만족이란 또 얼마나 어려운 경지인가. 모자람을 참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이 만족이 아닌가.

연화봉(212m)에 오른다. 산은 가파르지 않고 원만하다. 연화도(蓮花島)의 지명 유래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섬의 모양이 연꽃처럼 생긴 데서 유래했다 한다. 또 하나는 연화도사의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연산 임금 시절 연화도사가 세 명의 비구니와 함께 섬에 들어와 암자를 짓고 수도 생활을 했다. 세월이 흐른 뒤 연화도사가 열반에 들자 비구니들은 도사의 유언대로 바다 속에 장사 지냈다. 바다에서는 연꽃이 피어났다. 연화 도사의 전설이야 전설이니 진위를 따질 것은 못 된다.
▲연화봉 정상. 연화도인과 사명대사 토굴터라는 곳이 정상 부근에 있다.ⓒ강제윤

하지만 연화도사의 수도처에 후일 사명대사가 들어와 수도했다는 전설까지 있고 보면 섬이 불교와 인연이 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연화도만이 아니다. 통영 앞바다의 여러 섬들이 불교문화의 자장권에 있었던 듯하다. 유배자의 후손들이나 도망노비, 관의 수탈에서 달아난 사람들이 섬에서 피난처를 찾은 것처럼 지배세력의 탄압을 피해 불교 수행자들이 찾아낸 피난처 중 하나가 이 남해 바다의 섬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뭍에서는 이룰 수 없는 연화세계, 불국토의 꿈을 섬에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연화도와 욕지도, 두미도와, 세존도, 미륵도 등 불교에서 비롯된 통영 바다 섬들의 이름은 그 꿈이 남긴 흔적이 아닐까.

연화봉에 정상에 올라서 보면 연화도는 결코 연꽃 모양이 아니다. 섬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연화도의 이름이 섬의 형상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은 자명하다. 그보다는 연화, 욕지, 두미, 상노대, 하노대, 갈도, 국도, 세존도, 미륵도, 연대도 등의 섬들이 둥그렇게 펼쳐져 그리는 모습이 흡사 연꽃 같다. 연화세계는 하나의 섬으로 이룰 수 있는 세계가 아닌 것이다. 넓은 바다에 펼쳐져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이루는 동심원(同心圓). 서로 의지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섬들 간의 연대 속에 연화세계는 연꽃처럼 피어오른 것이 아니었을까.

오직 한 생각

사람이 섬으로 와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풍경일까. 휴식일까. 싱싱한 해산물들일까. 얻을 수 있다면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하지만 이들은 섬에 오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지 오롯한 자신의 것은 아니다. 누구도 얻지 못하고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생각'뿐이다. 새로운 '한 생각'을 얻는 일이야말로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한 생각'을 떨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섬에서는 걷기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자동차의 방해 없이 걸음에 몸 맞기고 온전히 걸을 때 생각은 자유를 얻는다.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한 생각이 오고 한 생각이 간다. 온전한 걷기란 단지 다리 근육의 운동만을 의미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잠들어 있는 생각을 깨우고 사유의 폭을 확장 시키는 정신의 운동이기도 하다.

연화도 부둣가에는 몇 개의 포장마차들이 나란하다. 양식업을 하는 어민들이 외지인들을 상대로 생선도 팔고 밥도 파는 간이 식당이다. 저녁을 먹으러 들렀다가 연화도 어촌 계장님과 합석을 했다. 어촌 계장님이 20대였던 30여 년 전에는 완도의 청산도나 보길도까지도 삼치 낚시를 많이 갔었다고 회상한다. 일본 수출이 잘 될 때였으니 통영 배들이 완도는 물론 제주 근방까지도 무시로 드나들었다. 청산의 여서도에 갔을 때는 산에 방목하는 소들을 봤던 기억도 난다고 한다. 작년 말에 여서도에 갔을 때 나 또한 산에 울타리를 처 놓고 방목하는 소를 봤던 터라 반갑게 맞장구를 친다.
▲하늘은 잠시 노을 빛 연화세계를 보여 주지만 저 곳은 여전히 건널 수 없는 나라!ⓒ강제윤

"그때 들은 이야긴데 시집온 색시가 3년이 지나도 자기 밭을 못 찾았다는 말이 있었어요."

그랬겠지 여서도 그 작은 섬에 산비탈의 다락 밭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 당시에는 일본 쪽 섬들까지 고기잡이를 다니곤 했다. 이제 섬사람들도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은 드물다. 양식업이 아니고서는 바다에서 먹고사는 일이 수월치 않다.

"어족이 급속도로 고갈 돼 지금은 고기잡이배들이 거의 없어졌어요. 작년이 저 세상 같다니까."
섬마을 포장마차에 탄식의 밤이 깊어간다.

성도 이름도 없이 '아무것이네' 하고 부르고

아침 일찍 연화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길 가 집 마당에서 할머니 한 분이 호박을 말리고 있다. 호박을 잘게 썰어서 말리지 않고 한통의 반을 잘라 속을 파내고 통째로 말리는 모습이 특이하다.
▲저 늙은 호박들이 꾸득꾸득 마르면 길게 썰어 묵나물을 만든다.ⓒ강제윤

"할머니 어째서 호박을 통으로 말리세요.?"
할머니는 호박을 통으로 건조 시켰다가 꾸득 꾸득 마르면 길게 썰어서 묵나물을 만드실 거란다.

"고향은 어디세요?"
"거제서 나서 열 여덟에 시집 와 이라고 있습니다. 아파트는 못 살겠고 그래서 이라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가서 살아도 봤지만 답답해서 다시 돌아 왔다.

"열, 열하나씩 살았어요. 씨아재, 씨누들 여기서 다 키와서 시집 장가 보냈지. 씨아재는 또 미국 가고, 한 씨아재는 죽고, 영감도 십년 전에 돌아가고."

이 좁은 집에서 열씩, 열 한명씩 북적이며 크고 자라 지금은 다들 멀리 가고, 더러 죽기도 하고 할머니 혼자만 산다. 혼자 살기에도 넓어 보이지 않는 집에서 예전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할머니?
"팔십 둘, 설 쇠면 셋이고. 다리가 아파서 염증 수술 하고 마산까정 맨날 약 타러 다닙니다. 걱정이 태산이요 태산. 돈도 없고."

할머니는 통영까지 배를 타고 나가 손자들 사는 마산의 병원까지 또 버스를 타고 가서 약을 타 오는 일이 고역이다. 할머니는 아직 불을 때고 사는 부엌을 수수빗자루로 청소한다.

"사람 사는 것도 아니지."
누추한 부엌살림을 들킨 것이 민망하신지 할머니가 괜한 말씀을 하신다.

"불을 때서 난방을 하세요?"
"나무도 때고 추운 날은 전기도 꼽고."

"나무는 어디서 구하시는데요?"
"영감이 해놓고 갔어요."

"십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요?"
"예, 빈집에 해놓고."

할머니는 10년 전에 할아버지가 해놓고 간 나무를 아끼느라 몸이 성할 때는 손수 해다 땠을 것이다. 몸에 병이 생겨 움직이기 힘든 이즘에야 아껴 둔 나무를 가져다 때는 것이겠지.

"무릎에 물이 고여서 두 번 수술을 했어요. 내일이나 죽을 줄 알면 수술을 안 할 텐데. 90까지 살게 되면 밥도 못해 먹고 자식들 원망 들을 것 같애서 죽으나 사나 수술을 했지요. 입때 까장 병원 모르고 살았는데 병원에 갇혀 있으려니 좀 갑갑했어야 말이지. 죽을 때 까정 병원을 모르고 살어야 하는데. 맘대로 안되는 기고."

마산의 큰 아들은 진작에 세상을 떴고 며느리가 손자들이랑 산다.
"큰 아들은 죽고. 메느리가 손자들 돌보고 사니라 고생이 많제. 내사 농사 이놈 갖고 애들 공부 시키고 한다고 허리도 꼬부라지고."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섭섭하시죠?"
"하나 씩 죽어야 하제. 늙어서 둘이 있으면 어쩔거야.
기둥에는 10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명패가 여태 걸려 있다

"할머니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성도 이름도 없어요. 누구 즈그 어메라고 부르고. 아무 것이네 하고. 성도 이름도 없이 살아요."
"절에 다니세요?"
"절 지을 때 나가 밥해 줬습니다. 뒷집 할매하고. 나가 일흔 한 살부터 3년간 밥을 해줬지. 뒷집 할매는 돌아 가싯고."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고산 스님이 10여 년 전 연화도에 연화사를 지을 때 이야기다. 절 짓는 그 많은 인부들 밥을 칠순이 넘으신 노인들 두 분이 했었다. 평균 10여명 매일 세끼씩. 어떤 날은 60여명의 밥을 해준 날 도 있었다. 한 달 50만원을 수고비로 받았다.
▲성도 이름도 없이 '아무것이네' 하시던 할머니, '윤필순' ⓒ강제윤

"요새도 큰 스님이 잘 해요. 공양 했냐고 걱정도 해주시고. 그 때는 고산 큰 스님도 여기 와서 주무시기도 했었지."

할머니는 마당에 널어 말리던 메밀을 까불러 나간다.
"감기 들면 끓여먹고. 열을 내린다 해요. 메밀이."

혼자 살지만 할머니는 아픈 다리 이끌고 종일 움직인다.
"가만있으라 한들 가만 못 있어요. 일해 먹던 사람이 돼 놔서."
'챙이'로 메밀 터는 모습을 지켜보다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는데 할머니의 목소리가 발길을 붙든다.

"나 이름은 윤 필순이요."
▲ 연화도ⓒ프레시안

필자 홈페이지:http://pogildo.pe.kr
블로그http://blog.naver.com/bogilnara

(매주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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