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합실은 평등한 공간이다. 대합실에서는 누구나 일개 여행자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합실은 일상적이면서도 비일상적인 공간이다. 섬으로 가는 뱃길 또한 그러하다. 배에 따라 더러 1등실, 2 등실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눈속임에 불과하다. 망망대해의 풍랑과 폭풍우 앞에 던져진 가랑잎. 가랑잎에 몸을 실은 자들은 모두가 한 운명이다. 1등실 침대칸에 누워 있다 해서 폭풍을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섬으로 가는 뱃길은 평등하다. 통영항 여객 터미널 대합실. 먼 바다의 풍랑주의보로 몇몇 항로의 배는 결항이다. 겨울 섬의 뱃길은 자주 끊긴다. 오늘, 욕지도행 배는 뜬다.
연화도를 거처 욕지도에 이르는 쾌속 여객선의 이름은 샹그리라 호다. 거센 폭풍을 뚫고 여객선은 샹그리라로, 이상향으로 가는 것일까. 선체에 자주 물을 뒤집어쓰면서도 배는 두려움 없이 바닷길을 가른다. 겨울이라 안개를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거친 파도와 난폭한 바람이 자주 뱃길을 가로 막아도 그들은 피해 갈 수가 있다. 안개는 도무지 속수무책이다. 바람에도 길이 있고 파도에도 길이 있지만 안개에는 길이 없어 안개의 군단에 포위 되면 만 마력의 배나 천만 톤의 배도 꼼짝없이 포박 당한다.
여행자를 실어 나르는 것은 무엇일까. 배의 기관일까, 속도일까. 여행자를 공간 이동 시켜 주는 것은 기관도, 속도도 아니다. 시간이다. 시간에 몸을 맡긴 생의 여행자들. 그래서 어떠한 여행도 시간 여행 아닌 여행이란 없다. 여행자는 과거로 갈 수도 있고 미래로 갈 수도 있다. 시간 속을 떠돌 수 있는 것은 여행자만의 특권이다. 어느 곳도 같은 공간이 없듯이 어느 공간도 같은 시간대에 위치하는 곳은 없다. 이 세계에는 수도 없이 많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한다. 시간 속을 거닐 수 있는, 시간 속을 떠다니는, 모든 여행자는 시간여행자다.
欲知蓮華藏頭尾問世尊
연화세계를 알고자 하는가? 그 처음과 끝을 세존께 물어보라.
세상의 모든 물음에는 답이 들어 있다. 답이 없는 물음은 물음이 아니다. 망상이다. 이 물음 속에 우리가 이르고자한 섬들, 연화세계를 꿈꾸던 섬들이 다 들어 있다. 이 바다에, 뱃길에 욕지, 연화, 두미, 세존도가 있다. 미륵도와 반야도가 있다. 우리가 이르고자 하는 세상이 연화세계라면 이 배는 반야용선이다. 오래전 섬들은 스스로 이미 연화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권력의 수탈과 억압을 피해 숨어들었던 섬. 숨어 살 수 있는 것만으로 그 땅은 이미 불국토였다. 연화세계이고, 샹그릴라고 파라다이스였다. 해적이나 권력의 마수가 은둔의 섬까지 뻗치기 전까지는.
무명대, 두 번의 죽음에서 되살아난 '무무'
욕지도를 처음 찾은 것이 언제쯤이었을까. 그때는 섬이 아니라 사람을 찾았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욕지면 동항리 부두에서 왼쪽 길로 접어든다. 도동, 덕동, 유동, 통단, 노적, 야포, 조선, 관청, 입석 마을이 모두 이 방면이다. 반대쪽으로는 청사목과 자부, 흰작살 해수욕장이 있다. 흰작살, 하얀 작살로 물고기 잡이를 많이 하던 마을이란 뜻이 아니다. 해변에 흰 작살(자갈)이 많이 깔려 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욕지 여객 터미널 옆, '웃음 꼬치 활짝' 꼬치전문점이 잠시 웃음을 준다. 그 옆으로 낚시 이야기, 길 이용원, 24시 미진마트, 민박, 노래방까지. 면 소재지에 모든 상업 시설이 몰려 있다. 여전히 바람은 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불곡(佛谷)에서 잠시 서성인다. 부첫골. 지금 교회가 있는 저 자리에도 예전에는 절이나 암자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세계를 지배하며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종교들, 절도 교회도 영원한 것은 없다. 오직 시간만이 세계의 유일한 주재자다. 날이 흐린 탓일까. 불곡을 넘어 혼곡(混谷)으로 가는 길은 혼미하다. 한 밤중도 아닌데 길을 잃었다. 혼곡, 어둔골, 산기슭 벼랑 끝에 있어 해가 빨리 지고 일찍 어두워지는 골짜기. 늘 앞바다가 안개에 혼미한 해안가 산비탈 골짜기에 그가 산다. 그의 거처는 무명대(無名臺) 그의 이름은 무무(無無).
'시대'를 살았던 누가 아닐까마는 그도 참으로 모진 생애의 들판을 건너 살아남았다. 그도 나도 살아남았음으로 가끔 안부를 묻기도 하고 불쑥 찾아가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살아남으라, 살아남으라, 살아남으라. 그리운 이 있거든 끝끝내 살아남으라. 살아남은 자들은 마침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니.
그가 욕지도로 숨어 든 것이 십 오년 남짓 될 것이다. 그는 끝내 낯선 섬 벼랑 끝의 땅에서도 살아남았다. 80년대, 그는 오랜 기간 서울 성수동 공장지대에서 야학을 했다. 아파치 추장처럼 당당한 체구의 그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나 역시 묶여있을 때 였다. 암벽을 타고 틈만 나면 산에서 살던 그는 석유 버너 폭발로 3도의 중화상을 입은 뒤 2년 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구도 그가 살아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으나 그는 두터운 고통의 장막을 뚫고 마른 나무에 새순 돋듯 살아났다.
고구마가 보살이다
다른 많은 섬들과는 달리 욕지도는 밭을 놀리지 않는다. 바다 일 못지않게 땅에서 나오는 소득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한 때 술의 주정으로 헐값에 수매 되던 고구마가 이제는 비싼 작물이 됐다. 고구마 수확이 끝난 겨울 밭에는 고구마 순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염소나 소의 양식으로 쓰일 것이다. 특별히 음식을 가리지 않는 내가 기피하는 두 가지 음식이 고구마와 꽁보리밥이다. 어려서의 기억 때문인가. 오랫동안 먹지 않았으니 지금쯤 다시 입맛이 돌아올 때도 됐으련만 아무리 시도해 봐도 여전히 고구마와 꽁보리밥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섬에서 살던 어린 시절, 보리와 함께 고구마는 섬사람들의 주식이었다. 고향 섬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 불렀다. 감자는 북(北)감자라 했다. 가을이면 밭에서 캐낸 고구마를 씻은 뒤 납작하게 잘라 말리는 일로 분주했다. '시달캐미'라 부르던 절광 고구마. 자른 고구마는 딱딱하게 말린 뒤 소주의 주정으로 수매했다. 겨울철 식량으로 남긴 고구마는 방안 한쪽에 대나무 칸막이를 만들어 보관했다. 고구마와 사람이 한방에서 잤다. 너무 따뜻하면 싹이 나고 너무 차면 얼어서 썩어버렸다. 고구마 광이 바닥나고 남겨둔 종자용 고구마에서 새순이 돋기 시작하면 봄이 왔다.
평지가 없는 욕지도의 비탈 밭마다 고구마 순들이 쌓여 있다. 고마운 일이다. 티베트에서는 야크가 보살이듯이 욕지도에서는 고구마가 보살이다. 일주도로를 걷는다. 세밑, 겨울바람이 차다. 해넘이를 보러온 관광객의 승용차들만 드물게 지나갈 뿐 도로에 다니는 차가 거의 없다. 칼바람 속이지만 자동차의 위협을 받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걷지 못하는 자신을 상상해 보라. 자동차 따위는 뭍에서나 타는 것이다. 섬에서는 무조건 걸어야 한다.
유동 마을 부근 절벽 위에 기와집이 한 채 있다. 무슨 사당일까. 재실일까. 건물 안이 그을려 있다. 불이 났던 것일까. 건물 앞으로 열녀문이 서 있다. 열녀를 모시는 사당인가.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극락도'란 영화의 세트였다 한다. 사당 안, 벽에는 불에 타다 만 열녀의 초상이 흐릿하다. 열녀의 얼굴에는 한이 서려 있다. 왜 아니겠는가. 먼저 간 서방님 따라가야 하는 청상과수에게 어찌 한이 없겠는가. 더구나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정혼자의 집에 들어와 모진 시집살이 견디다 목숨을 끊은 여인이었다면 그 한은 또 얼마나 깊을 것이냐.
이 열녀각이야 영화 속의 장소 일뿐이지만 때때로 만나게 되는 열녀문이나 열녀각에서 나는 자주 열녀의 비애를 본다. 더구나 그 열녀가 약을 먹거나, 목을 매거나, 절벽에 몸을 던지지 않고 이십일, 삼십일 씩 곡기를 끊고 마침내 굶어 죽은 열녀라면 그 비애는 더 크게 전해져온다. 그 죽음 이면의 진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단숨에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길을 두고 그리도 오랜 날을 굶주리며 서서히 죽어 간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녀가 곡기를 끊은 것은 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살고 싶다는 항변이 아니었을까. '나 이렇게 죽어 가고 있으니 살길을 열어 달라'는 절규였겠지. 단식은 저항의 수단이지 자살의 방편이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흔했던 것처럼 망해가는 가문의 부활을 위해 '열녀 되기'를 강요당하고 감금된 채 죽어간 여인들이라면 그 비애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돈 몇 푼 벌기 위해 강을 훼손 하는 것은 천국을 파는 일
수산물 양식이 큰 소득을 가져다주면서 섬에도 젊은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살고는 있지만 섬은, 농촌처럼 지속적으로 빈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교통의 불편보다 더 큰 이유는 아이들 교육이다. 욕지도에도 빈집들이 많다. 아주 사람이 살지 않거나 어장철이나 피서철에만 돈벌이를 위해 가끔씩 들어와 사는 집, 그 또한 빈집이다. 이 나라는 집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빈집에 사람이 들어가 살게 할 정책이 부족하다.
4차선 국도 옆으로 고속도로를 만드는 나라. 도로가 늘어도 막힐 때는 늘 막힌다. 휴가철이나 명절, 일 년에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늘 텅 비어 있는 도로. 그래도 이 땅은 언제나 도로 공사 중이다. 아파트를 짓는 것이 집 없는 자들을 위한 일이 아니라 건축업자와 부동산 투기꾼들을 위한 일인 것처럼, 터널을 뚫고 도로를 만드는 일 또한 국민들을 위한 일은 아니다. 그런 정책을 만드는 정치인들과 건축, 토목 관련 공무원들은 나라의 공복이 아니다. 건축, 토목 업체의 파견 직원들이다.
섬이라고 토목 마피아들로부터 무사한 것은 아니다. 골재 채취 명목으로 사라진 섬이 한 둘이겠는가. 섬이 망가지는 것은 태풍이나 풍랑 때문이 아니다. 탐욕 때문이다. 수 억 년 온갖 풍파를 견딘 섬을 인간은 하루아침에 파괴한다. 인간의 탐욕이 허리케인이나 쓰나미 보다 무섭다. 어떠한 태풍이나 해일도 섬 전부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은 작은 포크레인 한대로도 섬 하나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다. 나는 토목공화국이 두렵다. 벌써 200년도 전에 소로우는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을 향해 경고 한 바 있다.
"돈 몇 푼을 벌기 위해 강을 훼손 하려는 사람은 돈을 받고 천국을 파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반농반선
욕지도 일주도로를 걸어서 다시 무명대로 돌아오니 아주 날이 저문다. 섬의 밤은 길다. 저녁 예불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이곳 법당 추녀에는 수명이 다한 가스통을 매달았다. 종각이다. 이즈음은 겨울방학 수련을 온 어린 아이들로 무명대가 활기차다. 아이들은 새벽 네 시부터 예불을 하고 참선을 한다. 경전을 외우고 절을 하며 하루하루 어른이 되어간다. 승도 아니고 속도 아닌 공간. 무명대를 찾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를 하며 무무거사도 이 절벽에서 15년을 살았다.
내가 다시 그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병상에서 일어나고 또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해안의 외딴 섬에 들어가 산다고 했다. 그가 입산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하지만 그는 끝내 머리를 깎지 못했고 대신 사랑하는 연인의 머리를 깎아 산문까지 동행했다. 연인은 비구니가 되었다. 결국 그는 그가 모시던 어떤 스님과 욕지도까지 흘러갔고, 거기 빈집을 고쳐 토굴 생활을 시작했다. 반농반선(半農半禪)의 세월이었다. 낮에는 비탈 밭을 갈아 농사짓고, 밤에는 법당에 앉아 참선을 하고 그렇게 한 세월을 건너갔다. 한때 민중불교 운동에 투신 했던 스님은 이미 말기 암 환자였다. 그를 만나기 위해 처음 욕지도에 갔던 것이 12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미 스님은 없고 그만 혼자 남아 있었다. 내가 욕지도를 찾기 한달 전쯤에 스님은 열반에 들었다고 했다.
태풍이 오던 날 그와 스님과 도반 한사람, 공중 보건의와 연인, 그렇게 다섯이서 태풍 구경을 갔다. 스님을 비롯한 네 사람은 그대로 파도에 휩쓸려 가버렸고, 그 와중에서도 그는 다시 살아났다. 죽음의 바다에서 두 번째 생환이었다. 스님을 떠나보낸 뒤에도 그는 여전히 농사짓고 참선하며 살았다. 삶에 짓눌린 많은 이들이 그곳을 찾아 다시 기력을 회복한 뒤 돌아갔다. 15년 세월 동안 거기서 그가 출가시켜 스님을 만든 이가 50여명에 이른다. 그곳을 처음 다녀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 또한 어떤 섬으로 스며들었었다.그리고 오늘 소식도 없이 불쑥 다시 욕지도를 찾았다. 그 사이에 식구가 늘어 있다. 아이 둘과 여인 하나. 비구니였던 연인이 돌아와 그 아이들을 낳았다. 큰 아이가 벌써 초등학교 3학년이다. 그이는 그렇게 사는 것이 비구니 생활보다 세 배쯤은 더 힘들다며 유쾌하게 웃는다. 세 배 뿐일까. 그 고통이. 한 목숨 거두던 이가 세 목숨을 더 거두는 것이 아닌가? 세 목숨뿐이랴 무명대를 찾는 수많은 중생들을 무람없이 다 거두는 그이다.
죽음 곁에서도 삶은 따스하다
한해가 가고 또 한해가 시작 되고, 아침이 와도 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2007년의 달력이 2008년 것으로 바뀐다고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삶을 대하는 자세는 바뀔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아닐까. 그래서 한해의 첫날 찬바람 속을 걷는 의미는 각별하다. 오늘은 섬의 동쪽을 걷는다.
관청마을 앞길을 지나는데 할머니 한분이 가마솥에 불을 때고 있다. 부산 사는 손자가 비만이다. 살을 빼는데 호박이 좋다고 아들이 부탁해 왔다. 늙은 호박을 반나절 동안 고아낸 뒤 꼭 짜서 맑은 물만 다시 고는 중이다.
"중학교 대니는가 초등학교 대니는가 잘 몰라요. 안 가봐서."
할머니는 얼굴 본지도 오래돼 나이가 몇인지도 모르는 손자의 건강을 위해 겨울바람 속에 서 있다. 손자가 할머니의 정성을 알기나 할까. 할머니는 본래 욕지도의 유동마을 몽돌개에 나서 노적 마을 건너 푸리섬(초도)으로 시집갔었다. 푸리섬에서 6년을 살았다. 그때 "메르치도 잡고, 문에도 잡고" 살았다. 사람들이 다들 충무나 큰 섬을 찾아 떠나자 할머니 가족도 큰 섬으로 나왔다. 6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는 혼자 산다. 6남매를 낳아 길렀지만 지금은 모두 서울, 부산, 통영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다들 어렵게 살고 이랑께" 얼굴 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할머니가 가마솥에 지피는 것은 자기 몸에 온기를 불어넣는 장작불이기도 하다.
불기운에 얼었던 몸이 녹았다. 다시 길을 간다. 걸을수록 몸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단순 해 진다.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길을 가는 가. 오늘 내가 얻고자 열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얻고 싶어 하는 것이 진정으로 내 삶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일까. 오늘은 빈 몸으로 길을 가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많은 것을 가졌었다. 손수 지은 돌집과 자동차와 오디오와 빔 프로젝터, 냉장고와 손 전화와 수 천 권의 책들. 그때는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그것들을 다 버리고 길을 떠나왔다. 빈손의 길손. 내가 그토록 갖고자 열망하며 지었던 집마저도 지금의 나에게는 얼마나 하찮은 것이 되었는가. 삶에 꼭 필요한 것이란 무엇일까.
관청 마을을 지나 비탈진 언덕길을 오른다. 대체로 섬에서 사람 사는 마을의 뒤편은 공동묘지다. 볕이 잘 드는 봉분 근처에 자리 잡고 앉는다. 사람은 죽음의 뒷마당에서도 삶의 앞뜰을 생각한다. 죽음 곁에서도 삶은 따스하다. 그렇구나. 어떠한 삶도 양면이다. 슬픔의 뒷면은 기쁨이고, 상처의 뒷면은 치유다. 실연의 뒷면은 사랑이고, 절망의 뒷면은 희망이다. 어둠의 뒷면은 빛이다. 주저앉아 우는 길손들아! 일어나 또 가자.
필자 홈페이지:http://pogildo.pe.kr
블로그 http://blog.naver.com/bogilnara
(매주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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