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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빛으로부터 왔다

강제윤의 '섬을 걷다' <1> 덕우도

연재를 시작하며

이 나라에는 사람의 길이 없다. 사람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이 없다. 길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란 사실은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나서면 질주하는 자동차의 위협으로 사람들은 늘 위태롭다.

사람의 길을 찾아 다녔다. 섬에서 그 길을 발견했다. 섬의 길은 사람이 주인이다. 자동차의 위협이 섬이라고 비껴가지 않겠지만 섬의 길들은 아직 안전하다. 이제 사람들은 자동차를 버리고 섬으로 가야 한다. 걷기 위해 섬으로 가야 한다.

행자부에 따르면 한국에는 4400여개의 섬이 있다. 그 섬들 중 사람이 사는 섬은 대략 500여개다. 한국은 '섬나라'다. 나는 섬에서 태어났고 오랫동안 섬에서 살았다. 섬을 떠난 뒤에도 섬을 벗어나지 못한다. 2006년 가을부터 한국의 섬들을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10년 동안, 사람 사는 한국의 모든 섬을 걸어갈 것이다. 일본의 하이쿠 시인 바쇼는 "교토에 있어도 나는 교토가 그립다."고 노래한 바 있다. 나는 섬을 걸으면서도 섬이 그립다.


완도, 폭풍주의보

"나는 인간은 '동물'이라는 사실에 더 주목한다. 다시 말하자면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이다."

( 이일훈, '모형 속을 걷다')


'동물'이란 '짐승'이 아니라 움직이는 존재다. 건축가 이일훈의 일깨움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내 그 단순한 사실을 잊고 살았을 것이다. 동물(動物)이란 얼마나 생명력 넘치는 존재인가. 동물, 동물.... 동물인 내가 너무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걷지 않았다. 유랑자로 몇 년을 떠돌았으나 나는 늘 탈 것에 실려 다녔다. 부끄럽게도 유랑자가 움직이는 일보다 움직이지 않는 일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차를 버리고도 버린 보람이 없었다. 나의 차를 버린들 남의 차를 타고 다닌다면 진정으로 차를 버린 것이 아니다. 몇 해 전까지 나는 남해 바다의 어떤 섬에서 8년을 살았다. 섬에 사는 동안 내가 섬을 떠난 것은 오로지 뭍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섬을 꿈꾸면서도 섬에 붙들려 섬으로 가지 못했다. 한 섬을 버린 뒤에야 나는 비로소 모든 섬으로 간다. 내가 섬으로 가는 것은 걷기 위해서다. 움직이기 위해서다. 움직이는 존재, 동물이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서다.
▲ 다시 뱃길이 열렸다. 생일도에 잠시 정박했던 배가 덕우도를 향해 간다. ⓒ강제윤

완도 버스터미널 부근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황제도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서둘러 여객 터미널에 도착했으나 배는 뜨지 않는다. 그렇게 오래 섬에 살았으면서도 폭풍주의보 생각을 왜 못했던 것일까. 결국 나를 묶은 것은 바람이 아니다. 파도가 아니다. 나를 묶은 것은 나다. 폭풍주의보가 내려도 평수 구역의 섬들로는 배가 다닌다. 뱃길이라고 다 같은 길이 아니다. 평온한 날씨에는 무관하지만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거세지면 배의 등급에 따라, 섬의 위치에 따라 항해 할 수 있는 바다가 달라진다.

항로는 난이도에 따라 평수구역, 연해 구역, 근해 구역, 원양 구역 등으로 나뉜다. 평수 구역은 '호수, 항만이나 만 안의 수면으로서 법령으로 지정한 항해 구역'인데 쉽게 말하면 섬이나 만으로 둘려 쌓여 있어서 바람이 불어도 파도가 크게 일지 않는 바다를 말한다. 완도에서는 약산도, 금일도, 보길도, 노화도, 소안도 등의 섬들이 평수 구역 안에 있다. 폭풍 치는 날, 나는 평수 구역의 섬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먼 바다 뱃길이 열리기를 기다릴 것이다.

바다는 섬의 희망이고 절망이다. 육지로 가는 뱃길을 열어주는 통로인 동시에 단절이다. 우주까지 가는 첨단 과학의 시대에도 섬은 여전히 원시 바다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틀째 배가 뜨지 못한다. 여객 터미널 매표원 여자는 무심하다. 거센 풍랑에 배 못 뜨는 일이 그녀에게는 일상이다. 어차피 폭풍주의보가 해제 되더라도 오늘 황제도 배는 없다고 여자는 잘라 말한다. 배 시간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이다. 황제도는 홀수 날에만 간다.
▲ 덕우도 선창가에서 당숲이 보인다. 숲은 섬의 지붕이다. 그 아래서 사람들은 비바람을 피하고 편안히 잠든다. ⓒ강제윤

폭풍주의보가 아니라도 뱃길은 하루 걸러 하루씩 묶이는 것이다. 이틀에 한번 뱃길은 그나마 다행이다. 황제도 뱃길의 최종 기항지인 원도는 매주 일요일 한번만 배가 뜬다. 섬에서 20년을 살았으면서도 한 주에 한번 밖에 배가 다니지 않는 섬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제 눈높이에서만 세상을 본다. 뭍에 사는 이는 절대 섬에 사는 이의 고독을 알 수가 없다. 큰 섬에 사는 이들 또한 작은 섬에 사는 이들의 고통을 알 수 없다. 일주일에 한 번씩 뱃길이 열리는 섬사람들에게는 이틀에 한 번씩 배가 다니는 섬도 대처다.

덕우도

오후가 되자 풍속이 줄고 배들이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황제도행은 미루자. 오늘은 덕우도까지만 가자. 섬사랑 5호가 출항 한다. 1층 선실에는 세 분의 할머니가 벌써 자리를 잡고 누웠다. 고단했을 것이다. 섬사람에게는 고작 한 시간 반의 뱃길을 위해 이틀쯤 기다리는 일도 예사다. 섬에 사는 일은 기다리는 일이다. 배를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비를 기다리고, 물때를 기다린다. 몰려오는 멸치 떼를 기다리고, 커서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을 기다린다. 내리는 사람이 없어 모황도에는 서지 않고 배는 생일도에 잠시 들렀다가 내처 달린다. 생일도에서 제법 여럿이 탄다. 면소재지에 다녀오는 덕우도 사람들. 덕우도에 도착한 배가 승객들을 부려 놓고 급하게 뱃머리를 돌린다. 무정하다.
▲ 덕우도 선창가. 주민들은 양식 어구들을 손질한 뒤 바다 밭으로 나가 삶을 일군다. ⓒ강제윤

섬은 위태로워 보인다. 가장 높은 땅이 130미터에 불과 하다. 섬의 허리, 선착장에서 반대편 해변까지는 50미터가 넘지 않는다. 큰 태풍이라도 불어 파도가 치면 넘치고도 남을 거리다. 어떻게 섬은, 섬사람들은 수 천, 수 백 년을 무사했을까. 덕우도는 완도항에서 동남쪽으로 26킬로미터 해역에 있다. 같은 자를 쓰더라도 바다와 육지는 거리 감각이 전혀 다르다. 바다의 26킬로는 육지의 260킬로만큼이나 먼 거리다.

덕우도에 사람이 터 잡고 살기 시작한 것은 350여 년 전부터다. 한국 섬들의 거주 역사가 대부분 3, 4백년에 불과한 것은 그 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섬들 또한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유사 이래 섬들은 해적의 침탈이나 육지 권력의 군사적 목적으로 자주 소개되곤 했다. 섬들이 비워진 것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구들의 약탈이 극심했던 때문이다. 군사력이 미약한 이 땅의 왕조들은 왜구들에게 식량이나 거점을 내주지 않기 위해 손쉬운 공도(空島)정책을 썼다. 섬들에서 본격적으로 사람살이가 다시 시작 된 것은 임진 병자 양대 전란을 전후한 시기였다.

선창가 민박집에 짐을 풀고 섬을 걷는다. 섬의 중심에 당산이 있다. 특이하게 덕우도의 당신은 해신이나 산신이 아니다. 당집에는 덕우도에 처음 들어온 입도조(入島祖)를 신으로 모셨다. 많은 섬에서 당제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이 섬에서는 아직껏 당제를 정성껏 모신다. 외래신의 유입으로 해신과 산신 등 수많은 토착 신들이 쫓겨났지만 조상신만은 여전히 우리 삶의 중심에 거처하는 까닭일 것이다. 교회가 생긴 지 20년이 지났어도 신자는 고작 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 섬에서만큼은 조상신이 주신이다. 수백 그루의 크고 작은 상록수들이 작은 당집을 신장처럼 지키고 서 있는 당산. 조상신은 나무 신장들을 부려 자손들을 돌본다.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생달나무, 녹나무, 감탕나무 등 상록 활엽수가 무성한 숲. 나무들은 덕우도에서만 수 백 년을 살아온 고목들이다. 이 섬의 사람살이 역사보다 오래된 나무들. 당숲이 바람과 접신하며 몸을 부르르 떤다. 인간을 제외한 자연은 만물이 서로 소통한다. 쥐가 해일이 전하는 소리를 듣고, 제비가 태풍과 교신하고 피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문화에서는 태초의 인간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 믿어진다.
▲ 덕우도

지금의 인간은 음성으로 소통 하지만 최초의 인간은 빛으로 만물과 소통 했다. 최초의 인간은 광음천에서 빛으로 내려왔다. 하늘에서 내려온 인간은 스스로 빛이 나는 존재였다. 온몸이 광명을 발하고 입에서 빛이 쏟아져 나와 빛으로 소통 했다. 바람과 구름처럼 자유롭게 날아 다녔다. 그때 사람들은 생각만으로도 배가 불러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었다. 땅의 곡식들을 먹기 시작 하면서 살이 찌고, 몸은 거칠어졌다. 탐욕이 생겨 곡식들을 저장하고 소유하게 되었고 몸은 빛을 잃었으며 더 이상 날아다닐 수 없었다. 땅에 붙들려 땅의 지배를 받으며 살게 됐다. 인간은 마침내 우주와 소통 할 능력을 상실했다. 불교 초기 경전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에 전하는 이야기다.

인간이 빛으로부터 왔다는 이야기는 세계의 생명들이 다 빛에서 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풀 한 포기마저도 그 근원은 태양이다. 정령의 '빛'을 상실한 인간들은 매개자의 도움을 받을 때만 우주와 소통할 수 있을 뿐이다. 덕우도의 영매는 당산나무의 정령들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태초부터 나무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다리로 믿어졌다. 우주목, 신목들은 바람을 부리고 구름과 비를 불렀다.

이 섬사람들은 조상신과 당산나무들의 도움으로 살아 왔다. 나무의 부림을 받는 바람이 유독 덕우도 사람들의 뱃길만은 피해 갔다고 섬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다. 풍선(돛단배)을 타고 다니던 시절, 평일도, 생일도 배들과 나란히 가도 덕우도 배는 한 번도 넘어진 적이 없었다고 주민들은 '기억'한다. '우주'의 주재자인 조상신에 대한 신앙이 깊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작은 섬의 신이 세계를 지배하는 큰 신들의 침입을 물리친 것은 순전히 섬사람들의 지극한 신앙심 덕이다. 신들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신들의 힘이 아니다. 신을 믿는 자들의 믿음의 깊이다.

"머 하러 왔답디야. 학생이랍디야"
"아뇨, 뭔 절을 찾아 댕기는지 절이 있는가 물어 봅디다."

마실 나온 동네 사람이 민박집 주인 여자에게 묻는다. 관광지도 아닌 작은 섬에 젊은 사내 혼자 오는 것이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낚시꾼도 아니고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이 외딴 섬까지 온 것일까 의아했을 것이다.

어째서 나는 섬으로만 떠도는 것일까. 외로움을 찾아다니는 것일까. 밤새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바람의 매질에 대숲이 운다. 길 떠나 한데 잠을 자는 날들이 많다. 추운 잠이 마음은 편하다. 어머니는 한 겨울에도 따뜻한 잠을 자지 않는다. 보일러는 동파의 위험이 있거나 길 떠났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잠시 틀 뿐이다. 죄 많은 아들은 때때로 추운 잠을 자는 것으로 속죄한다. 민박집 주인은 전기 판넬의 불을 켜는 법을 일러 주고 갔으나 아들은 끝내 난방을 켤 수가 없다. 어머니는 한 밤 중 화장실에 갈 때도 불을 켜지 않는다. 가난하여 단지 돈을 아끼려는 뜻만이 아니다. 낭비는 털끝만큼도 하지 않는 검약의 삶을 평생 몸으로 실천 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참된 자발적 가난의 자세를 배웠다. 나의 잠을 방해 하는 것은 추위가 아니라 생각이다.

삶과 죽음은 늘 등 기대고 서 있다

아침이 와도 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오늘도 배는 뜰까. 섬의 동쪽에 대부분의 집들이 터를 잡았다. 볕이 잘 드는 방향이다. 서쪽은 당산과 몇 채의 집뿐이다. 섬의 허리를 가로지른 포장도로를 따라 걷는다. 섬의 남쪽 바다에는 황제도, 장도, 원도 등의 섬이 열을 지어 덕우도를 감싸준다. 큰 바람으로부터도 덕우도가 무사한 까닭이다. 섬의 동쪽 뒷산을 5분 남짓 오르니 포장도로가 끝난다. 도로의 끝은 쓰레기 매립장이다. 산길을 2~3분 더 오르니 공동묘지다. 섬 주민 전체의 선산이다. 섬이 작아 집안마다 선산을 따로 가질 수 없었겠지. 섬의 동쪽 앞뒷면에 양택과 음택이 등 맞대고 앉았다. 삶과 죽음은 늘 이렇게 등 기대고 있다. 350여 년 동안 이 섬에서 살다간 사람이 수천, 수만은 될 텐데 그들은 모두 어디에 묻혔을까. 그 전 시대 사람들의 흔적은 또 어디로 간 것일까. 무덤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 섬에서 매장의 풍습이 시작 된 것이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닐지도 모른다.
▲ 땅의 밭은 멸치 건조장이 되었다. ⓒ강제윤

섬의 허리께에 폐교 건물이 있다. 금일초등학교 덕우 분교장은 2006년 9월 1일자로 문을 닫았다. 옛 학교 마당에는 어구들만 가득하다. 해안선 둘레 5.6킬로미터, 면적 1.2 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한 작은 섬에 한때 5백여 명이 살았던 적도 있다. 그때는 학생 수만 100명이 넘었었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완도나 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부모들은 육지와 섬 사이를 오가며 '반살이'를 한다. 반반씩 두 집 살림을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까지 학교 때문에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은 가혹하다. 도시의 아이들은 외국으로 조기 유학을 보내고 섬의 아이들은 뭍으로 조기 유학을 떠난다. 어린아이들을 유민으로 만든 것은 무엇일까. 국가일까, 부모들일까, 욕망일까.

섬사람의 숫자는 줄었어도 소득은 높다. 젊은 사람들도 여전히 외딴 섬에 사는 이유다. 완도 여느 섬처럼 이곳 또한 전복 양식이 주업이다. 완도에서 처음으로 전복 양식을 시작된 곳이 덕우도다. 문어 통발과 낭장망(고정식 그물) 멸치잡이 등도 소득원이다. 많은 섬들이 그렇듯이 덕우도의 농토는 더 이상 경작 되지 않는다. 밭들은 온통 검은 비닐로 덮여 있다. 미역이나 멸치 등을 말리는 건조장이 된 것이다. 바다 일의 노동 강도는 때로 초인적이지만 섬 주민들의 수입은 상당하다.

하지만 소득이 늘어도 일의 양은 줄지 않는다. 오히려 소득의 증가와 비례해 일의 양이 늘어만 간다. 재산의 증가에도 삶은 여유로워지지 못한다. 더 큰 텔레비전과 신형 세탁기, 대형 김치 냉장고와 고급 가전제품들만 고단한 삶의 보상이다. 어민들은 돈을 벌어 재벌 기업의 성장에 기여한다. 아이들을 뭍으로 내보내 아파트를 사주고, 학원에 보낸다. 그렇게 건설업자들의 배를 불리고 사교육 시장을 먹여 살리는 데 일조한다. 더러 증권 투자로 망한 자식들의 빚을 갚아주고 아파트 평수를 늘려 주는 데 보탬을 준다. 물질의 풍요와 삶의 여유는 크게 관계가 없는 듯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일만 하다가 늙어간다. 나이 들어서 남는 것은 골병뿐이다.

연정이

섬은 천천히 돌아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제 섬을 떠나야 할 시간이다. 배 시간 보다 일찍 민박집을 나선다. 선창가 상점 앞에서 여자 아이 하나가 빵을 뜯고 있다.
▲ 제가 살아 헤엄치던 바다를 바라보며 말라가는 물고기들의 마음이란 대체 어떤 마음일까. ⓒ강제윤

"맛있니?"

"맛 있어요."

아이는 빵 맛에 취해 빵에서 입을 떼지 못하고 대답한다. 양지바른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이일훈의 책을 읽는다.

"아저씨, 여기 있었구나."

"빵은 다 먹었니."

아이가 옆에 와 앉는다. 나는 다시 책으로 눈이 간다. '경험은 짧을수록 오해가 많다.' 섬에 대한 육지 사람들의 오해 또한 그렇다.

"아저씨, 책 나 줘."

아이가 책을 나꿔채려 든다.

"안 돼 네가 볼 책이 아니야."

"그래도 줘."

아이는 고집이 세다.

"아저씨 돼지."

"왜 내가 돼지니, 아저씨는 아침도 안 먹었는걸. 너는 아침밥 먹고 빵까지 또 먹었잖아. 그러니 네가 돼지지."

"그래도 아저씨가 돼지야."

"몇 살이니?"

"말 안 듣는 여섯 살."

"미운 여섯 살이구나."

"그래, 나 아저씨 말 안 들을거야. 어서 책 줘."

"안돼"

"이름이 뭐니?"

"연정이. 이연정"

"근데 아저씨, 정말 밥 안 먹었어."

"응"

"우리 집에 오지 그랬어."

"니 네 집을 몰랐잖아."

"바보, 저기 보이지. 파란 지붕. 거기가 우리 집이야. 다음에는 밥 굶지 말고 거기로 와. 알았지."

나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삼촌, 책 보지 마."

책을 달라는 것이 아니었구나. 같이 놀자는 것이었구나. 눈치 없는 어른이었다. 어느새 호칭이 삼촌으로 바뀌고 말았다. 연정이랑 한참을 놀았다. 황제도에 갔던 배가 돌아 나온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려는데 연정이가 가방을 잡는다.

"삼촌, 가방 내가 들어줄께."

"안돼, 너보다 무거워."

"그래도 이리 줘."

연정이는 배낭을 어깨에 메고 일어서려 안간힘을 쓴다. 배낭은 꿈쩍도 않는다. 내가 다시 배낭을 붙들고 일어선다.

"안 돼, 삼촌 가지마."

"가야돼. 연정아, 삼촌 나중에 또 놀러 올게."

"안돼, 그래도 가지마."

"연정아, 배 떠나잖아."

"그럼 나도 데려가."

"엄마, 아빠는 어쩌고."

"그래도 데려가."

"연정아 삼촌 가야돼. 배 떠나려 하잖아."

연정이는 내 옷자락을 놓지 않으려고 온 힘껏 붙든다.

"에이, 배야 떠나 버려라."

배낭을 들쳐메고 연정이를 안아서 달랜다.

"삼촌 가지마."

연정이의 목소리에 물기가 흐른다.

"잘 있어. 연정아, 또 올께."

잠깐 사이에 깊은 정이 들었다.

"삼촌, 그럼 한번만 더 안아 주고가."

연정이를 번쩍 들어서 안아준다.

"잘 있어. 건강하구."

연정이를 내려놓는다. 연정이는 다시 내 소매를 붙든다. 배가 떠날 태세다.

"연정아, 안녕."

나는 연정이를 뿌리치고 서둘러 배에 오른다. 배가 떠난 뒤에도 선창가에 앉아 손을 흔든다. 아이가 얼마나 외로웠던 것일까. 나도 그랬었지. 어린 날, 해변에 서서 지나가는 배만 보면 손을 흔들곤 했었지. 연정이는 그렇게 한참을 손 흔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정이는 배가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내 존재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말 것이다.

필자 소개

남해 보길도 돈방골에서 태어났다. 1988년 <문학과 비평>을 통해 시인의 길로 들어섰으며, 「문화일보」의 '평화인물 100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인권활동가로 살다가 고향인 보길도로 귀향해 8년 동안 '보길도 시인'으로 살았다. 보길도의 자연하천을 시멘트 구조물로 바꾸려는 시도를 막아 내는 등 고향의 자연을 지키는 일에 힘썼으며 33일간의 단식으로 보길도의 문화유산 파괴를 막아 내기도 했다.

2005년 가을 홀연히 보길도를 떠나 청도 한옥학교 한옥 목수 과정을 졸업한 뒤 지금껏 거처 없는 유랑자로 살고 있다. 2006년 가을, 완도군 덕우도를 시작으로 섬 순례에 나섰으며, 10년 계획으로 사람 사는 한국의 모든 섬 5백여 곳을 걸어서 순례할 예정이다.

자동차와 손전화를 갖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는 '3무'의 삶을 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 강제윤 티베트 로드에세이> 등이 있다.

필자 홈페이지: http://www.pogildo.pe.kr


블로그http://blog.naver.com/bogilnara

<이 에세이는 매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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